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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함평군 정보
◈ 함평군의 역사문화자원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대굴포전투, 월악리 8열부녀와 정각, 해보면 문장장터에서의 독립만세시위, 1862년 농민항쟁, 고구마사건 / ◈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정개청, 문무를 겸비했던 이덕일 장군(1561∼1622), 한말의병장 심남일 장군(1871∼1910), 병자호란의 명장 정대명,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장 김철, 서정시인 이수복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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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대굴포전투
정유재란 때 왜군과 격전을 벌인 전투로 대굴포는 1914년 이전에는 무안군 진례면이었고 현재는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마을이다. 대굴포는 이름그대로 ‘호랑이굴’, ‘홀어머니굴’ 등으로 불리는 천연동굴이 있는 곳으로 약 23년 동안 전라도수군의 최고 지휘본부였다. 현재는 제방을 쌓아 농경지로 변해있으며 병선이 드나들던 사포나루터는 주민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 월악리 8열부녀와 정각
한 지역에서 8열부가 나와 이들의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세워진 정각. 이 정각은 정유재란 당시 이 고장의 부녀자들이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가던 중 영광의 묵방포 앞 칠산바다에서 왜적의 포로가 되었다. 왜적들이 부녀자들을 겁탈하려 하자 “살아서 욕을 보고 가문과 나라의 이름을 더럽히느니 죽는 것이 옳다”며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게 되었다. 그후 이들이 순절한지 84년 후인 1681년 월야면 월악리 지변마을의 동래·진주정씨 가문의 열부 여덟 분을 기리기 위해 향유(鄕儒)와 문중에서 예조에 상소를 올리자 명정이 내려지게 되어 같은 해 정려가 세워졌다.
 
◈ 해보면 문장장터에서의 독립만세시위
1919년 4월 8일 문장장터에서 김기택, 정용섭, 정재남 등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에 수백 명의 군중이 호응하여 장터는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이들은 문장리에 있던 헌병분소를 기습하고 일부는 함평쪽, 영광쪽, 송정리쪽으로 행진하였다. 만세운동은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끝내는 총검 앞에 해산되는데 죽창을 든 일부의 청년이 일경과 대치되는 상황에서 상당한 유혈이 있었다. 현재는 4·8만세 추모식 및 재현행사를 매년 벌이고 있다.
 
◈ 1862년 농민항쟁
함평은 전라도에서는 두 번째로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으로 농민봉기 원인은 과도한 세금부담과 궁방전의 무거운 부담, 말 뿐인 환곡 등이었다. 함평의 민중봉기는 정한순이 주동이 되어 거사를 단행했다. 농민대표들은 전면봉기에 앞서 등소운동을 전개 관찰사에게 호소하였으나 형식적인 조치에 지나지 않아 이에 농민들은 사헌부에 대한 정소(呈訴)를 올리는 등 합법적인 호소를 하였지만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농민들은 조직력을 동원하고 부농들에게 자금을 지원 받는 등 일정한 힘을 확보하여 함평 장날인 1862년 4월 16일을 기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이렇게 시작된 함평의 민중봉기는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난 초기의 항쟁으로서 이후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의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 고구마사건
농협이 전량 수매해 줄 것으로 믿고 힘들게 가꾸었던 고구마가 수매되지 않아 애타는 농민들은 피해보상을 받고자 농민대표자 모임을 갖고 각 농가별 피해상황을 조사하여 농협 군조합을 찾아가 보상투쟁을 전개한다. 계속해서 농협측은 오리발을 내밀었고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농민들이 항의를 시작하자 경찰의 개입으로 농민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농민대표들은 고구마수매와 관련하여 커다란 의혹이 있을 것으로 여기고 조직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반농민적 농협에 의해 피해를 당한 농민들이 자신들의 정당한 보상을 위해 싸운 자발적인 싸움이 소외된 농업정책과 유신독재체제에 대한 카톨릭농민회의 조직단체 싸움으로 바뀌었다. 사건은 그 파장이 날로 확대되어 사건 발생 3년 후 1978년 7백여 농민들이 집단 난투극을 벌이고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1978년 농협이 피해농가에 309만원을 보상한다는 제의로 이 사건은 일단락된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정개청
곤재 정개청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중앙의 정치무대에는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나 호남사림의 학맥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529년 나주시 경현동 금성산 아래 대곡동에서 태어났다. 성장 후 상경하여 서경덕의 문하에서 박순과 교유하며 다년간 수학했고 또한 이이, 이산해, 서기 등과도 교유를 가졌다. 중년에 그는 나주군 동강면 곡천리인 곡강촌에 이거하고 1570년경에는 엄다면 엄다리 제동에 정착하여 정사를 짓고 후학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574년 박민헌의 천거를 받아 1585년 교정청의 낭관을 거쳐 1587년 영릉참봉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이산해의 추천으로 곡성현감이 되었으나 서인들로부터 박순을 배반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정여립과 교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연루되어 유배지 함경북도 경원에서 죽었다.
 
그의 저서로는 『우득록』 3권, 『수수기』 9권, 『쌍례편성』 2권 등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없어지고 『우득록』 3권만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현재 함평군 엄다면 제동마을에 그를 기리는 서원이 세워져 있다.
 
◈ 문무를 겸비했던 이덕일 장군(1561∼1622)
호는 칠실. 본관은 함평. 첨지중추부사 이은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열심히 닦아 이름을 떨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공은 학문을 그만두고 무예를 닦아 무과에 급제했다. 그리고 정유재란을 당해서는 함평민과 피난민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해 고산(지금의 향교리 뒷산의 고산골)과 동막(지금의 신광면 월암리 동막동) 등지에서 왜군을 무찔러 해전에서 고군분투하던 이순신을 도왔다. 그후 선조33(1600) 공은 월사 이정구의 추천으로 절충장군이 되고, 1610년에는 성을 쌓아 왜적을 막아야 된다는 상소를 올려 그의 탁월한 식견을 인정받았다. 곧이어 병조좌랑, 통제영병마절도사가 되었고 광해의 난정이 계속되자 광해군 5년(1613)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인목대비의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유명한 「우국가」 28장을 지었다. 이 「우국가」는 국문학사상 주목받는 것으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 한말의병장 심남일 장군(1871∼1910)
본명 수택. 본관 청송. 월야면 정산리 신기마을 출신으로 1908년 후반기와 1909년 중반기까지 우리나라 의병사를 주도한 인물. 1907년 11월 1일 신광면 원산리 덕동마을에서 봉기. 이때 전남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뜻으로 ‘남일’이라 호를 붙였다고 한다. 그의 의병항쟁은 전남의 서남부 전역에 걸쳐서 전개되는데 강진, 장흥, 남평, 능주, 영암, 나주, 해남, 보성 등지에서 승전을 거듭하는 신출귀몰한 의병으로 손꼽히게 된다. 일제에 의해 간행된 『전남폭도사』에 6대 거괴 가운데 한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1909년 일제의 대토벌작전 과정에서 부득이 의병을 해산하고 피신하던 중 능주에서 8월 26일 체포되었고 1909년 9월 광주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추모비는 광주공원에 서 있고 관련 유물로는 그가 남긴 『진지록』과 일제에 의해 기록된 『전남폭도사』가 있다.
 
◈ 병자호란의 명장 정대명
선무원종 2등훈을 받은 정충량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무예와 학문을 익혀 ‘아기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재야의 충의장사들을 규합 1636년 12월 15일 전라병사 김준용의 창의소로 갔다. 12월 23일 호남의병의 진용이 짜여질 때 그는 별장의 직을 맡았으며 광교산(지금의 용산부근)에 도착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1637년 1월 3일부터 5일까지 3일간에 펼쳐진 광교산 전투는 10:1이라는 숫자적 열세와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의 부마 백양골라를 사로잡고 적장 3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전라병사 김준용과 정대명을 비롯한 전라도 의병들의 공으로 이들 의병장들을 후일 ‘6호장’이라고 칭하는 계기가 된다. 광교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적과 대치하던 중 화평조약이 체결되고 고향으로 돌아온 정대명은 국가에서 몇 번이나 등용의 길을 열었으나 불응하고 일생동안 청의 연호를 쓰지 않는 절의를 보였다.
 
◈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장 김철
1886년 신광면 함정리 구봉마을에서 출생한 임시정부의 핵심인사다. 1919년 1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여운형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했고 1919년 선우혁 등과 국내로 잠입하여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모의했다. 3·1운동 직후 집안의 토지를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다시 상해로 건너간 그는 ‘대한독립 임시 사무소’의 핵심이 되어 활동했고 임시정부 초대 내각에서 교통부 차장을 역임했다.
 
이후 임시정부 내각에서 회계감사원장, 군무장, 재무장, 국무원 비서장 등을 역임하면서 1931년에는 군무장으로서 김구와 함께 애국단 활동을 지원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의 거사를 실행케 했다. 1934년 6월 29일 급성 폐렴으로 인해 48세를 일기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 서정시인 이수복
1924년 함평읍 장교리 산음마을에서 출생. 1954년 3월 『문예』지에 「동백꽃」을 게재해 그의 문명을 세상에 알렸고, 1955년 『현대문학』에서 「봄비」로 추천을 받는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추천을 받았었고 이후 「무등부」, 「꽃상여 엮는 밤」, 「눈을 감고」, 「모란송」, 「꽃씨」 등을 발표하면서 동양적인 서정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주목받는다. 1968년 34편의 주옥같은 시가 실려있는 그의 유일한 시집인 『봄비』를 발표한다. 1956년부터 30여 년동안 교직생활을 했으며 승주 주암고에서 수업 도중 순직한다.
 
• 이덕일(李德一) - 본관:함평, 아호:칠실(漆室), 생존시대:1561∼1622)
• 나각(羅珏) - 본관:금성, 아호:송파(松坡), 생존시대:1574∼1644, 유적지:가천사, {송파록})
• 정호인(鄭好仁) - 본관:진주, 아호:은와(隱窩), 생존시대:1579∼?, 유적지:정유피란기)
• 심수택(沈守澤) - 본관:청송, 아호:남일(南一), 생존시대:1871∼1910, 출생지: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 김태원(金泰元) - 본관:경주, 아호:죽봉(竹峯), 생존시대:1870∼1908, 출생지:나주시 문평면 갈마리)
• 윤제(尹濟) - 본관:파평, 아호:수정(守貞), 생존시대:1562∼1645)
• 이수복(李壽福) - 생존시대:1924∼1986, 출생지:함평읍 장교리, 유적지:광주 사직동원내 이수복시비)
• 최석두(崔石斗) - 생존시대:1917∼1951, 출생지:함평읍 기각리)
• 김의택(金義澤) - 본관:나주, 생존시대:1909∼1983, 출생지:엄다면 신계리)
• 신기하(辛基夏) - 본관:영산, 생존시대:1941∼1997, 출생지:나산면 송암리)
• 신호열(辛鎬烈) - 본관:영산, 생존시대:1914∼?, 출생지:나산면 송암리)
• 서희환(徐喜煥) - 본관:이천, 아호:평보(平步), 생존시대:1933∼1996, 출생지:함평군 엄다면 성천리)
• 정개청(鄭介淸) - 본관:고성, 아호:곤재(困齋), 생존시대:1529∼1590, 출생지:나주 대곡동)
• 박영근(朴永根) - 본관:무안, 생존시대:1885∼1910, 출생지:나산면 수상리 유덕산)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천연기념물
◈ 팽나무, 느티나무와 줄나무 제108호, 대동면 향교리 948-2
 
◈ 붉가시나무 제110호, 함평읍 기각리 산12-2
 
■ 유형문화재(이하 도지정)
◈ 고막천 석교 제68호, 학교면 고막리 629
 
◈ 용천사 석등 제84호, 해보면 광암리 415
 
◈ 함평향교 제113호, 대동면 향교리 590-1
 
◈ 곤재 우득록 목판 제146호, 엄다면 엄다리 493
 
◈ 석불입상 제171호, 함평읍 함평리 154-1
 
◈ 보광사 범종 제172호, 함평읍 함평리 288
 
■ 무형문화재
◈ 남도노동요 제5호, 엄다면 엄다리 575
 
■ 기념물
◈ 팔열부 정각 제8호, 월야면 월악리 155-1
 
◈ 예덕리 고분군 제55호, 월야면 예덕리 산170-3
 
◈ 양재리 이팝나무 제117호, 손불면 양재리 산96-1
 
◈ 마산리 고분군 제122호, 학교면 마산리 산16-2
 
◈ 신덕 고분군 제143호, 월야면 예덕리 산177
 
◈ 금산리 방대형 고분 제151호, 대동면 금산리 산84-2
 
◈ 장고산 고분 제152호, 손불면 죽암리 333-3
 
◈ 용월리 지석묘군 제158호, 월야면 용워리 367-2
 
■ 문화재자료
◈ 이규행 가옥 제150호, 나산면 초포리 657
 
◈ 영파정 제168호, 함평읍 기각리 906-2
 
◈ 척화비 제176호, 함평읍 기각리 906-7
 
 
• 함평고막천석교(咸平古幕川石橋)
• 용천사 석등(龍泉寺 石燈)
• 함평향교(咸平鄕校)
• 곤재우득록목판(48매)(困齋愚得錄木板(48枚))
• 남도 노동요(천학실)(南道 勞動謠(千鶴實))
• 팔열부 정각(八烈婦 旌閣)
• 함평예덕리 고분군(咸平禮德里 古墳群)
• 팽나무, 느티나무, 개서어나무의 줄나무
• 북가시나무 자생 북한지대
• 해보리 석불입상(海保里 石佛立像)
• 보광사 범종(普光寺 梵鐘)
• 양재리의 이팝나무(良才里의 이팝나무)
• 마산리 고분군(馬山里 古墳群)
• 예덕리 신덕고분군(禮德里 新德古墳群)
• 금산리 방대형고분(金山里 方臺形古墳)
• 죽암리 고분(竹岩里 古墳)
• 함평 이규행가옥(咸平 李圭行家屋)
• 영파정(潁波亭)
• 함평척화비(咸平斥和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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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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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