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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 정보
◈ 부안군의 역사문화자원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삼별초(三別抄)항전의 터전, 여말(麗末) 왜구의 내침 / ◈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임진왜란때 선조를 업고 강을 건넌 고희(高曦), 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柳馨遠), 이매창(李梅窓), 신석정(辛夕汀)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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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부안군의 지명 변천과정
 
 시 대   백제시대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부령(扶寧)  계화(階火)    계발(戒發)    부령    扶(寧)+(保)安 = 扶安
보안(保安)  흔량매(欣良買)  낭주(浪州)    보안
 
 
◈ 삼별초(三別抄)항전의 터전
고려 조정의 항몽파인 임연(林衍) 일당이 쿠데타로 물러난후 부안 장정(壯丁)을 거느리고 입암산성(笠岩山城)에서 몽고군과 싸워 전공을 세웠던 송군배(宋君裴)도 피살되었다. 국왕의 뜻에 따라 이른바 출육정책(出陸政策)은 확정되었다. 여기에 항거하고 끝까지 원(元)과의 항전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 유명한 삼별초다. 삼별초가 원종(元宗)의 명령을 어기고 강화도에 남아, 반항적 태도를 보이자 왕은 사자를 보내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고 그 명부를 빼앗아 갔다. 여태까지 몽고와의 싸움에 앞장선 삼별초의 처지에서 볼 때 (부안 벌초 전공열(全公烈)도 삼별초의 대원이었다) 그들이 반몽(反蒙)을 외치며 일제히 들고 일어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사(高麗史)』 원종조(元宗朝) 13년 조(條)를 보면 그 해 5월에 삼별초가 대포(大浦)에 와서 조선(漕船) 13척을 나포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대포는 고부군의 서쪽 10리에 있는데 내재천의 하류가 되고 조수(潮水)가 드나든다고 하였는 바, 지금의 백산면 금판리 쯤으로 추정된다. 왕조 중심의 관선사(官撰史)이기에 ‘나포’라는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몽고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적 국가를 세우자는 정신으로 일어선 ‘삼별초난’의 본거지에 주군(州郡)의 수장(守長)이 사람을 보내어 내응(內應)을 약속했다든지 앞서 본 각지의 민중들이 삼별초를 지지하고 나섰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부안에서의 조선(漕船)나포도 실제로는 민중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여말(麗末) 왜구의 내침
왜구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엽에 이르기까지 주로 우리나라 동서 연안지방을 무대로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의 해적을 말한다.
 
고려말기의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왜구가 내륙 깊숙이 침범해와 강화, 교동(喬桐) 예성강구까지 출몰하고 개경(開京)의 치안까지도 위협할 정도로 큰 위세를 떨쳤다. 『고려사(高麗史)』 충정왕조(忠正王朝)에 보면 2년 2월에 왜(倭)가 고성(固城), 죽림(竹林), 거제 등지에서 노략질을 하는 것을 합포천호(合浦千戶)가 이들을 격파하여 적 3백명을 죽였는데 왜구의 시작이 이때부터라고 하였다. 그보다 앞선 충숙왕조(忠肅王條)를 보면 10년 6월에 지금의 고군산도(古群山島)에서 조운선(漕運船)을 약탈하여 갔다고 적힌 것으로 보아 부안 지방에서의 왜구의 노략질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왜적(倭賊)이 승천부(昇天府)의 흥천사(興天寺)에 침입하여 충선왕(忠宣王)과 조선 공주의 영정을 가져갔다거나, 전라도에서 조선(漕船) 2백여척을 약탈하였다든지, 또 공민왕 때에 역시 전라도에서 조선 40여척을 약탈하였다든가, 추자도(楸子島)에 처들어온 왜구는 수많은 촌민(村民)을 사로잡아 갔다든지 하는 많은 기록들에서 당시의 피해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우왕(禑王) 5년에 침입한 왜구는 50여척의 배로 곰소(熊淵)에 상륙하여 적현(狄峴)을 지나 부령현(扶寧縣)을 노략질하고 장등치(長嶝峙)를 넘어 동진강에 다다라 토벌군이 오는 길목인 동진교(東津橋)를 끊어 놓은 일까지 있었다.
 
본래 만주인이면서 귀화하여 홍건적(紅巾賊)을 쳐부순 공으로 양광전라도지휘사(楊廣全羅道指揮使)까지 된 변안열(邊安烈)은 역시 원(元)나라 사람이었던 상원사나세(上元師羅世)를 도와 밤에 부서진 다리를 고친 다음 부안 지방에서 발호하던 왜구를 쳐 크게 이겼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있고 이 전공으로 변안열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였다는 사실로서도 이때 부안에 침입하였던 왜구의 규모라든지, 또 그때 전투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임진왜란때 선조를 업고 강을 건넌 고희(高曦)
고희의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문충공(文忠公) 경(慶)의 후예이고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사렴(士濂)의 아들로 부안읍에서 출생했다. 1584년(선조17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난을 피할 때 도보로 호가를 하면서 온갖 열성을 다하여 모셨다. 그 후 1597년 (선조 30년)에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니 호조판서 김수(金粹)의 천거로 군산공세(群山貢稅) 전운사(轉運使)가 되어 명군(明君)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을 맡아 그 책임을 다하였다. 이어서 위원(渭原), 부령(富寧), 풍천(豊川) 등 주로 북방 요새지의 수령직을 맡아 많은 치적을 남겼다. 난이 끝난 뒤인 1604년 (선조 37년)에 호성공신3등(扈聖功臣三等)에 녹훈되어 18공신회맹록(十八功臣會盟錄)에 들어갔으며 영성군(瀛城君)에 봉하고 그의 초상화를 하사 받았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있다가 1615년(광해군 7년)에 작고하니 향년 56세였다. 조정에서는 예장(禮葬)과 함께 호조판서(戶曹判書)의 중직을 내리고 부조묘(不潮廟)를 특사 했다.
 
◈ 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柳馨遠)
실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1622∼1673)은 그의 뛰어난 학문과 경륜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은둔생활을 했는데 그 유명한 『반계수록』을 집필하며 20여 년을 보내고 또한 생을 마감한 곳이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이다. 이곳은 본래 ‘우반동’이라 하였는데 ‘반계’라는 호는 여기에 연유하여 지었다. 우반동은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유관(1346 ∼1433)의 사패지지로 유관은 반계 선생의 9대조의 선영이다. 반계는 32세 때인 1653년(효종4년)에 조부의 고향인 보안현 우반동으로 이사해 이곳에 기거하면서 많은 저술과 농민지도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반계수록』은 총 26권으로서 내용은 국가체제의 전반적인 개혁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반계수록』에 나타난 내용의 특징은 ‘부민 부국’을 위해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개혁의 요체를 자영 농민의 육성에 있다고 보고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균전제, 세제개혁, 병농일치의 군사제도인 부병제, 공거제 실시, 신분제 및 직업세습제 개혁, 관료와 학제 개혁 등 다방면에 걸쳐 국운을 걸고 과감히 실천할 것을 주창했다.
 
 
• 이매창(이계생)(李梅窓(李桂生), 아호:매창(梅窓), 생존시대:1573-1610, 출생지:부안, 유적지:매창시비, 매창의 묘)
• 신석정(辛夕汀, 생존시대:1907-1974, 출생지:부안읍 동중리, 유적지:신석정 시비, 석정공원, 신석정 고택)
• 유형원(柳馨遠, 본관:문화(文化), 아호:반계(磻溪), 생존시대:1622-1673, 출생지:서울, 유적지:반계선생 유적지)
• 전우(田愚, 아호:간재(艮齋), 생존시대:1841-1922, 출생지:전주시 다가동, 유적지:부안의 계양사, 충남 서산의 안양사, 경남 의령의 의산사. 고창읍의 용암사.)
• 김구(金坵, 본관:부안, 아호:지포(止浦), 생존시대:1211-1273, 출생지:부안읍 선은리, 유적지:경지재(敬止齋))
• 고희(高曦, 본관:제주, 생존시대:1560-1615, 출생지:부안읍 봉덕리(안쟁갈리), 유적지:효충사)
• 손비장(孫比長, 본관:부안, 아호:입암(笠岩), 생존시대:조선시대, 출생지:부안)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보물
 
◈ 내소사 고려동종 - 제227호, 진서면 석포리 268
 
◈ 법화경 절본사본 - 제278호, 국립전주 박물관
 
◈ 내소사 대웅보전 - 제291호, 진서면 석포리 268
 
◈ 개암사 대웅전 - 제292호, 상서면 감교리 714
 
◈ 고희와 문중 유물 - 제739호, 하서면 청호리 473
 
◈ 부안김씨 종중고문서 - 제900호, 보안면 우동리 462
 
◈ 내소사 영산회괘불탱 - 제1268호, 진서면 석포리 268
 
◈ 개암사 영산회괘불탱 - 제1269호, 상서면 감교리 714
 
 
■ 사적
 
◈ 부안 유천리 도요지 - 제69호, 보안면 유천리 10-1외 15필
 
◈ 부안 진서리 도요지 - 제70호, 진서면 산134-6외 15필
 
◈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 - 제103호, 하서면 석상리 707-1
 
◈ 백산성 - 제409호, 백산면 용계리 산8-1외
 
 
■ 천연기념물
 
◈ 부안 도청리 호랑가시나무 군락 - 제122호, 변산면 도청리 산16-1
 
◈ 부안 격포리 후박나무 군락 - 제123호, 변산면 격포리 산35-1
 
◈ 부안 중계리 꽝꽝나무 군락 - 제124호, 변산면 중계리 산1
 
◈ 부안 중계리 미선나무 군락 - 제370호, 변산면 중계리 산19-4, 상서면 청림리 228, 229
 
 
■ 중요민속자료
 
◈ 부안 서문안 당산 - 제18호, 부안읍 서외리 203외 9필
 
◈ 부안 동문안 당산 - 제19호, 부안읍 동중리 391외 11필
 
◈ 부안 김상만 가옥 - 제150호, 줄포면 줄포리 445
 
 
■ 중요무형문화재
 
◈ 풍어제(위도 띠뱃놀이) - 제82호, 위도면 대리 319(95.11.11)
 
◈ 대목장 - 제74호, 동진면 동전리 564
 
 
■ 유형문화재(도지정)
 
◈ 수성당 - 제58호, 변산면 격포리 산35-17
 
◈ 서외리 당간 - 제59호, 부안읍 서외리 287-2
 
◈ 위도관아 - 제101호, 위도면 진리 156-3
 
◈ 청림리 석물좌상 - 제123호, 상서면 감교리 714
 
◈ 내소사 3층석탑 - 제124호, 진서면 석포리 268
 
◈ 용화사 미륵불 입상 - 제171호, 행안면 역리
 
◈ 개암사 응지전 16나한상 - 제179호, 상서면 감교리 714
 
 
• 내소사 고려동종
• 법화경절본사본
• 내소사 대웅보전
• 개암사 대웅전
• 고희 외 문중유물
• 부안김씨 종중고문서
• 내소사영산회괘불탱(來蘇寺靈山會掛佛幀)
• 개암사영산회괘불탱및초본(開巖寺靈山會掛佛幀및草本)
• 유천리 도요지
• 부안 진서리도요지(扶安鎭西里陶窯址)
•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扶安龜岩里支石墓群)
• 백산성
• 서문안 당산
• 동문안 당산
• 부안 김상만 가옥(扶安金相萬家屋)
• 위도 띠뱃놀이
• 대목장(고택영)(大木匠)
• 부안 격포리 후박나무 군락
• 부안 중계리 꽝꽝나무 군락
• 부안 도청리 호랑가시나무 군락
• 미선나무 군락
• 수성당(水城堂)
• 서외리 당간
• 내소사 설선당과 요사
• 부설전
• 부안농악
• 보안입석
• 쌍조석간 당산
• 돌모산 당산
• 죽림리 석장승
• 월천리 석장생
• 반계선생 유적지
• 간재선생 유적지
• 채석강
• 서산리 와요지
• 실상사지
• 내소사 일원
• 신석정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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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홍건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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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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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