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보안 목사 구타사건 노흥준(盧興俊)은 비아동 태생으로 정의와 덕행이 투철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세종 12년(1430) 광주목사 신보안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 비리를 자행하자 정도를 촉구하며 구타하였던 바 광주목이 무진주군으로 강등되고, 성종 20년(1489) 판관 우윤공이 유시(流矢)를 맞은 사건이 광주인의 소행이라고 단정하여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
◈ 광주학생 운동의 도화선, 이경채(李景采, 1910∼1978) 사건 송정동 태생으로 광주고보 5학년때 제2차 동맹 휴학사건 선언문 작성의 용의자로 구속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셈이다. 그는 도내 각 중학교에 배포한 글 속에 「조선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oooo」으로 표시하였으니 그 당시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경천동지의 대사건이었다. 이에 당황한 학교당국은 즉시 이경채를 퇴학 처분했다. 이에 반발한 전교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학교 정문으로 나섰다. 학생들의 동요에 당황한 교직원들이 강당으로 모여들어 대책회의를 열려고 하자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나가 맹휴에 돌입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격렬한 격문을 각 가정에 발송하여 후원을 청하고 분기를 촉구하였다. “학부형 여러분! 우리들의 맹휴는 일본의 식민지 노예 교육 정책 밑에 짓밟히고 있는 400여 학도들의 최후의 외침입니다. 학교당국의 처사는 우리의 참다운 정신을 박탈하고 우리로 하여금 얼빠진 한낱 고기덩이로 만들려는 가공할 술책입니다.(중략) 눈앞에 내 자식 하나보다 이 민족 이 강산이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학부형님 여러분께서는 끝까지 우리편에 서서 신조선건설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려는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일치 협력하여 문제 해결에 힘을 보태 주시길 절망하는 바입니다” 이 맹휴 사건으로 광주고보에서는 이경채를 비롯하여 16명이 옥고를 치렀고 40명의 퇴학생과 3백 여명에 달하는 무기 정학생을 내고 5개월만에 일단 종식된 것처럼 보였으나 내연의 불길은 남아 있다가 다음 광주학생 항일대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 「진담청화」 단돈 70원으로 얻은 광산군청 청사부지 지금의 광산구청 청사는 일제시대 때 동양척식회사의 곡물 보관 창고였는데 1935년 10월 광산군이 광주시에서 분리되고, 해방이 된 뒤에까지도 군 청사는 광주시 대의동에서 14년간 옮겨오지 못했다. 생활상의 불편에 시달린 민원이 들끓고 군민들의 불같은 여망에 따라 「군 청사 이전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회 간부들은 도(道)와 중앙정부에 교섭한 결과 건축비는 국비로 보조를 해주는데 부지는 자체에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광복직후의 혼란기에 1,000평이 넘는 토지의 구입자금 마련의 길은 안개 속처럼 막연하기만 했다. 그래서 생각한 곳이 지금의 자리였다. 그때 동양척식회사는 신한 공사로 개칭되어 있었다. 추진위원장으로 있던 정순조(鄭純朝, 제2대 국회의원)와 장안섭(張安燮, 송정읍장)은 신한공사 전남도 책임자인 김전우(金典祐)씨를 찾아 목포로 갔다. 세 사람은 서로 호형호제하는 절친한 사이였다. 김전우는 일제시대 때도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그 계통에서 고위직을 지낸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로서 성품도 호탕한 쾌걸이었다. 교섭은 단 한번의 만남으로 결판이 났다. ‘광산군민 전체를 위하는 좋은 일에 왜정 때 민족 착취 기관의 재산을 내놓는데 무슨 망설임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조창고 수동을 포함한 ‘금싸라기 같은’땅 천여평이 광산군 재산으로 거져 얻어진 것이다. 청주 한병(그때 시가 70원)을 들고 간 정순조, 장안섭과 두 사람을 맞아 김전우씨가 대접한 ‘안주 값’과 그 집에서 내 놓은 청주 세 병 값을 합치면 지금 돈 6,800원이었다고 한다.
◈ 김우생(金佑生) 1372년 대산동 태생으로 17세때 최영이 요동을 치려하자 장군 이성계에게 글을 보내어 그 불가함을 논하였다. 그 후에 정몽주의 문인이 되었고, 박팽년, 성삼문과 같이 교유하면서 깊은 학리를 정수하였다. 단종 2년(1454) 승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세조 2년(1456) 사육신 참화시는 정인지의 구원으로 화를 면하였다가 1457년 단종이 승하하자 향월 4배하고 음독 자결하였다. 대산동 화암사에 배향되었다.
◈ 오자치(吳自治) 송산동 태생으로 용력이 절륜하였으며 사어에 능달하고 무과시험에 장원급제하여 주부 벼슬에 올랐다. 세조 13년(1367)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세조가 친히 역마를 보내어 편전으로 들게 하고 주석을 배풀어 어주를 내리면서 토벌 평란에 힘을 다하라는 어명을 받자 무장 조석문과 같이 적중에 돌입하여 이시애, 이시합 형제를 주살하고 돌아오니 왕이 대열하여 도형비석에 기적을 새기게 하고 나성군에 봉하였으며 적기 2등 훈장을 내리었다. 사후에 양평이라 시호를 내리고 이조판서의 벼슬을 증하였다.
◈ 양산수(梁山壽, 1561∼1593) 대사성 양응정의 아들이다. 남달리 총명하였고 지기가 고상하였으며 성휘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32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산용과 더불어 창의할 것을 맹세하고 김천일 창의 대열에 뛰어들어 주장의 병서를 가지고 주복야행으로 용만(신의주)에 이르러 호남의 창의 사실을 읍주하니 선조께서 가상히 여겨 좌랑을 제수하고 의병에 고유하는 교서를 내리자 이를 받들고 의영으로 돌아와 교지를 선독하니 일군이 모두 감읍해 마지 않았다.
공은 각지에서 많은 전공을 쌓은 후 진주성에 들어가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던 날 창의사 김천일을 부축하고 촉석루에 올라가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후에 나라에서 좌승지를 증하였고 정려를 명하였으며 선무원종훈에 녹하고 진주 창렬사와 나주 정렬사에 배향하였다.
◈ 조언수(曺彦壽) 1515년 북성동 태생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우군장이 되어 순창 적선강에서 왜적과 싸울 때 왜세가 막강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탈자가 생기자 「충용의가삼장」(忠勇義歌三章)을 지어 진중에 광포하여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으면서 격전하다가 순절하니 조정에서 그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병조판서를 증하였고 원종공신으로 훈록하였으며 정려를 명하였다. 조씨 상강문에 배향되었다.
◈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신룡동 태생으로 1549년 사마시를 거쳐 1558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국(史局)의 사관으로 있다가 호당에서 사가 독서한 후 주서를 거쳐 사정(司正)으로 있을 때 사림 정치를 주창한 신진 사류의 영수로 지목되어 훈구파에 의하여 삭직되었다.
1567년 복직되어 원접사의 종사관, 선조가 즉위하자 집의가 되고 전한이 되었다. 이듬해 우부승지로 시독관에 겸직되었고 선조 3년(1570)에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과 불화하여 해직당했다. 이어 대사성에 복직되었으나 사양하고 1572년 대사연 부제학의 한직에 잠시 있었다.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상호 자기 학설을 주장한 서신 왕복이 8년간을 계속되어 조선 성리학계의 2백년간 논쟁의 실마리가 되었다.
퇴계학설은 사단(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심리작용은 이(理)에서 발동한 것이며 칠정(희, 노, 애, 구, 애, 오, 욕)의 감정 작용은 기질에서 발동한다 하였고 고봉(高峰, 기대승의 호)의 학설은 이와 기를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역설하였다. 후에 율곡 학파도 고봉학설을 뒷받침하여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공은 45세를 일기로 졸 하니 조선조 초의 유명한 사건인 종계변증(宗系辯證)의 주문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추록되고 이조판서가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라 하고 사액서원인 월봉서원에 배향되었다.
◈ 박순(朴淳, 1523∼1589) 소촌동 태생으로 18세때 진사에 합격했으나, 만족하지 않고 다시 화담 서경덕 문하에서 수업했다. 1547년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생활을 마치고 1549년 입산독서하였다. 1553년 가을 명종조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공조좌랑, 홍문관 수선, 교리, 이조좌랑 등을 지내다가 사가독서하였다. 그 뒤에 재상어사(災傷御史)로 호서를 순무하였고, 사복사 부정, 홍문관 응교를 지냈으나 권간(權奸) 윤원형 일파의 모략에 의하여 파출되어 광산 옛집에 돌아왔다.
1565년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이량, 이심, 윤백원 등의 치죄를 주장하였다가 오히려 해를 입어 이탁 등과 함께 사직은퇴 하였던 바 문정왕후가 승하한 뒤에 대사간에 재임되었다. 대사헌으로 복직된 이탁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출했고 같은 무리인 좌의정 심통원을 탄핵하여 파출하였다. 이리하여 육행(六行)의 어진 인사들을 뽑고 억울한 관원들을 회복시켰다.
공은 여러요직을 거쳐 문형직(대제학)에 있다가 1570년 우의정, 1574년 좌의정, 1579년 영의정이 되었다. 1589년에 서거하였다. 퇴계가 말하기를 “맑기가 한줄기의 맑은 얼음 같아서 마주하면 신혼이 곧 쾌해진다”고 하였고, 율곡 또한 “충성스럽고 결백하여 겉과 속이 하나같다”고 하였다. 뒤에 문충이라 사시하였으며 화담서원에 배향되다 현종때 특명으로 선액하였다.
◈ 오인수(吳仁洙, 1884∼1910) 1884년 송산동 태생으로 21세 때 항일 정신이 조정에 알려진 바 되어 충의 참봉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1907년 2월에 의병을 모집 5백여명의 대부대를 편성하여 동년 8월에 김태원 의병장과 합류 전북 고창 무주산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대지동 전촌 마을에 거주하는 일인집을 습격하여 군량미 3백여석을 몰수, 귀진하였다.
1909년 3월 남평 거성동 전투에서 심남일부대와 합동작전을 펴서 적 70여명을 사살하였다. 각지에서 역전 분투하다가 나주 용문산에서 체포되어 1910년 27세를 일기로 대구형장에서 순사하였다. 전북진안 영광사에 배향되고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았다.
◈ 박현동(朴玄東) 하남동 태생으로 1905년 을사조약을 분개히 여겨 창의한 최익현 막하에 들어가 좌익장으로 배종하다가 주장 최익현이 왜리에게 사로잡혀 대마도에 끌려가 죽자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손수 그 유해를 거두어 조국 땅에 묻는 의열을 발휘했다.
1907년에 김태원, 심남일과 같이 기참연거의에 참여하여 막장으로 산성에서 전투하였고 1908년에는 지도, 영광, 순창 등지를 전전하다가 창평 흥용사에 들어가 군용을 정비하던 중 일병에게 잡혀 옥고를 겪었다. 1910년 한일 합병으로 출옥하게 되었으나 1919년 3월 1일 운동에 가담 활약하다가 피포되어 옥사했다.
◈ 양인묵(梁仁默) 1879년 박산동 태생으로 기미 만세운동의 뒤를 이어 결성된 조국광복 대동단에 가입, 단의 지령에 의하여 광복군 군자금 모집의 전남지역 책임자로 노형규, 노석중과 함께 광산, 담양, 곡성 등지를 거점으로 거액을 모금, 상해 임시정부에 누차 송금한 바 있고 만주에까지 활약하라는 지령을 받고 일정에 대한 포고문, 경고문을 만주 각지에 살포하였으며, 1920년 환국 일경의 밀정꾼들의 명단을 파악, 암살 계획을 수립하고 각 요소에 동지들을 배치, 계획대로 진행하면서 그 해 겨울 곡성 부호 정수태와 약속한 군자금을 수금하기 위하여 밀송한 최양곡의 권총이 일 헌병에게 발각되어 두목으로 지목, 3년 6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귀향하여 조국 광복을 맞은 후 1957년 78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독립유공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수여 받았다.
◈ 오준선(吳駿善, 1851∼1931)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조선조 말엽 철종년간의 학자인 바 갑오년 동학혁명의 난에 나주성을 사수하였고 경술대변에 비분강개하여 자가에 은거 중 은사금이 내렸으나 받지 않자 그 허물로 헌병대에 구금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 후 일정의 탄압이 가중됨에 우국지심은 더욱 울연하였으며 만년에 용진산에 정사를 지어 육영 강학에 전력하여 문생이 수백명이 되었으며 이기손, 오성술 등 그 문하에서 수많은 의병열사들이 배출되었고 용진정사는 최익현의 의병봉기에 호응한 호남 일대의 의창들이 드나들며 공과 더불어 모의하였다. 졸후에 문인과 사림들이 영당을 지어 제향하고 있으며 문집은 22권 11책에 이른다.
◈ 박용철(朴龍喆, 1904∼1938) 소촌동 태생으로 일본청산학원 및 외국어 학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에서 수학하고 사재를 털어 『시문학』, 『문예월간』, 『문학』 등을 발간하여 초창기 우리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저서로는 『박용철 전집』 두 권과 시집이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떠나가는 배」가 있고 『빛나는 자취』와 같은 시집이 있다. 향년 35세로 병사하자 도내 문인들의 발의로 광주공원과 송정공원에 시비가 세워졌고 한국시인협회에서 생가에 시비를 세웠으며 매년 9월에 광산문화원 주최 용아문학상 글짓기 대회가 9회째 열리고 있다. 「용아동산 예쁜글」이란 책자가 제8집까지 나왔다.
◈ 임방울(林芳蔚, 1905 ∼ 1961) 수성동에서 빈농 임경학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타고난 미성과 뛰어난 창법으로 일세를 풍미한 국악계의 거성이다. 당대의 명창 이재현과 유성준에게 배워 14세때부터 무대와 방송에 진출하여 콜럼비아, 빅터, 오케이 등의 전속가수로 활약, 선배 명창들과 춘향가, 심청전의 전집을 제작했고 작곡과 편곡에도 능하여 호남가 사별가등의 수작을 남겼다.
춘향전,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심청전 등 「5바탕」 중에서도 적벽가와 수궁가가 특출했으며, 당대의 명창 이화중선과 쌍벽을 이루었다.
일제시대, 이후 쇠잔해지는 민족예술의 명맥을 이어 온 판소리의 전통적 계승인이며 그 공로가 인정되어 대한민국 국악상을 받았다. 향리 광산에서는 국창 임방울 선생의 기념문화재단을 창립, 거국적인 명창대회를 네 번째 맞고 있다.
◈ 염장 신라 문성왕의 장보고를 죽이라는 명을 받고 단신으로 장보고를 찾아 목을 베었다.
◈ 김속명( ? ∼1386) 경상도 도순찰사로 진해에서 왜적 300명을 격파했다.
◈ 양산숙 임진왜란 때 사가 임씨 일족을 구출한 뒤 투신 자살함에 양문 8절이라 한다.
◈ 정충신(1576∼ 1636) 17세때 임진왜란이 터지자 호남의 사정을 의주행조에 보고했다.
◈ 류휘진(1556∼1593) 임진왜란때 고경명 막하에서 병양도 취병장, 진주성에서 김천일과 같이 순절
◈ 배승무( 1559 ∼1593)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과 의거, 복수장 고종후와 같이 진주성에 들어가 순절
◈ 류희영(1561∼ ? ) 임진왜란 때 창의, 송대한과 고음도에서 왜적을 대파, 무과에 급제, 선부 벼슬에 올랐고 원종공신에 훈록
◈ 임회(1562∼ ? ) 송강 정철의 사위로 광해군 3년에 문과에 급제, 광주목사로 있을 때 이괄의 난을 만나 단설자진했다.
◈ 류평(1579∼ ? ) 김장생 문인이며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된 후 이괄의 난 때 난을 평정한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때는 의병장으로 청주까지 진출했다.
◈ 임형수(1514∼1547) 18세때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22세때 대과급제, 홍문관 수선으로 있을 때 세자와 친교가 두터웠다.
◈ 한사기(1257∼ ? ) 17세때 문과에 급제, 보문각 제학에 재임중 원나라 특사로 파견, 수훈을 세움. 죽은후에 고양현후에 추봉되다.
◈ 오겸(1479∼1582) 중종년간에 문과에 급제, 중종, 명종, 선조의 삼조에 걸쳐 우의정 등 벼슬을 하였고, 정직 청렴하였다
• 정세운(鄭世雲, 본관:광주, 생존시대:고려시대) • 오자치(吳自治, 본관:나주) • 오겸(吳謙, 본관:나주, 생존시대:1496∼ 1572) • 유사(柳四, 본관:서산, 아호:설강(雪江), 생존시대:1502 ∼ 1571, 유적지:경렬사) • 임형수(林亨秀, 본관:평택, 아호:금호(錦湖), 생존시대:1514 ∼ 1543, 유적지:등림사, 송제사) • 박순(朴淳, 본관:충주, 아호:사암(思庵), 생존시대:1523 ∼ 1589, 유적지:화담서원) • 기대승(奇大升, 본관:행주(幸州), 아호:고봉, 생존시대:1527 ∼ 1571, 유적지:빙월당) • 선거이(宣居怡, 본관:보성, 생존시대:1550 ∼ 1598) • 양산숙(梁山璹, 본관:제주, 생존시대:1561년 출생, 유적지:창렬사, 정렬사) • 이기손(李起巽, 아호:금제(錦齊), 생존시대:1872 ∼ 1952, 유적지:송정공원) • 오상렬(吳相烈, 본관:나주, 아호:의재(義齋), 생존시대:1878 ∼ 1908) • 박용철(朴龍喆, 아호:용아(龍兒), 생존시대:1904 ∼ 1938, 유적지:광주공원, 광산공원) • 임방울(林芳蔚, 생존시대:1904년 출생, 출생지:동곡면 수성마을)
■ 국보
◈ 신창동유적지 - 제375호 신창동 632-4 외 7필지
■ 보물
◈ 전 오자치영정 - 제1190호 왕동 원당마을
■ 유형문화재(시지정)
◈ 신룡동 5층석탑 - 제12호 신룡동 산 57-1
◈ 눌재집목판각 - 제16호 소촌동 산 85
◈ 사암집목판각 - 제17호 소촌동 산 85
◈ 취병조형유허비 - 제18호 도촌동 산18
◈ 고봉문집목관 - 제19호 광산동 452
◈ 이신의 종가소장 - 고문집 제25호 잠수동 320-1
■ 무형문화재(시지정)
◈ 청자도공 - 제5호 연산동 산 870-1
◈ 남도창 - 제6호 우산동 1572-5 동산A 101-1003호
◈ 광산우도농악 - 제8호 소촌동 528-14
■ 기념물(시지정)
◈ 양송천 묘역 - 제8호 동호동 32-09
◈ 용아박용철생가 - 제13호 소촌동 363-1
◈ 박세동선생묘 - 제23호 덕림동 산 94-1
■ 문화재자료(시지정)
◈ 무양서원 - 제3호 월계동535-2외 4필지
◈ 풍영정 - 제4호 신창동 852
◈ 용진정사 - 제7호 왕동 산 3
◈ 고내상성지 - 제10호 송정동 253
◈ 용진마애여래좌상 - 제11호 사호동산 136
◈ 호가정 - 제14호 본덕동 1
◈ 고인돌군 - 제17호 삼거동 산50
◈ 수완동 왕버들 - 제24호 수완동 870-1의 4필지
■ 민속자료(시지정)
◈ 입석마을 입석 - 제5호 산수동 225
• 신창동 유적(新昌洞 遺蹟) • 오자치 영정(吳自治 影幀) • 청자도공(조기정)(靑磁陶工(曺基正)) • 남도창 서편제 판소리(안채봉)(南道唱 西便制 판소리(安彩鳳)) • 광산농악(상쇠 : 정득채, 설장구 : 김종회, 통북수 : 서창순)(光山農樂(상쇠 : 鄭得采, 설장구 : 金宗會, 통북수 : 徐昌淳)) • 신룡동 오층석탑(新龍洞 五層石塔) • 눌재집 목판각(訥齋集 木版刻) • 사암집 목판각(思庵集 木版刻) • 취병조공 강생구지비(翠屛趙公 降生舊址碑) • 고봉문집목판(高峰文集木版) • 양송천묘역(梁松川墓域) • 빙월당(氷月堂) • 양씨 삼강문(梁氏 三綱門) • 용아생가(龍兒生家) • 무양서원(武陽書院) • 풍영정(風詠亭) • 용진정사(湧珍精舍) • 고내상성지(古內廂城址) • 용진산 마애여래좌상(聳珍山 磨崖如來坐像) • 호가정(浩歌亭) • 삼거동 고인돌군(三巨洞 고인돌군) • 입석마을 입석(立石마을 立石) • 원두마을 입석(비지정문화재) • 세동마을 입석(소재지:광산구 송산동 세동마을 , 비지정문화재) • 동촌마을 입석(소재지:광산구 삼도동 동촌마을 , 비지정문화재) • 장구촌 고분(장구촌 古墳, 소재지:광산구 쌍암동 장구촌 마을 , 비지정문화재) • 송산동 미륵불(松山洞 彌勒佛, 소재지:광산구 송산동 송동마을 , 비지정문화재) • 옥연동 삼층석탑(옥연동 三層石塔, 소재지:광산구 옥연동 , 비지정문화재) • 선암사지 삼층석탑(仙岩寺址 三層石塔, 소재지:광산구 선암동 912번지 , 비지정문화재) • 백룡사지 부도(白龍寺址 浮屠, 소재지:광산구 임곡동 두정리 457번지 , 비지정문화재) • 학림정사(鶴林精舍, 소재지:광산구 등림동 외등마을 , 비지정문화재) • 광산사(廣山祠, 소재지:광산구 송산동 837번지 , 비지정문화재) • 화엄사(花嚴祠, 소재지:광산구 대산동 37번지 , 비지정문화재) • 대명사(大明祠, 소재지:광산구 명도동 가마마을 , 비지정문화재) • 등림사(登臨祠, 소재지:광산구 등림동 내동마을 , 비지정문화재) • 대동사(大東祠, 소재지:광산구 동호동 신촌마을 , 비지정문화재) • 동호사(東湖祠, 소재지:광산구 동호동 32번지 , 비지정문화재) • 가학정(駕鶴亭, 소재지:광산구 사호동 원사호마을 , 비지정문화재) • 칠송정(七松亭, 소재지:광산구 광곡동 광곡마을 , 비지정문화재) • 불환정(不煥亭, 비지정문화재) • 칠송정(七松亭, 소재지:광산구 삼도 관내 지평리 , 비지정문화재) • 송호영당(松湖影堂, 소재지:광산구 소촌동 100번지 , 비지정문화재) • 원당영각(元堂影閣, 소재지:광산구 왕동동 원당마을 , 비지정문화재) • 남동영당(南東影堂, 소재지:광산사 동호동 남동마을 , 비지정문화재) • 선거이려(宣居怡閭, 소재지:광산고 도산동 원도산마을 , 비지정문화재) • 창녕조씨 삼강려(昌寧曺氏 三綱閭, 소재지:광산구 북성동 북성마을 , 비지정문화재) • 광산김씨 효열비(光山金氏 孝烈碑, 소재지:광산구 박호동 노동마을 , 비지정문화재) • 밀양손씨 삼효려(密陽孫氏 三孝閭, 소재지:광산구 신가동 선창마을 , 비지정문화재) • 영광김씨 효열정려(靈光金氏 孝烈旌閭, 소재지:광산구 진곡동 백길마을 , 비지정문화재) • 곡부공씨 정려(曲阜孔氏 旌閭, 소재지:광산구 안청동 본안마을 , 비지정문화재) • 영사재(永思齋, 소재지:광산구 명도동 명곡마을 , 비지정문화재) • 오남재(五南齋, 소재지:광산구 신룡동 428번지 , 비지정문화재) • 봉강재(鳳崗齋, 소재지:광산구 서봉동 서봉마을 , 비지정문화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