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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화성군 경기도 화성군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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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군 정보
◈ 화성군의 역사문화자원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삼국시대의 혈전장, 독산성(禿山城) 세마대(洗馬臺)와 삼천병마골(三千兵馬) 전투, 화성의 3·1운동과 제암교회 학살사건 / ◈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효자 최루백, 조선 문장의 기재 서거정(1420∼1488), 비운의 남이(南怡) 장군, 조선후기 실학자 우하영(禹夏永, 1741∼1812), 태극기의 창시자 박영효(朴泳孝, 1861∼1939), 근대음악의 선구자 홍난파(1897∼1941), 「나는 왕이로소이다」 홍사용(洪思容, 1900∼1947)
목   차
[숨기기]
 

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삼국시대의 혈전장
백제, 고구려, 신라가 당나라와 문물교역의 교두보로서 지리적, 군사적 요충지이며, 한강 이남의 비옥하고 넓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빈번한 충돌을 하였으며 신라가 진출하여 서해 해상을 장악하여 당나라와의 왕래를 통하여 삼국을 통일하게되는 배경으로서 중요했다.
 
◈ 독산성(禿山城) 세마대(洗馬臺)와 삼천병마골(三千兵馬) 전투
선조25년 임진왜란때 한양지역을 노리는 왜군의 배후를 차단하여 후방과의 연락과 보급을 끊기 위해 휘하의 병사(관군, 의병, 승병) 4천여를 이끌어 화성의 독산성에 진을 치고 왜군을 유인하였다. 왜군 3만이 3개 방면으로 독산성을 포위하였다.
 
권율은 야음을 틈타 기습을 펼치며 세마대에서 흰쌀로 말을 씻겨 성안에 물이 풍족함을 과시하는 계략과 다양한 심리전을 펼쳐 왜군이 견디지 못하고 물러날 때 지금의 봉담읍 상리 일대에 삼천병마를 우회하여 매복 기습함으로써 대승을 거두고 이후 권율은 승승장구하여 행주대첩에 승리한다.
 
◈ 화성의 3·1운동과 제암교회 학살사건
화성의 3·1독립만세운동은 타 지역보다 격렬하였으며 일제의 보복 또한 매우 잔혹하였다. 일찍이 화성에 정착한 동학의 천도교 및 개신교 세력과 수원일대의 학생운동단체의 영향으로 중앙의 3·1운동 추진본부와 직·간접적으로 협력하여 기미년 3월 1일에 만세운동을 펼치게 된다. 3월 중순 들어 화성의 각 읍 면의 대소마을(20여 곳)마다 장날을 기하여 면사무소와 주재소, 우편소 등을 습격, 돌을 던지며 거센 독립만세 시위를 하며 일제와 대치하였다.
 
화성의 사강에서는 3월 26일 송산면사무소에 120명이 몰려가 면장이하 직원들을 만세시위에 가담시키고 주재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음날 400여 명으로 늘어나 이웃 서신면으로 가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3월 28일 1천여 명으로 늘어난 군중은 일경과 대치하던 중 일경이 발포하자 그 일경을 돌로 때려 죽였으며 주재소를 습격 대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제의 보복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구금되었으며 사강리, 봉가리 일대의 가옥이 방화되었다.
 
제암리에서는 기독교도 안종후가 2월 하순 상경하여 3·1운동 지도자 이승훈, 박희도를 만나고 돌아와 동민들과 거사하여 1919년 3월 1일 제암리교회 마당에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과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후 지내산에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이후 4월 초순까지 제암리 및 발안지역 일대에서 일경의 타살사건과 일본인가옥 방화사건, 악질적인 친일경관 조희창의 살해사건 등 항거가 계속되었다.
 
4월 9일 사강반도를 휩쓸며 방화와 살인을 하며 시위 가담자를 색출 검거하고자 일본군인들이 제암리에 들어와 제암교회에 마을 주민들을 모이게 하여 방화와 총을 난사하여 23명을 학살하였다. 1982년 유일한 생존자 전동례의 증언으로 방치되어 있던 유해를 수습하여 순국23위의 합동묘가 제암교회 자리에 안치되어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효자 최루백
최루백은 고려 의종(毅宗)때의 효자, 문신. 수주부(水州府, 현재 화성군) 사람으로 그의 효행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수록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널리 기려져오고 있으며 『고려사』열전 권34 효우조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상저가 사냥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으니 15세의 루백은 호랑이를 잡아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곧 도끼를 들어 쫓아가니 호랑이는 배가 불러 누워있었다. 루백이 꾸짖어 “네가 나의 아버지를 먹었으니 나는 마땅히 너를 먹으리라”하며 달려드는 호랑이를 단숨에 내리쳐 죽였다. 호랑이의 배를 갈라 아버님의 뼈와 살을 가려내고 호랑이 고기를 독에 담아 냇가에 묻고 아버님의 유해를 홍법산 서쪽에 장례모시고 3년을 시묘 살았다.
 
이후 시묘살이를 끝내고 냇가에 묻어둔 호랑이 고기를 다 먹었다 한다. 루백은 학업을 연마하여 벼슬길에 나가 의종 7년(1153) 금나라에 다녀와 국정에 관한 왕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뒤에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현재 봉담읍 분천리에 그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각이 있으며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 조선 문장의 기재 서거정(1420∼1488)
조선전기의 문신 학자로서 호는 사가정이며 본관은 달성이다. 세종 26년(1444) 과거에 급제를 하고 이후 여러 과시에 장원급제 등을 통하여 중용 되어 세조 6년(1460)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서 문장과 시를 논하여 해동의 기재라는 평을 받았으며 귀국하여 6조판서를 두루 거처 성종1년(1470) 좌찬성에 올라 이듬해 좌리공신 3등으로 달성군에 봉해졌다.
 
그는 생애 4번의 과시를 오르고 여섯의 임금을 섬기며 45년 동안 관직에 머물렀다. 문장에 능해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향약집성방』 등의 편찬과 국역 등에 참여하였으며, 『동인시화』, 『삼국사절요』, 『동문선』, 『역대년표』, 『필원잡기』, 『사가집』, 『태평한화』, 『골계전』, 『오행총괄』 등 많은 저술을 하였다.
 
묘소는 본래 광주군 송파 방이동에 있었으나 1975년 봉담읍 왕림리에 이장되었다. 당시 출토된 묘지석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 경기도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 비운의 남이(南怡) 장군
조선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의령이며 의산군 휘(暉)의 아들이며 태종의 외손이다. 세조 3년(1457)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고 이후 서북지역을 평정하여 27세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1468년 그를 시기하던 유자광의 모함으로 살해되었다. 순조18년(1818)에 복구되어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묘소는 비봉면 남전리 존의동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 조선후기 실학자 우하영(禹夏永, 1741∼1812)
영조 17년에 태어나 순조 12년간의 인물로 본관은 단양이며 호는 취석실·성석당으로 조선후기 화성출신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그는 여러번 과시에 낙방하나 실망하지 않고 청렴강직한 지사적 삶을 살며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을 탐구하여 『천일록』, 『농가총람』, 『관수만록』 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서 『농가총람』은 18세기말의 대표적인 농서로서 정농사상을 높이고 시대가 당면한 농업과 전제(田制)의 문제점을 개혁과 실용적 측면에서 서술하였으며 『관수만록』은 화성지역의 농업, 행정, 군사, 사회, 지리, 경제 등의 여러 문제점과 개혁 방안을 깊이 있고 생생하게 제시한 명저로서 18세기 향토사와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획기적인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 태극기의 창시자 박영효(朴泳孝, 1861∼1939)
조선말의 개화파 정치가로 호는 현현거사(玄玄居士)이며 철종의 사위이다. 화성 태안 진안리에서 출생하여 13세에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혼인하여 금릉위(錦陵慰)가 되었다. 선각자 유대치에게 사상적 영향을 받아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과 개화당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고종 19년(1882) 수신사가 되어 일본으로 갈 때 선상에서 태극기를 창제하였다. 이후 1884년 10월 17일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3일만에 혁명이 실패하여 김옥균 등과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각종 정치쟁점에 휘말리며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 근대음악의 선구자 홍난파(1897∼1941)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로 본명은 영후이며 남양면 활초리에 생가가 있다.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를 마치고 동경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음악활동을 하였으며 1931년 미국으로 가 셔어우드 음악대학에 유학하고, 1933년에 돌아와 본격적인 양악의 전파 보급에 나선다.
 
그는 미국 유학시절 흥사단가를 작곡하고 3·1 기념식을 열어 만세를 불렀다는 혐의로 안창호, 이광수와 함께 72일간의 종로경찰서 구금시 고문으로 머리를 다쳤으며 미국유학시절 자동차 사고로 늑골을 다친 것이 재발되어 1941년 7월 사망하였다. 수많은 작곡으로 나라 잃은 국민들의 시름을 노래한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등의 민족적 정서와 애수가 담긴 가곡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등의 동요를 작곡하였으며 『음악만필』 『세계의 악성』 등의 저서를 남겼다.
 
◈ 「나는 왕이로소이다」 홍사용(洪思容, 1900∼1947)
근대 한국의 대표적 문인으로 호는 노작이다. 1916년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3·1운동에 가담하여 한때 구금되었다. 1922년 이상화. 박영희, 박종화 등과 『백조』를 창간하여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나는 왕이로소이다」등의 낭만적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이후 『백조』의 간행과 1923년 토월회의 동인으로 박승희 등과 신극운동에 참여하여 희곡과 소설을 발표하였다. 토월회, 산유화회 등 극단운영에 가산을 모두 소비하고 낙향하여 전국 방랑을 하였으며, 1941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김옥균전』을 쓰다가 절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청년운동에 참여하다가 곧 탈퇴하고 1947년 1월 별세하였다. 동탄면 석우리 그의 묘소에 시비가 있다.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국보
 
◈ 용주사 범종 - 제120호 태안읍 송산리 188
 
■ 보물
 
◈ 봉림사 목아미타불좌상 - 제980호 남양면 북양리 642
 
◈ 봉림사 목아미타불좌상 복장전적 - 제1095호
 
■ 사적
 
◈ 당성 - 제217호 서신면 상안리 산32
 
◈ 융·건릉 - 제206호 태안읍 안녕리 산1-1
 
◈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 - 제299호 향남면 제암리 322-4
 
■ 천연기념물
 
◈ 용주사 회양나무 - 제264호 태안읍 송산리 188
 
◈ 시화호 공룡알화석산출지 - 제414호 화성군 송산면 고정리∼우음도 일대
 
■ 중요민속자료
 
◈ 정용채가옥 - 제124호 서신면 궁평리 236
 
◈ 박희석가옥 - 제125호 서신면 궁평리 84-1
 
■ 유형문화재(이하 도지정)
 
◈ 금동향로 - 제11호 태안읍 송산리 188
 
◈ 청동향로 - 제12호 태안읍 송산리 188
 
◈ 용주사상량문 - 제13호 태안읍 송산리 188
 
◈ 전적수사본 - 제14호 태안읍 송산리 188
 
◈ 용주사 병풍 - 제15호 태안읍 송산리 188
 
◈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 - 제16호 태안읍 송산리 188
 
◈ 용주사 불설부모은중경 - 제17호 태안읍 송산리 188
 
◈ 윤계선생 순절비 - 제85호 남양면 남양리 1392-1
 
◈ 서거정 선생 묘지석 - 제136호 봉담읍 왕림리 47-1
 
◈ 박세채 영정 - 제163호 동탄면 영천리 142
 
■ 무형문화재
 
◈ 부의주(동동주) - 제2호 향남면 구문천리 540-4
 
■ 기념물
 
◈ 남이장군묘 - 제13호 비봉면 남전리 145
 
◈ 백천장선생묘 - 제86호 태안읍 기안리 산 7
 
◈ 수원 고읍성 - 제93호 태안읍 기안리 산 1
 
◈ 신빈 김씨묘 - 제153호 남양면 남양리 131-7
 
◈ 만년제 - 제161호 태안읍 안녕리 152
 
◈ 남양홍씨묘역 - 제108호 서신면 홍법리 산 30
 
■ 민속자료
 
◈ 정원채고가 - 제6호 남양면 송림리 68
 
■ 문화재자료
 
◈ 남양향교 - 제34호 남양면 남양리 335
 
◈ 용주사 대웅보전 - 제35호 태안읍 송산리 188
 
◈ 용주사 천보루 문화재자료 - 제36호 태안읍 송산리 188
 
◈ 홍승인 고가 - 제74호 정남면 문학리 628
 
■ 향토유적
 
◈ 안곡서원 - 제1호 서신면 상안리 585
 
◈ 최루백 효자각 - 제2호 봉담읍 분천리 165-1
 
◈ 이곤선생 효자문 - 제3호 봉담읍 상리 산97
 
◈ 홍담효자각 - 제4호 서신면 홍법리 산32
 
◈ 한명윤, 박행장 충렬각 - 제5호 양감면 정문리 189-2
 
◈ 박장철 효자각 - 제6호 동탄면 장지리 493-2
 
◈ 금산사 - 제7호 팔탄면 창곡리 산14
 
◈ 수촌교회 - 제9호 장안면 수촌리 674-1
 
 
■ 비지정 문화유적
 
• 선사·유적·패총·산포지·고분등 - (10점)
• 관방유적 등 - (16점)
• 불교유적 - 칠보사 등 - (19점)
• 유교유적 - 명고서원지, 매곡서원지 등 - (2점)
• 묘역, 비갈, 윤사물 - 묘갈 등 - (17점)
• 기념비외 - 사강리 3·1운동 기념비 등 (8점)
• 가옥 - 남양홍씨 가옥 등(4점)
• 열녀·효자비 - (각 6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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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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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