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삼별초와 거제도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 박지은
삼별초는 고려 최씨정권의 사병으로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신의군(神義軍)을 말한다. 별초는 본래 전시의 임시적 군대조직인데, 최씨 무신정권기에 편성된 삼별초는 상비군의 구실을 했다.
1232년(고종 19) 무신집권자 최우(최이)가 수도 개경의 밤순찰과 수비를 위해 특별한 부대를 조직하고 이를 야별초(夜別抄)라 했는데 군사의 수가 많아지자 이를 나누어 좌별초와 우별초라 했고, 대몽전쟁이 터지자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 도망 온 자들로 신의군을 편성, 이를 합해 삼별초라고 했다. 삼별초는 수도의 치안유지를 위한 경찰군의 역할뿐 아니라 도성 수비와 친위대로서의 임무도 수행했으며, 대몽전쟁 때는 전투부대로서 정규군을 대신해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이처럼 삼별초는 공적 임무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재정에 의해 양성되고 국고에서 지출되는 녹봉을 받았다는 점에서 국가의 공적인 군대라고도 할 수 있으나, 권신들의 사병적 성격도 농후했기 때문에 무신정권기엔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중요한 무력기반이 되었다. 대몽전쟁 때 강화도 수비를 담당하며 활동을 전개한 삼별초는 몽골과의 강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진도와 제주도를 중심으로 치열한 항전을 전개했다.1)
삼별초 항쟁은 1270년 6월 삼별초 해산령에 불만을 가진 삼별초 장병들이 개경 환도를 거부하고 여원 연합군에 대해 펼쳤던 3년간의 항쟁이다. 1270년 무인정권이 종식되자 원종은 몽고의 지시에 따라 출륙환도를 단행했다. 출륙환도하면 몽고군의 보복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장군 배중손은 삼별초를 규합해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온을 국왕으로 옹립하고 진도·제주도로 거점을 옮기면서 3년 동안 저항했다. 고려를 예속화하려던 몽고의 정책과, 예속화를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국왕 및 그 일파의 행동에 반발하여 항거한 병사들의 항쟁이었다.
1272년에 삼별초는 남부 해안지역에서 격렬히 저항하고 있었고, 고려 정부군은 몽고군과 함께 삼별초를 진압하려던 시기이다. 그 당시 거제민의 입장에서 삼별초의 항쟁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거제현에 삼별초가 와서 현령을 붙잡아 간 사건 1년 전 1271년 1월 밀성(현재의 밀양)에서 삼별초 세력에 호응하려고 했던 사건이 있었다.2)
밀성군(密城郡) 사람 방보(方甫)와 계년(桂年), 박평(朴平), 박공(朴公), 박경순(朴慶純), 경기(慶祺) 등이 밀성군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장차 진도(珍島)에 호응하려고, 부사(副使) 이이(李頤)를 죽이고 드디어 공국병마사(攻國兵馬使)라 칭하면서 여러 군현(郡縣)에 공문을 보냈다. ―《고려사》 1271년 3월 4일(양)
대몽항쟁에서 강화로 돌아선 조정의 결정에 끝까지 항쟁한 삼별초의 항쟁은 그 당시 남해안 지역민들의 입장에 서는 협조하거나 호응하는 세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원종 12년 이후 거제도 전체 공도정책으로 출륙 명령이 내려져 이주하게 된 배경에 이러한 이유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아진다.3)
▶ 《고려사절요》 삼별초 거제 내용
삼별초와 거제도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삼별초 항쟁이 일어나고 있을 시기 거제도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고려사》 1272년의 기록을 보면 삼별초의 영향력이 거제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는 사료를 확인 할 수 있다.
삼별초(三別抄)가 거제현(巨濟縣)을 노략질하여 전함 3척을 불태우고 현령(縣令)을 사로잡았다. ―《고려사절요》 권19, 1272년 11월 (음)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년. 2) 이정신, 〈書評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윤용혁 저, 2000년. 일지사)〉. 《역사와 담론》 32집, 2002년, P.133~140. 3) 김광철. 〈고려 후기 거제 지역사회의 변동과 巨濟縣의 이동〉. 《석당논총》 46, 2010년, P.245~2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