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가야시대 가야연맹체와 독로국(瀆盧國) - 김남희
가야의 전기 제국은 변진 12국으로 (1)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2) 접도국(接塗國), (3)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4) 고순시국(古淳是國), (5)반로국(半路國), (6) 낙노국(樂奴國), (7)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8) 감로국(甘路國), (9) 구야국(拘邪國), (10) 주조마국(走漕馬國), (11) 안야국(安邪國), (12) 독로국(瀆盧國)이 있다.1)
서기 42년 금관가야 등 6가야와 골포국(마산) 등 포상팔국으로 김수로왕에 의해 가야국이 창건되었다. 거제는 서기 520년 가야 겸지왕 31년 소가야(고성)와 아라가야(함안)를 통해 소가야국으로 개칭되어 이에 속하였다.2) 거제도는 소가야, 아라가야, 금관가야와 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거제 남산패총, 연초·하청·이목리유적, 참샘이 고분, 장터고개고분군, 장목면의 대금·간곡·구영·농소고분군, 왜고분군, 아주동고분군 가야시대유물출토, 6세기 이전에는 간곡만과 옥포만을 위주로 마한, 백제, 왜와 교역을 하였으며 농소리 고분에서는 왜의 분묘도 발견되었다. 가야시대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고 있으나 군현을 두었다는 자료는 없다.
거제시 연혁에 거제가 소가야와 아라가야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금관가야에 소속된 후 532년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되어 있다. 후기 가야 사회의 변화는 서기 400년에 일어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이다. 왜가 신라를 공격함으로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5만의 군대를 파견했다. 광개토대왕 10년(400) 경자(庚子)에 교서로서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하였다.
여태껏 400년에 일어난 고구려 남정(南征: 남쪽을 정벌하다)을 ‘고구려–신라’의 연합군과 ‘백제-가야-왜’ 연합군 간의 전쟁이라고 이해해 왔다. 이러한 입장에서 가야제국이 김해 금관가야국을 중심으로 연맹체 관계에 있었기에 연맹체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으므로 가야지역의 모든 나라들이 백제-왜 연합군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야의 일부 연맹체는 고구려군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 때문이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3)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아라가야는 고구려 편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가야연맹체의 부분적 분열을 확인할 수 있다. 김해의 금관가야가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경남 서남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틈타 아라 가야가 그 공간을 차지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안라인수병에 관한 해석은 두 가지 견해가 있으니. 1. ‘안라(아라가야)인 수병(戍兵)’ 또는 2. ‘羅人’을 ‘신라인’으로, ‘安’을 ‘안치하다’라는 동사로 보아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戍兵〕 하였다’고 풀이하는 견해도 있음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연합군이 가락국을 정벌한 전쟁은 가야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일으킨다. 첫째, 전쟁으로 인하여 가락국이 큰 타격을 입고 이를 계기로 낙동강의 동쪽 지역인 경북 성주, 밀양, 부산 동래, 양산지역이 신라의 영향권으로 포함되었고, 낙동강 하류의 주요 세력이 궤멸됨으로써 가야는 해상교역의 이익을 대폭 상실하게 되었다. 둘째, 신라는 가야와 왜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셋째, 김해의 금관국이 쇠퇴한 대신에 경상도 내륙지역의 가야제국과 왜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전기 가야의 중심지였던 낙동강 하구의 주민들이 흩어져 경상 내륙지역과 일본 열도 등으로 이주하면서 제철 및 철기 가공 기술, 도질토기 제조 기술 등이 전파되었다. 이러한 결과 외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이 가야 지역에 미친 영향은 가야 지역 중심 세력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이다. 금관 가락국이 전쟁에 패함으로써 쇠퇴되고 아라가야와 대가야가 가야 지역 내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후기 가야가 시작되었다. 거제의 독로국은 가야 후기에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
《거제시지(巨濟市誌)》에는 한때 소가야와 아라가야에 편입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그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소가야의 멸망은 562년, 아라가야는 560년경으로 보아 멸망 시기로 볼 때 금관가야의 532년과 같은 기록을 하고 있다. 거제가 신라에 병합된 것을, 532년 금관가야의 신라 통합 시기로 당시에는 금관가야에 소속된 것으로 추정이 될 뿐이다. 즉, 가야연맹은 철기 생산과 제련을 중심으로 성장을 하지만 고구려의 공격으로 몰락하기 시작하는데 그런데도 600여 년간 발전한 가야는 그 힘이 신라의 삼국 통일의 밑바탕이 된다. 금관가야의 후손인 김유신이 신라 왕실의 김춘추와 함께 통일을 이루었으니 그저 헛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가야는 멸망한 것이 아닌 신라의 삼국 통일을 완성하여 그 속에서 다시 이어 가고 있다.
이것은 거제의 유적에서도 잘 나타난다. 아주동 고분군에는 아라 가야의 그릇과 일본 하지키 출토 양상, 신라시대 고분군의 모습이 함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4세기경 거제 아주동 일대는 아라 가야, 왜, 마한 등의 다양한 집단이 교류하던 지역으로 볼 수 있다.4) 신라에 편입된 후에도 신라와 일본 사신이 왕래하던 해상교통로 역시 거제도였기 때문에 거제도는 중요했고 이러한 이유로 문무왕이 거제도에 상군을 설치했다. 또한 신라는 거로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설정했다.5) 그러니 가야와 함께 독로국이라는 이름도 사라지게 되었지만, 거제의 지리학적 중요성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한 - 韓(弁辰) 〈弁辰〉 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有〈已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弁〉·〈辰韓〉合二十四國,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2) 《거제군지》 3) 광개토대왕릉비의 제3면 탁본, 제일 오른쪽 글씨(글 해석: 조홍근 한문화재단사무총장 4) 김재홍, 〈신라의 거제도 군현 편제 과정〉, 2018년,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5) 春三月 以菁州居老縣爲學生祿邑 《三國史記》 권10, 신라본기10, 昭聖王元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