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범좌수
옛날 신현읍에는 옥(玉)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습니다. 아는 것이 많고 꾀도 많은 옥씨를 사람들은 좌수(座首=조선시대 지방 군∙현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인 향소의 벼슬)라 불렀어요. 두 눈엔 무서운 범의 기상이 번쩍번쩍하는 것같아 사람들은 그를 바로 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옥범좌수’라고도 불렀는데, 말도 잘하고 꾀가 많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어요. 논두렁의 물도 자기 논에만 대놓고 다른 논에는 대주지 않고서 낮잠을 자곤 했지만, 아무도 대들지 못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양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모두 두려워하니, 이번에 한양 구경이 나 공짜로 해볼까?’
하며 한양 길을 떠났습니다.
여장을 차리고 집을 나선 옥범좌수는 먼저 경주에 들렀습니다. 그곳에 열두 대문을 가진 최 부자가 산다고 해서 그 집으로 한번 들어가 보았습니다. 최 부자댁은 마침 큰 사고가 났는지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이왕(李王)에게 바칠 옥돌 안경을 만들고 최종 마무리를 하는 순간에 두 개 중 하나가 부러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약속한 기간에 임박해 죽을 맛입니다. 이제껏 쌓아 올린 12대 진사 벼슬을 내려놓아야 할 테니까요.”
이때 옥범좌수는 이것을 자신이 맡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거제 사는 옥범좌순데 최진사를 좀 만나야 되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이왕께 바칠 안경을 깼다고 하던데, 그 안경을 제가 가지고 가서 이왕께 바치겠습니다.”
“네가 그걸 바쳤다가 잘못하면 모가지가 뎅강 하는데 어찌 바치겠느냐?”
“괜찮습니다. 제가 바치겠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최 부자는 옥범좌수가 자신을 살려줄 사람으로 여기고 사흘 밤낮으로 진수성찬을 베풀고 노잣돈도 많이 챙겨주었습니다. 옥돌 안경은 창호지로 열두 번, 비단공단으로 열두 번 모두 스물네 번 쌌습니다. 성한 것 한 개와 깨진 것 한 개를 허리에 차고 그 집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한양길로 들어서다 고갯길을 넘고 넘어 대구 길로 들어섰습니다. 달성 서씨들이 잘산다는 소문을 듣고서 낙동강을 건너려 나룻배를 탔습니다. 때마침 돈이 다 떨어진 옥범좌수는 사공에게 뱃삯은 커녕 반말을 하면서 옥신각신했습니다. 이를 지켜본 달성 서씨 자손들이 말참견을 했습니다.
“어디서 온 촌 할아버지길래 사공 삯도 안 주요?”
“왜 젊은 사람들이 간섭을 하느냐? 돈이 없으면 없는 줄 알지.”
이렇게 옥신각신하다 보니 나룻배는 벌써 뭍에 닿았습니다. 청년들이 다시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나쁩니다. 저 나룻배 사공에게 돈을 주시오.”
옥범좌수가 끝까지 못 주겠다고 버티자 시비가 났습니다. 사공은 구경만 보고 있을 뿐입니다. 옥범좌수는 자신이 있어서 청년 너덧 명을 때려 갈겼습니다. 힘깨나 있는 청년들은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노인네가 악을 쓰며 때리자 그를 밀어서 넘어뜨려 버렸습니다.
“아, 이놈아. 다 와싹 깨져버렸네.”
“무엇이 깨졌소?”
“응. 최 부자가 이왕께 바치는 옥돌 안경을 내가 허리에 차고 가지고 가는데, 지금 넘어져서 깨져버렸어. 아이고 이제 나는 죽었네.”
“무슨 말이오?”
사정을 얘기하자 청년들이 안경을 보자는 겁니다. 서씨 댁의 사랑방에 가서 스물 네 번 싼 옥돌 안경을 펴보았습니다. 한개는 말짱했지만, 한 개는 복판이 탁 벌어져 있었습니다. 달성 서씨가 잘살긴 했지만, 안경을 망가뜨린 사실을 이왕에게 그대로 보고하면 죄를 면할 수 없어서 서씨 전부 구족(九族)이 멸할 판입니다.
“너희들의 실수로 안경이 깨졌지만 내가 한양에 가서 이왕에게 잘 말해 달성 서씨 집안에 지장이 없도록 하겠네.”
그렇게 하여 옥좌수는 사흘 낮밤을 거나하게 대접받고 노잣돈도 두둑하게 챙긴 채 그 집을 빠져나왔습니다.
이윽고 한양에 도착한 그는 약속일까지 며칠이 남아 남산에 들렀어요. 윤 대감이 잘산다는 소문에 며칠 묵으려고 문을 두드렸답니다.
“윤 대감님 계시나?”
“어디서 왔는데 윤 대감님을 찾느냐?”
“거제도에서 온 옥범좌수다.”
지체 높은 양반집이라 먼저 윤 대감에게 알리고 허락을 받은 뒤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도 그가 다짜고짜 들어가려고 하자, 문지기와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벌어져서 옥범좌수가 뒤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깨졌구나.”
밖이 소란하자 윤 대감이 바깥 사정을 묻고 옥범좌수를 불렀습니다.
“경주 최 부자가 이왕에게 갖다 바치는 옥돌 안경을 제가 가지고 가는데요. 이놈들, 무식한 놈들이 밀어서 스물네 번이나 싼 이 안경이 와싹 깨져 버렸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
정말 풀어보니 한 개가 복판이 깨져 있었습니다. 윤 대감은 이 사실을 이왕에게 그대로 보고하면 목이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떡을 차려 놓고 간청하듯 빌어 사정을 하며 며칠 잘 묵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옥범좌수는 윤 대 감 집에서도 진수성찬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노잣돈을 한몫 단단히 챙기고 경복궁을 향했습니다.
여기서도 절차와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막무가내로 들어가려 하자 포졸들이 막았습니다. 이런저런 다툼 끝에 옥범좌수는 뒤로 발랑 넘어졌습니다.
“어이구, 깨졌구나.”
포졸들이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이에 옥범좌수는 최 부자에게 부탁을 받고서 시골에서 처음 한양길에 올라 뭘 잘 몰라 일을 그르쳤다고 둘러댔어요. 그러면서 하소연을 했답니다. 그러자 포졸들은 이런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왕은 사정을 듣고 안경을 깨뜨린 것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옥범좌수는 공짜로 한양구경을 하면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노잣돈도 두둑하게 챙길 수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죽을 죄를 지을 뻔했던 최 부자도 구해줘 천하에 겁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한양구경을 공짜로 한 옥범좌수는 한양을 떠나 다시 거제도로 돌아왔습니다. 우쭐우쭐한 마음에 두 눈은 여전히 범의 기상으로 넘쳤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옥범좌수는 습관처럼 논두렁에서 물을 대놓고 낮잠을 자다가 이웃마을 김씨의 괭이 망치에 맞아 죽었습니다. 자신의 논에만 물을 대고 이웃의 논에는 주지 않아 농사를 못 짓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옥범좌수가 죽을 때가 된 탓인지 두 마리의 범도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 옛날 옛적 거제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0년 1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