◈ 고산농악(孤山農樂) 고산농악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내환동 일대에서 전승되는 농악이다. 옛날 내환동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이면 상당(上堂), 중당(中堂), 하당(下堂)에서 동제(洞祭)를 지냈다. 그때 상당, 중당, 하당을 다니며 풍물을 치고 노는 것이 고산농악이다.
고산농악의 특징은 한 자연촌락의 노인들 중심으로 구성되어 고유의 전통적인 미를 잃지 않고 마을 단위의 향토색 짙은 농악형태를 유지하는 점이다. 연행과정에서 ‘닭쫓기놀이’는 고산농악에서만 찾아볼수 있는 독특한 놀이 마당이다. 상쇠 장이만(남. 사망)에 의하여 쇠가락이 전승·보존되어 오다가 현재의 예능보유자는 정창화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부락마치, 조름세, 굿거리, 살풀이가락 등의 가락을 칠 수 있었다고 한다.
고산농악의 내용은 부락마치(길매구가락), 조름쇠, 굿거리, 살풀이 등으로 구성되며, 편성과 보색은 쇠 2명(상쇠와 종쇠가 있다), 징 6명, 북 10명, 장고 10명, 소고(상모3) 14명, 포수 1명, 양반 1명, 색시 2명, 농기 3명, 뜅각 1명이다.
내환동은 농악의 전승유지를 위해 19세기부터 계(契)가 조직되어 왔으며, 그때 사용한 계첩(契牒)도 남아 있다. 1983년 제2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문공부장관상(우수상)을 탔다. 그때 받은 상금을 기금으로 고산농악대를 조직하여 전승하고 있다.
◈ 욱수농악 욱수농악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동에서 자생하여 전승되는 농악이다.
욱수동은 1981년 7월 경산군 고산면 욱수동에서 대구직할시로 편입된 130여호의 주민이 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는 자연촌락이다. 욱수농악은 이 마을에서 해마다 정월 초사흘날 관행하던 동제 때 동제당에서 신내림을 축원하는 천왕맞이굿과 이 굿에 뒤따르는 판굿과 대보름 때의 걸립(지신풀이), 그리고 달불놀이 때의 마당놀이가 하나의 과정이 되어 전승되었다. 경상도 지방의 다른 농악은 농사굿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반해 욱수농악은 동제와 관련된 축원농악과 판굿이 복합된 진굿에 가까운 농악이라는 특징이 있다.
동제는 1970년대의 도시화 과정에서 중단되었고, 달불놀이는 입산금지 이후 없어졌으나 농악과 지신풀이는 1963년부터 친목계를 조직하여 전승되어 오다가 1987년 제28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이듬해인 1988년 5월 30일에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고, 1989년에는 이 마을에서 출생하여 농악을 전승한 김호성(金浩星)씨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욱수농악의 편성은 상쇠(1명), 종쇠(1명), 징(6명), 북(8명), 장구(8명), 법고(12명), 목나팔(1명), 양반(1명), 포수(1명), 색시(1명), 농기수(1명), 기수(2명)로 되어있다.
◈ 효자 하광신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하효자 정려각은 대구는 물론 경북지방 일원에서 가장 오래된 효자비의 하나로 고려 때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낸 하광신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조정이 정문을 내려 세운 것이다. 하광신은 달성 하(夏)씨로 달성 하씨의 시조는 중국 송나라 대도독이었던 하흠(夏欽)인데 고려 때 우리나라에 정착하였다.
이후 그 아들 하용(夏榕)이 고려를 침공하는 오랑캐를 무찔러 큰공을 세우자 조정에서 달성군(達城君)에 봉했는데 이때부터 하씨들이 대구 부근에 많이 살게 됐다.
하광신은 달성군에 봉군된 하용의 손자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광신의 어머니가 몇 해째 중병이 들어 누워 있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늦겨울이었다. 병상의 노모는 갑자기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효성이 극진한 광신이지만 기가 찼다. 엄동설한에 어디가서 복숭아를 구해 온단 말인가? 그는 마을 뒷산에 올라 자기의 효성이 부족함을 한탄하고 있었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 졌다. 곁에서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왔는지 모르게 송아지만한 호랑이 한마리가 서 있는게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달아나려고 하다가는 당장 물려죽을 것 같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호랑이는 광신에게 덤비기는커녕 그 앞에 엎드려 꼬리로 자꾸 자기 등에 올라타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광신은 영문도 모른채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호랑이는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귓가에는 바람소리만 들리기 한참, 호랑이가 멈춘 것 같아 호랑이 등에 찰싹 달라붙은 채 질끈 감았던 눈을 뜨니 깊은 산골인데 저만치 외딴집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광신은 기이하게 여겨 불빛이 새어나오는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방문을 여는데 집주인이 방문을 여는 순간 광신의 눈에는 막 제사를 마친 제사상 위에 놓인 붉으레한 복숭아가 보였다. 얼른 방으로 들어간 광신은 사정을 얘기한 뒤 복숭아 한개만 달라고 간청했다. 집주인은 광신의 얘기를 다 듣고 나더니 깜짝 놀라며 매년 집 주위 산에서 자생하는 산복숭아를 몇 접씩 따다가 식구가 먹고 그 중 싱싱하고 좋은 것을 남겨 두었다가 부모 제사 때 써오는데 신기한 것은 다른 해 같으면 저장해둔 복숭아가 겨울을 지나는 동안 대부분 다 썩고 한두 개 겨우 쓸까말까 했는데 금년에는 성한 것이 여러 개 있어 그것을 모두 제사상에 올려놓았는데 하효자 같은 사람이 있어 하늘이 도운 모양이라고 감탄했다.
광신은 주인이 주는 복숭아를 받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한 뒤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렸다. 그뒤 어머니가 간호의 보람도 없이 세상을 떠나자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3년을 지성껏 시묘살이했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충숙왕은 정문을 내려 그가 살던 마을에 비석을 세우게 하고 그의 자손에게는 특별히 부역까지 면해주도록 했다고 한다.
◈ 수성동 느티나무의 전설 수성구 수성 1가 옛날 대륜중고교(현재 신세계 타운) 남쪽 담장밖에 서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는 수령이 4백여 년이 넘는 것으로 오랫동안 동네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보호받는 나무이다. 즉 이 느티나무 역시 어느 동네의 그것처럼 당목으로 음력 정월 14일 제사를 지내왔다. 그러나 이 나무 앞에서의 제사는 다른 동리의 그것보다 더욱 엄숙한 절차로 치러졌다. 이렇게 동민들의 추앙을 받던 느티나무도 일제시대에는 민족과 함께 수난을 겪어야 했다. 지금도 이곳 일대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구전으로 전해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그 때 생긴 것이다. 지금부터 약 50년전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80연대 병력 일부가 이 부근 들판에서 훈련을 하다가 이 나무 아래서 휴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그냥 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민들이 당목으로 섬기는 그 나무를 발로 차기도 하고 나무가지에 걸터앉아 대검으로 껍질을 벗기는 등 행패가 극심했다.
이 나무를 당목으로 보호하고 해마다 그 앞에 제사를 지내는 동민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무례한 행동이었다. 보다 못한 노인 한분이 이 나무는 동네의 수호신인만큼 그 아래서 조용히 쉬는 것은 괜찮지만 무례한 행동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노인의 말을 들은 일본군은 코웃음치면서 그런 허무맹랑한 미신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나무가 신목(神木)인지 아닌지 시험해 봐야겠다고 나무 주위에 보리짚단을 가득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총과 칼을 가진 일본군을 말릴 수도 없고 동민들은 겁먹은 얼굴로 그들의 만행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건 또 어찌된 일인가? 보리짚단에 붙은 불은 비가 오지도 않는데 느티나무에 옮겨 붙기 전에 제풀에 꺼져 버렸고 꺼지면서 내뿜는 연기에 휩싸인 불을 지른 일본 병사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더니 개거품을 토하며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전설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길 없지만 동리 사람들은 지금도 어린이들이 나무를 발로 차거나 가지를 꺾으면 이 얘기를 하며 나무를 해치지 못하도록 한다.
◈ 두사충과 모명재 대구시내에서 경산으로 통하는 대로변 오른쪽 형제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모명재(募明齋)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후손이 선조를 위해 세운 것이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 사람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나왔다. 그가 맡은 일은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라는,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참모로서 항상 군진을 펴는데 조언해야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수군을 통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아주 친했다. 임란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陳璘) 도독과 함께 우리나라로 다시 나왔다. 이때 두사충은 충무공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충무공은 우리나라 장수도 아닌 외국사람이 수만리 길을 멀다 않고 두 번씩이나 나와 도와주자 감격하여 두사충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을 표했다. 시의 내용은 충무공이 두사충을 아낀 마음이 잘 드러난다.
이후 정유재란도 평정되자 두사충은 압록강까지 매부 진린을 배웅한 후 자기는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두사충에게 대구시내 중앙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했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두사충은 그 땅을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두씨들은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그러나 사람이 늙으면 누구나 고향이 그리운 법,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는 두사충이었지만 고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현재의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쪽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나이가 더 많아지자 어느 날 자기가 젊었을 때 대구 근교를 샅샅이 뒤져 잡아 둔 묘터를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마를 타고 묘터가 있는 고산(孤山)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쇠약한 몸이라 도저히 고산까지 가지 못하고 담티재에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사충은 아들에게 오른쪽의 형제봉을 가리키면서 저 산아래 계좌정향으로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까지 가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쓰게 되었고 두사충이 잡아둔 묘터에는 나중에 고산서원이 들어섰다.
◈ 들안길 수성 전신전화국에서 수성못 방향으로 뻗은 도로 좌우에는 대형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있어서 식도락촌을 이루고 있다. 먹을거리가 많아 먹자골목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수준 높은 요리와 독특한 인테리어, 넓은 주차공간을 두루 갖춘 식당이 밀집해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규모나 명성에 비하자면 먹자골목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지난 1990년대 말경 자동차의 갑작스런 증가로 주차난에 부딪힌 대구의 식당업체들이 넓고 땅값이 싼 이 일대로 자리를 옮겨온 것이 시초가 되었다. 현재 들안길 일대에는 130개의 음식점이 성업중이고 업체수 만큼이나 다양한 음식들을 선보이고 있다. 뷔페, 한식집, 일식집, 갈비집, 횟집, 레스토랑 등은 최고의 맛과 시설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으며 국수, 보쌈, 해장국, 장어, 복어 등 한두 가지만을 취급하는 전문식당들도 고유의 비법으로 손님을 끌고 있다. 인근에 수성유원지가 자리잡고 있어서 가볍게 들러 휴식을 취하기에도 좋다
◈ 경신고 앞 패션단지 수성구 범어 4동 경신고 일대에 위치한 의류상설 할인타운. 1997년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현재 40여개 점포가 들어서 신세대들의 알뜰쇼핑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 범물동 카페골목 수성구 범물동 일대에 신세대의 취향에 맞는 독특한 실내장식과 분위기로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카페촌이 형성되어 있다. 이 일대에 중산층 아파트들이 들어선 1990년대 중반부터 들어서기 시작, 그들의 기호에 맞는 휴식공간으로 현재 30여개 업소가 성업중이다.
◈ 막창구이 막창하면 대구를 떠올릴 정도로 유독 대구에서만 인기. 수성구 지산동 수성호텔에서 지산동으로 조금 올라가면 왼편에 막창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소나 돼지의 부산물중 하나로 팔리고 있는 막창은 창자의 맨 마지막 부분으로 항문 직전까지의 직장을 말한다. 노골노골하고 질깃하면서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우러나고 일반고기에 비해 값이 싸다는 점이 소주와 함께 서민들의 입맛이 딱 맞아 떨어진다.
◈ 포도 1981년 경산에서 수성구로 편입된 고산지역에 포도가 많이 재배되고 있다. 예전에는 복숭아를 주로 재배했으나 수익성과 함께 고산지역의 배수가 잘되는 토질이 포도생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포도에는 포도당 외에 타르타르산·이노시톨·펜토산·타닌·류신 등이 있으며, 비타민 B·비타민 C도 소량 들어있다. 생식 외에 포도주·쥬스·잼·젤리 등으로 가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