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안승과 보덕국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등에 전하여 기록된 보덕국(報德國)에 대한 기사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받들고 남하하여 온 왕족인 안승(安勝)을 고구려 국왕으로 봉하고 그들을 이 금마 지역에 정착하도록 하였다가 신라 문무왕(文武王) 14년에 가서 안승을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 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설과 왕궁리 유적 왕궁리유적은 지명(地名)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왕궁이 있었을 것이다 라는 점을 강하게 대두되게 하였고 또 다른 지명으로 왕궁평, 왕검이, 왕금이, 왕금성 이라고도 불리는 점이 왕궁터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의문을 더해 주고 있다. 이 곳이 바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여 건설하였다는 왕궁이다.
■ 국보
◈ 미륵사지석탑 제11호, 금마면 기양리, 1962. 12.20
◈ 왕궁리 5층석탑내 발견유물 일체 제123호, 국립전주박물관, 1966.7.26
◈ 왕궁리 5층석탑 제289호 왕궁면 왕궁리, 1997.1
■ 보물
◈ 연동리 석불좌상 제45호, 삼기면 연동리, 1963. 1.21
◈ 고도리 석불입상 제46호, 금마면 동고도리, 1963. 1. 21
◈ 미륵사지 당간지주 제236호, 금마면 기양리, 1963. 1. 21
◈ 연안이씨 종중문적 제651호, 삼기면 기산리, 1979. 2. 8
◈ 숭림사 보광전 제825호, 웅포면 송천리, 1984. 12. 29
■ 사적
◈ 익산 쌍릉 제87호, 석왕동, 1963.1.21
◈ 익산토성 제92호, 금마면 서고도리, 1963.1.21
◈ 익산 미륵사지 제150호, 금마면 기양리, 1966. 6.22
◈ 화산 천주교회 제318호, 망성면 화산리, 1982. 8.30
◈ 입점리 고분 제347호, 웅포면 입점리, 1991. 2.21
◈ 익산 제석사지 제405호, 왕궁면 왕궁리, 1998. 5.11
◈ 왕궁리유적 제408호, 왕궁면 왕궁리, 1998. 11.27
■ 천연기념물
◈ 천호동굴 제177호, 여산면 호산리, 1966.2.28
◈ 신작리 곰솔 제188호, 망성면 신작리, 1967. 7.11
■ 중요무형문화재
◈ 이리농악 제11호, 모현동 1가, 1985.12.1
◈ 이리향제줄풍류 제83-나, 남중동 1가, 1985. 12.1
국가 지정 문화재 외에도 전라북도 지정 문화재로 태봉사삼존석불을 비롯하여 유형문화재가 8점, 삼기지게목발노래를 비롯하여 무형문화재가 2점, 미륵산성을 비롯하여 지방기념물이 8점, 익산기세배를 비롯하여 민속자료가 2점, 여산향교를 비롯하여 문화재자료가 11점이다.
•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 왕궁리오층석탑(王宮里五層石塔) • 익산왕궁리오층석탑내발견유물(益山王宮里五層石塔內發見遺物) • 고도리석불입상(古都里石佛立像) • 연동리석불좌상(蓮洞里石佛座像) • 미륵사지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 • 연안이씨종중문적(延安李氏宗中文籍) • 숭림사보광전(崇林寺普光殿) • 익산쌍릉(益山雙陵) • 익산토성(益山土城) • 익산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 • 화산천주교회(華山天主敎會) • 입점리고분(笠店里古墳) • 제석사지(帝釋寺址) • 왕궁리유적(王宮里遺蹟) • 천호동굴(天壺洞窟) • 신작리곰솔 • 이리농악(裡里農樂) • 이리향제줄풍류 • 태봉사삼존석불(胎峰寺三尊石佛) • 청동은입인동문향로(靑銅銀入忍冬文香爐) • 망모당(望慕堂) • 여산동헌(礪山東軒) • 익산향교 대성전(益山鄕校 大成殿) • 함벽정(涵碧亭) • 소세양신도비(蘇世讓神道碑) •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金剛般若經疏論纂要助顯錄) • 남궁찬묘석상(南宮璨墓石像) • 익산목발노래 • 이병기생가(李秉岐生家) • 미륵산성(彌勒山城) • 익산낭산산성(益山郎山山城) • 익산백제토기도요지(益山百濟土器陶窯址) • 삼세오충열유적(三世五忠烈遺蹟) • 금마도토성(金馬都土城) • 웅포리고분군(熊浦里古墳群) • 천호산성 • 익산 기세배(益山 旗歲拜) • 김안균 가옥(金晏均 家屋) • 모현동부도(慕懸洞浮屠) • 여산향교 대성전(礪山鄕校 大成殿) • 함열향교 대성전(咸悅鄕校 大成殿) • 용안향교 대성전(龍安鄕校 大成殿) • 심곡사 대웅전(深谷사 大雄殿) • 남원사 미륵전(南原寺 彌勒殿) • 문수사 대웅전(文殊寺 大雄殿) • 조해영가옥(趙海英家屋) • 유계신도비(兪棨神道碑) • 소자파묘비 • 미륵사지석등하대석
◈ 이행검(李行儉, 1225∼1310) 고려 때의 인물로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큰아들 직(稷)은 등과하여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둘째 아들은 애(崖)인데 공민왕때의 명신인 공수(公遂)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딸은 산랑(散郞) 기자오(奇子敖)에게 출가하여 영안왕부인(榮安王夫人)으로 봉해졌는데, 이 이가 순제 황후를 낳았다.
◈ 소세양(蘇世讓, 1486∼1562) 양곡은 그 문장이 섬세하고 아름다웠으며 글씨 또한 유명하였는데 글씨는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3차례나 중국사신을 영접하였고 그에 따라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익산에 은퇴한 후, 죽을 때까지 20여년 동안, 전직 고위 관리로서 그리고 명망 높은 선비, 유학자로서 읍중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크나큰 존경을 받았다. 그 자신이 선비요 유학자로서 또 전직 고위관리로서 익산군 내의 선비들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사회기강을 바로 잡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 송영구(宋英耉, 1556∼1620) 광해군 2년(1610)에 사간에 등용되었고 필선(弼善)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광해군 5년(1613)에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가서 조선이 일본과 수호한 사실이 없음을 밝혀 그 공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표옹이 성절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 등과 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던 주지번(朱之蕃)을 알게 되어 많은 가르침을 주었는데, 후에 그가 등과 하여 벼슬이 재상의 지위까지 올랐다. 이러한 관계로 주지번은 표옹 선생을 늘 섬겨오며 조선에 사신으로 나와 만나보기를 원하였다. 주지번이 사신으로 나와 보니 표옹 선생이 작고하였는지라 그는 그의 묘소가 있는 장암까지 와서 참배하고 망모당 당액을 고쳐 써 주었다 한다. 이 액자가 현재까지 남아 전하고 있다.
◈ 오응정(吳應鼎, 1548∼1597) 오응정은 정유재란 시에는 순천부사로 남원전투에 출전하여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의 전투에 임하는 소극적 자세를 힐책하고 진두에 서서 분전하였으나 아군이 괴멸 하자 그의 장자 욱(稶)과 동량(東亮) 두 아들과 함께 화약고를 터뜨려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여 아들인 욱과 직, 동량과 손자인 방언 등이 나라를 위해 삼대에 걸쳐서 신명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싸웠다. 이들 다섯분의 순국영령을 모신 곳이 삼세오충렬사이다.
◈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선생은 시조 중흥의 기틀을 다지고 시조의 현대적 혁신을 위한 새로운 운동을 펼쳤으며 스스로도 수 많은 시조를 창작한 시조 시인이자 국문학자이다. 『역대시조선』, 『가람문선』, 『국문학전사』등의 저서를 남겼다. 여러 편의 시조론을 발표하여 시조혁신을 선도하고, 그 이론을 직접 실천하여 1939년 『가람시조집』을 내놓았다. 가람선생은 시조작가요, 국문학자로 학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 소세양(蘇世讓) 본관:진주, 아호:양곡(陽谷), 생존시대:1486 ∼ 1562 • 송영구(宋英耉) 본관:진천, 아호:표옹(瓢翁) 또는 일표(一瓢), 생존시대:1556 ∼ 1620, 출생지:익산군 왕궁면 광암리 • 유계(兪棨) 아호:시남(市南), 생존시대:1607 ∼ 1664, 유적지:유계신도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