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말의 왜구토벌 남해는 지리적으로 왜와 가까워 예로부터 왜구의 침범이 심했던 곳이다. 고려말 왜구토벌에 전공을 세운 최영 장군을 봉안한 「무민사」와 정지 장군의 승전(1384년)을 기리는 「정지석탑」 등 충의의 얼이 서려있는 유적이 있다.
◈ 충무공과 임진왜란 남해는 7년 동안에 걸친 임진왜란(1592∼1598)의 종전지(終戰地)로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순국지인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고현면 차면리)와 이 충무공을 봉안한 「남해충렬사」가 있다.
◈ 왜침 방어용 성(城)과 봉수대 남해는 최남단에 위치한 지형적 여건으로 남해읍성을 비롯한 30여 개의 방어용 성과 봉수대 5개소가 있었는데 성은 없어진 곳도 많으나 봉수대는 대부분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 유배문학 남해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많은 유배객들이 남긴 유적·유물들이 많으며,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1519년 중종 14년 기묘사화),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1689년 숙종 15년), 유의양의 『남해견문록』(1771년, 영조 17년) 등이 유배문학으로 유명하다.
◈ 이충걸(李忠傑, 1465∼1526) 호는 율탄(栗灘), 본관은 장천으로 1465년 3월 29일 남해군 이동면 초음리에서 출생하였다. 1486년 성종 병오년 문과에 급제 예조정량을 시작으로 1510년 중종조 경오년 대사원 전라감사를 지냄. 1513년에 병조참판을 제수받고 3년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호를 따서 율탄정을 짓고 원근의 선비들과 시와 학문을 강론하다가 향년 62세로 졸한 명관으로 『조선왕조실록』의 「성종실록」, 「연산일기」, 「중종실록」과 『국조방록』, 『연려실기술』, 『조선각도읍지』, 『신증동국여지승람』남해편·함안편, 『남해읍지』 등에 정적이 출중하고 명성이 높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희급(李希伋, 1549∼1597) 호는 난계, 본관은 장천으로 1549년 남해군 이동면 난음에서 출생하였다. 1582년 선조 15년 33세의 나이로 문과(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저작박사를 시작으로 함양군수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함양이 함락되자 본도 도사가 되어 의병을 모아 이충무공과 같이 참전,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1596년 선조 29년 진도백파전전투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1597년 9월 16일 전사하니 부인 진양 강씨도 선비의 뒤를 따랐으며, 고향에 안장되었다. 1605년 만력 33년 을사년에 선무 이등공신에 훈록되고 녹권을 하사받아 본군 유림들이 난계사를 세워 예를 갖추어 경봉하고 있는 충신이다.
◈ 이청기(李淸基, 1919∼1994) 호는 향당(香塘), 본관은 장수로 1919년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에서 출생하여 일본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일보 기자로 20년간 언론계에 종사하였으며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장, 초대 영화윤리위원장, 공보부장관 자문위원, 이화여대 강사를 거쳐 남해향토문화연구회장으로 5회에 걸쳐 향토문화유적지를 발간하여 이 고장의 문화창달에 크게 공헌한 향토사학자로 1998년 5월에 선생의 향리에 공적비를 세웠다.
◈ 정익환(丁益煥, 1835∼1919) 호는 여개(麗溪),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1848년 5월 11일 진주목 남면 대리(晋州牧南面大里)에서 출생(지금의 남해군 창선면 가인리 606번지), 천성이 강직하고 담이 크고 통솔력이 있어 일찍이 무과에 합격하여 젊은 나이에 사천군 선진진(船津鎭)에 파견 대장으로 근무하였다. 창선땅은 국가 군마의 목장이어서 국가땅이었으나 한말 식색제도(食色制度)를 모방하여 정승(政丞)들의 식색으로 제조부(濟漕部)를 설치하여 해안의 12개 목장에 매년 쌀 1천 석을 납부케 하므로 그 부당함을 자기의 논과 밭을 팔아 투쟁하니 전 도민(島民)이 가세하여 봉기하게 되었다. 전 도민의 보호를 받아 7년간이나 투쟁한 끝에 한일합방이 되어 일군들이 개입하자 반일운동으로 확산되어 1906년 8월 1일 측근에서 보좌하던 장봉석, 김만문 등은 무자비하게 총살당하고 공은 체포되어 진주감영에서 3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니 도민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수륙 백리길을 가서 연좌하면서 공의 석방을 호소하였다. 그 후 도세 항쟁으로 토지는 개인에게 분배되고 도세 또한 없어지므로 전 도민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애국지사이다.
◈ 최치환(崔致煥, 1923∼1987) 호는 금암(錦岩), 본관은 전주로 남해군 삼동면 내산리 1894번지에서 1923년 10월 23일 출생하여 경기고를 거쳐 미국 미시간대학과 하바드대학에서 수학했다. 27세에 경무관 승진, 31세로 경남 경찰국장, 34세에 시울시경국장, 35세에 대통령 비서관 등 전국 최연소로 활약하다가 37세의 나이로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 5선 의원으로 정치·경제·문화·체육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지도력으로 태극무공훈장 등 30여 개의 훈·포장을 수상한 인물이며, 국회 건설분과위원장으로 당시 경제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전 군민의 숙원인 남해대교를 개통하게 하는 등 항상 고향을 사랑하고 아끼며 기회 있을 때마다 고향을 도운 도민의 은인이다. 그 숭고한 뜻을 받들고자 뜻을 같이 한 군민들이 금암 최치환 유적선양 동우회를 결성하여 선생을 추모하고 있다. 1987년 5월 27일 사망하여 동작동 국립묘지 제1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 윤병호(尹炳浩, 1889∼1974) 호는 창남(瘡南), 본관은 파주로 1889년 8월 5일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하고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1919년 국권회복단 동지들과 같이 삼일독립운동에 참여 창원 및 진동헌병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1929년 조선어학회 민족운동사건으로 함흥감옥에 투옥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9년 재부남해향우회를 설립 창설하였으며, 1954년 국회의원에 당선, 민주당 경남도위원장과 당 고문을 역임하였다. 1974년 7월 13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 선생의 애국·애향심을 기리려는 뜻으로 노량공원에 비가 세워져 있다.
■ 사적
◈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제232호 고현면 차면리
◈ 남해충렬사- 제233호 설천면 노량리
■ 천연기념물
◈ 미조상록수림- 제29호 미조면 미조리
◈ 물건방조어부림- 제150호 삼동면 물건리
◈ 남해산닥나무자생지- 제152호 고현면 대곡리
◈ 남해고현느티나무- 제276호 고현면 갈화리
◈ 남해창선왕후박나무- 제299호 창선면 대벽리
■ 유형문화재(도지정)
◈ 장량상동정마애비- 제27호 남해읍 선소리
◈ 다정리삼층석탑- 제73호 이동면 다정리
◈ 보리암전삼층석탑- 제74호 상주면 상주리
◈ 용문사대웅전- 제85호 이동면 용소리
◈ 용문사석불- 제138호 이동면 용소리
◈ 촌은집책판- 제172호 이동면 용소리
◈ 남해향교- 제222호 남해읍 북변리
■ 기념물(도지정)
◈ 남해상주리석각- 제6호 상주면 양아리
◈ 남해금산- 제18호 상주면 상주리
◈ 대국산성- 제19호 설천면 진목리
◈ 임진성- 제20호 남면 상가리
◈ 남해다정리지석묘- 제62호 이동면 다정리
◈ 남해금산봉수대- 제87호 상주면 상주리
◈ 남해장성- 제154호 이동면 신전리
◈ 전백의정의 묘- 제155호 남면 평산리
◈ 당항느티나무- 제199호 남면 당항리
◈ 죽전비자나무- 제200호 남면 죽전리
■ 민속자료(도지정)
◈ 남해가천암수바위- 제13호 남면 홍현리
■ 문화재자료(도지정)
◈ 운곡사 외 9개소
■ 군보호문화재
◈ 무민사 외 5개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