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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정보
◈ 구미시의 역사문화자원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곳,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곳,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 / ◈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고려의 충신 길재(吉再, 1353~1419), 망명한 충신 김주(金澍), 생육신 이맹전(李孟傳, 1392~1481), 사육신 하위지(河緯地, 1412~1456), 영남사림파의 터전을 마련한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정붕(鄭鵬, 1469∼1512), 문무를 겸전한 박영(朴英, 1471∼1540), 김취문(金就文, 1509∼1570), 명필 황기로(黃耆老, 1521∼1567), 고응척(高應陟, 1531∼1605), 독자적인 학설을 개척한 장현광(張顯光, 1554 ∼1637), 『일선지』를 쓴 최현(崔晛, 1563∼1640), 대통령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목   차
[숨기기]
 

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곳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화상(혹은 묵호자)이 처음 신라에 들어와 불교를 포교한 곳이 도개면 도개리 일대이며 이곳에는 그 당시의 우물(모례정)이 남아 있고 아도화상이 최초로 창건했다는 도리사가 해평면 송곡리 냉산 중턱에 있다.
 
◈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곳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군사와 최후의 결전을 승리로 이끌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계기를 이룬 곳으로 고아읍과 지산동 일대에는 그때의 전투지역이라는 어검들(어갱이들), 발검들(발갱이들), 점검들(점갱이들) 등의 지명과 전설이 남아있다.
 
◈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
1977년 9월 5일 박정희 전대통령이 금오산에서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처음 강조하였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고려의 충신 길재(吉再, 1353~1419)
고아읍 봉계(봉한)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 자는 재부(再父), 호는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본관은 해평(海平). 고려말의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370년 개경에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383년(우왕 9)에 등과하고, 1387년(우왕 13) 성균관 학정(成均館學正), 이듬해 성균관 박사(博士)가 되어 학생들을 교육했다.
 
1389년(창왕 1) 노모 봉양을 이유로 귀향하여 선산(善山) 임천(林泉)에서 은거했다. 그 뒤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세워져 1400년(정종 2) 태상박사(太常博士)의 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사퇴하고 선산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에게 성리학을 가르쳤고, 그 학통은 김종직,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졌다.
 
죽은 뒤 금산(錦山)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야은집(冶隱集)』, 『야은속집(冶隱續集)』 등이 있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유적으로 채미정(금오산), 지주중류비(오태동) 등이 있다.
 
◈ 망명한 충신 김주(金澍)
고려의 충신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귀국하지 않고 망명하였다. 고려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분이다. 유적으로 부조묘, 충렬당과 신도비(도개면 궁기리)가 있다.
 
◈ 생육신 이맹전(李孟傳, 1392~1481)
형곡(댓샘)에서 태어났다. 조선 초기 문신, 학자.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1427년(세종 9)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거쳐 1436년에는 정언이 되고, 그 뒤 소격서령, 거창 현감 등을 지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탈취하자, 눈이 어둡고 귀가 멀었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선산(善山)으로 내려왔다. 그 뒤 30여 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정조5년(1781) 서명선(徐命善)의 건의에 의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산의 월암서원에 김주(金澍),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제향되었고 함안(咸安)의 서산서원에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생육신으로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유적으로 경은 이맹전 선생 유허비(형곡동 시립도서관)와 묘소(해평면 금호리) 등이 있다.
 
◈ 사육신 하위지(河緯地, 1412~1456)
선산읍 이문리(영봉리)에서 태어났다. 조선 초기 문신, 자는 천장(天章), 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 본관은 진주(晉州).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1438년(세종 20)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444년 집현전 부교리가 되어 『오례의주(五禮儀註)』의 상정(詳定)에 참여하였다. 1451년(문종 1) 직집현전(直集賢殿)에 등용되어 수양대군을 보좌, 『진설(陣說)』 교정과 『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조의 간청으로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세조의 봉록을 받기 싫어 별실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고 한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 체포되어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뛰어난 문장가로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과천(果川)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유적으로 단계 하위지 선생 유허비(선산읍 완전리 단계천)와 묘소(선산읍 죽장리)가 있다.
 
◈ 영남사림파의 터전을 마련한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선산읍 이문리(영봉)가 고향이나 밀양 외가에서 태어났다. 조선 전기 문신. 자는 효관, 계온, 호는 점필재. 본관은 일선(一善). 고려말 정몽주, 길재의 학풍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祖宗)으로 문장, 사학(史學)에 두루 능하였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 정여창(鄭汝昌), 유호인(兪好仁) 등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김굉필은 조광조를 배출시켜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구실 삼아 훈척계열의 유자광(柳子光), 정문형(鄭文炯) 등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그도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저서로는 『점필재집』,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금오서원에 제향되었다.
 
◈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정붕(鄭鵬, 1469∼1512)
조선 중기 문신, 학자.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 본관은 해주(海州). 1492년(성종 23)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었고, 정자, 지평(持平), 정언(正言)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교리(校理)로 있을 때, 갑자사화에 연루,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교리에 복직되었으나 상경 도중 병으로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뒤에 청송부사를 지냈다. 김굉필의 문인으로 길재, 김숙자의 학통을 이어 받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황(李滉)으로부터 학문이 깊다는 칭송을 받았다. 선산의 금오서원에 제향되었다. 유적으로 신포서당(선산읍 포상리)이 있다.
 
◈ 문무를 겸전한 박영(朴英, 1471∼1540)
조선 중기의 명신.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 본관은 밀양(密陽). 1492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510년 삼포(三浦)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昌原)에 부임하였다. 1516년 강계부사(江界府使)를 거쳐 의주목사(義州牧使),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옴으로써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모면하게 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금오서원에 제향되었다. 유적으로 송당정사와 신도비(선산읍 신기리)가 있다.
 
◈ 김취문(金就文, 1509∼1570)
고아읍 원호리(들성)에서 태어났다. 진락당 김취성의 아우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문지(文之), 호는 구암(久庵). 본관은 선산. 어려서 박영의 문인으로 문명(文名)이 있었다. 1537년 문과에 급제, 지방 수령으로 지내다가 1565년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이 되었다. 명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1568년(선조 1)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뒤에 대사간에 이르렀다. 수령 당시 시정에 대한 건의사항을 주달한 것이 문집에 많이 남아 있다. 저서로 『구암집(久庵集)』이 있다. 시호는 처음에 정간(貞簡), 뒤에는 문간(文簡)이다.
 
◈ 명필 황기로(黃耆老, 1521∼1567)
고아읍 대망리(망장)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의 명필가. 자는 태수, 호는 고산(孤山). 매학정(梅鶴亭). 본관은 덕산(德山).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급제하여 별좌(別坐)를 지냈다. 초서에 뛰어나 ‘초성(草聖)’이라 불렸다.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김구, 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제1인자라는 평을 받았으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쳐 비슷한 풍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고산집(孤山集)』이 있다. 유적으로 매학정(고아읍 예강리)이 있다.
 
◈ 고응척(高應陟, 1531∼1605)
해평면 문량리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 학자, 시인. 자는 숙명(叔明), 호는 두곡(杜谷), 취병(翠屛). 본관은 안동. 12살에 김범(金範)의 문하에서 수학,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심하며 『대학』, 『주자혹문(朱子或問)』 등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각지를 돌아다니며 불교를 연구했다.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함흥교수(咸興敎授)로 부임했다가, 1563년(명종 18) 사직한 뒤 시골에 묻혀 도학(道學)을 연구, 『대학』의 여러 편을 시조로 읊어 교훈시를 만드는 등 사상적 체계를 시(詩), 부(賦), 가(歌), 곡(曲) 등으로 표현했다.
 
1594년(선조 27) 풍기군수, 이어 회덕현감, 사성(司成) 등을 지내다가 다시 사직하고 낙향, 1605년(선조 38) 경주부윤으로 부임, 이어 사직했다. 1702년(숙종 28) 해평면의 낙봉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두곡집(杜谷集)』, 『대학개정장(大學改正章)』과 시조작품으로 「도부(道賦)」, 「탄시(嘆詩)」, 「차기음」, 「두곡우음(杜谷偶吟)」, 「유감(有感)」, 「임인제야시(壬寅除夜詩)」 등이 있다.
 
◈ 독자적인 학설을 개척한 장현광(張顯光, 1554 ∼1637)
인동 남산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 학자.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본관은 인동(仁同). 1576년(선조 9)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예빈시 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보은 현감(報恩縣監)으로 부임하는 등 전후 20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오로지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 군에 격문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켰으나, 다음해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동해안의 입암산에 들어간지 반년 후에 죽었다.
 
덕(德)은 도(道)의 지선(至善)한 것이라고 논하였으며, 또한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이이(李珥)의 설에 찬동하여 이(理)와 기(氣)는 서로 체용(體用)이 된다고 하여 경(經)과 위(緯)로 나누어 설명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철학은 중국 명나라 나흠순(羅欽順)과 이이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가운데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경향을 보였다. 성주(星州)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선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는 『여헌집(11권)』, 『속집(5권)』, 『성리설(性理說, 6권)』, 『역학도설(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龍蛇日記, 2권)』등이 있다. 유적으로 영당(선산읍 생곡리), 동락서원(임수동)이 있다.
 
◈ 『일선지』를 쓴 최현(崔晛, 1563∼1640)
해평면 해평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안재. 본관은 전주(全州). 문과급제,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 선생의 문도이며,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의병으로 참전, 선산의 인문지리지인 『일선지』를 지었다. 유적으로 쌍암고가(해평면 해평리)가 있다.
 
◈ 대통령 박정희(朴正熙, 1917∼1979)
군인·정치가. 상모동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 제5, 6, 7, 8, 9대 대통령을 지냈다.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국보
 
◈ 선산 죽장동 5층석탑 - 제130호, 선산읍 죽장리 505-2 법륜사 내
 
◈ 금동여래입상 - 제182호, 대구박물관소장(출토지:고아읍 봉한리)
 
◈ 금동보살입상 - 제183호, 대구박물관소장(출토지:고아읍 봉한리)
 
◈ 금동보살입상 - 제184호, 대구박물관소장(출토지:고아읍 봉한리)
 
◈ 금동육각사리함 - 제208호, 김천직지사 성보박물관소장(출토지:해평면 송곡리 도리사 내)
 
 
■ 보물
 
◈ 선산 낙산리 3층 석탑 - 제469호, 해평면 낙산리 837-1
 
◈ 도리사 석탑 - 제470호, 해평면 송곡리 430 도리사 내
 
◈ 금오산 마애여래입상 - 제490호, 남통동 금오산 산24 (정상 부근)
 
◈ 선산 해평동 석조여래좌상 - 제492호, 해평면 해평리 562 (보천사 내)
 
◈ 구미황상동 마애여래입상 - 제1122호 황상동 90-14 (금강선원 내)
 
◈ 조정 종손가 소장 문적 - 제1004-2호, 남통동 4-5 청구아파트 105/1207
 
 
■ 사적
 
◈ 선산 낙산리 고분군 - 제336호, 해평면 낙산3리 96 (국도변)
 
 
■ 중요민속자료
 
◈ 해평 최상학씨가옥(쌍암고가) - 제105호, 해평면 해평리 239
 
 
■ 천연기념물
 
◈ 선산 농소의 은행나무 - 제225호, 옥성면 농소리 436(국도변)
 
◈ 선산 독동의 반송 - 제357호, 선산읍 독동리 539 (입구)
 
 
■ 유형문화재(이하 도지정)
 
◈ 궁기리 석불상 - 제120호, 도개면 궁기리 748-4 (도개중고교 내)
 
◈ 수다사 명부전 - 제139호, 무을면 상송리 산 12 (수다사 내)
 
◈ 대둔사 대웅전 - 제162호, 옥성면 옥관리 1090 (대둔사 내)
 
◈ 지주중류비 - 제167호, 오태동 산1 (입구)
 
◈ 선산객사 - 제221호, 선산읍 완전리 59-3 (읍사무소 내)
 
◈ 단계 하위지 선생 유허비 - 제236호, 선산읍 완전리 45-3 (단계천 옆)
 
◈ 아도화상 사적비 - 제291호, 해평면 송국리 산20-1 (도리사 내)
 
 
■ 무형문화재
 
◈ 구미 발갱이들소리 - 제27호, 지산동 일원
 
 
■ 기념물
 
◈ 천생산성 - 제12호, 장천면 신장리 산42-2 (천생산)
 
◈ 매학정 - 제16호, 고아읍 예강리 257-2 (낙동강변)
 
◈ 채미정 - 제55호, 남통동 산42-2 (금오산 입구)
 
◈ 금오서원 - 제60호, 선산읍 원리 276
 
◈ 금오산성 - 제67호, 남통동 금오산 일대
 
◈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 제86호, 상모동 171
 
◈ 김종무 충신 정려비 - 제132호, 고아읍 원호리 산14
 
 
■ 민속자료
 
◈ 용와종택 및 침간정 - 제18호, 해평면 일선리 1-54
 
◈ 해평 북애고가 - 제139호, 해평면 해평리 318
 
◈ 망천리 임당댁 - 제59호, 해평면 낙산리 산 148-3
 
◈ 의구총 - 제105호, 해평면 낙산리 산 148-3
 
◈ 의우총 - 제106호, 산동면 인덕리 104
 
 
※ 이밖에도 문화재자료(인동향교 대성전 등 22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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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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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