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고려시대 섬을 비워야 했던 공도정책(空島政策) - 김해정
일본과 가장 근접한 거제도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집권하면서 강력한 통치를 위한 행정개혁을 서둘게 되었는데 성종 14년(995년)에는 10도, 12주 절도사의 중앙집권제를 확립하며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지역을 산남도(山南道)라 했다. 거제도는 산남도에 속하면서 진주절도사의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 현종 9 년(1018년)에는 행정 구역이 5도 양계로 개편되면서 거제도는 안동도호부 진주목의 거제현으로 개편되어 처음으로 현이 설치되고 현령을 두었다. 당시 통영군과 고성군은 거제현에 속하였다.1)
왜구는 현종 10년(1019년) 이래 정착되었던 정상적인 교역 활동을 중단하고, 인종 4년(1126년)에 거제지역을 침범하여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자 그해 10월 조정에서는 남해안 안찰사로 정응문(鄭應文)을 거제도에 파견, 왜적을 격퇴시켰다. 그리고 귀순한 좌성 등 820명(거 제현 3속현의 관리 등을 왜구로 취급)의 왜적은 협주 지역인 삼기현(三岐縣, 지금의 합천과 의령지역)에 화순장(和順場)을 설치하고 귀화케 하여 순화시켜 살게 하였다. 그 뒤 한때 잠잠하던 왜구들이 고려 고종 21년(1234년) 이후에도 끊임없이 남해안 도서 및 해안지대를 노략질하였는데, 거제도에도 대거 몰려와서 주야로 침탈을 일삼았다. 왜적들은 2~3척의 배를 타고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200~500척의 대규모 해적단을 구성하고 수천 명이 침범할 때도 있었다. 우리 고려 조정에서는 조민수(趙敏修), 이성계(李成桂) 등 장수들의 토벌 작전이 있었으나 완전히 격퇴시키지 못했다.2)
원종 12년에는 삼별초군이 삼남의 해안지역에서 극성을 피우고 있을 때라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고려사’ 3)의 기록에 의하면 개경 환도를 실행한 원종에 반기를 든 삼별초군이 원종 12년(1271년)부터 원종 14년 1월까지 완도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와 도서지방에 근거를 두고, 합포 즉, 지금의 마산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여·원연합군을 3~ 차례나 공격하여 전함 50여 척을 소각하고 원군을 생포해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해 4월 제주도에서 여·원 연합군에 의해 섬멸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라에서는 수군진지의 관군들을 제외하고 거제도민들은 거창 가조현과 진주 영선현 등지로 이주를 시키고, 거제도를 떠나 육지에서 더부살이를 해야 했다.4)
거제현의 거창 가조로의 피현(避縣)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중 대표적인 것은 첫째 왜구(倭寇)의 침략이며, 다른 하나는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문이라는 설이 서로 대립해 있다. 조선 초기에 들어오면서 그 이전에 일부 삼별초 항쟁으로 인하였다던 것이 왜구의 침략으로 바뀐 이유는 첫째로, 거제 등 남해안 방어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신흥 국가의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삼별초의 항쟁5) 같은 사실을 숨기기 위한 방편이 필요하였고, 둘째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지은 ‘이행’이 거제 귀양살이(1506년)하는 동안 당시 거제백성에게 전해 들은 바 그대로 “왜구의 침략”이 원인이라고 단정하여 기록했기 때문이며, 또한 삼별초가 끝까지 몽고에 항쟁한 것이 신흥국 조선의 유교적 가치와 충돌하는 갈등을 감추고자 했던 까닭이 아니었던가 한다.6)
거제가 가조로 이주하게 된 것은 거제의 수령이 가조와 연고가 있는 사람일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거제에는 3속현(아주, 송변, 명진)이 있었는데 그중 거창으로 이주할 때의 아주현감은 아주신씨(鵝洲申氏)로 추정되고 중심 성씨는 거제반씨(巨濟潘氏)이다. 고려시대의 현령은 현의 수령으로, 현의 인구가 1만 명 이상이면 현령을 두고 그 이하이면 현장(縣長)을 두었는데 위에서와 같이 현종 9년(1018년)에 현령을 두었으므로 당시의 거제현의 인구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앙정부에서 소개령을 내려 거제는 피현시에 그 3속현(屬縣) 및 역(驛)·원(院) 등 총 1,000명 정도의 관리 이속노비와 백성들이 거창군 가조현, 진주목 영선현 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가조현의 치소는 거제현이 가조로 옮겨 오면서 바로 가조현과 거제현이 합쳐져 제창현이 되었으며 거제현 치소로 바뀌었다. 그 당시 지역민들의 혼란이 컸을 것이다.
아주현(鵝洲縣)은 지금의 아주·장승포지역으로서 임진왜란 때에 조선 수군 연합함대(경상우수영+전라좌수영)가 왜선 26척을 격침한 옥포대첩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아주현(현 아주동)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성을 쌓고 감무(監務)가 다스렸다. 그러다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가조현으로 현민 모두가 피난하였다는데 그곳이 지금의 거창 남하면 아주마을이다. 거제 아주현 국사봉에는 거제 반씨(巨濟潘氏) 시조인 반부(潘阜)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거창에 이주해온 반씨는 대부분 아주현 출신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현민과 더불어 가조로 피란 갔던 아주현감이었던 아주 신씨(鵝洲申氏)의 묘가 남하 양항리에 있는데 ‘신장군묘’라고 전한다.
송변현(松邊縣)은 현재의 거제시 동부·남부면에 속한다. 지금의 거창 남상면 송변으로 지명이 남아 있다. 거제 송변현의 치소는 율포리(栗浦里, 밤개)에 있었으며 그곳 지명 중 ‘뿔당골’이나 ‘장군봉’, 의상대(義湘臺), 불당골(佛堂谷), 수월리(水月里)라는 지명이 현재 거창군에 남아 있어 거제현과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명진현(溟珍縣)은 진주목의 속현인 영선현(永善縣)으로 옮겨갔으나 구체적인 장소를 알 수가 없다.
위와 같이 3개의 거제 속현이 피란을 떠남으로 인하여 고려 말 우왕(禑王) 때까지 거제섬은 황폐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서해도도관찰사(西海道都觀察使) 조운흘(趙云仡)은 고려의 군사적 전략과 연결시켜 거제섬의 농업 생산을 비롯한 산업생산력을 복구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으며, 우왕(禑王)이 이를 수용하여 도당에 회부하였다. 그러나 그 시행이 불투명하여 거제섬의 복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러한 결과로 섬을 떠난 사람들이 고려 멸망 때까지 거제섬으로 복귀하지 못하였던 것이다.7)
▶ 거창군 가조면에 남아있는 거제관련 지명
▶ 거제도에 현재 사용하고 있는 거창 관련 지명
거제현 읍지와 동국여지승람에는 오양역, 덕해향(현 덕포), 아주현, 송변현 등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 가조면에 남아 있는 지명 ‘해향골’, ‘해덕들’은 거제현 덕해향이 있을 때 불렸던 지명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서북쪽에는 사직단이 있던 당동 당집이 있고 서쪽 2km쯤에 오량역이었던 역촌마을이 있으며 역촌에서 남서쪽 고개를 넘어 5km쯤에 아주현이었던 아주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 태종 15년(1415년) 거창향교와 거제향교(현 향교정)가 각각 설립되었다가 세종 4년(1422년) 거제현민들의 환도로 인하여 거창현에 복속되므로 거제향교는 자연히 없어지게 되었다. 가조면 수월리 향교정 마을이 있으며 옛날 거제향교가 있었던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오량역촌은 거제현이 가조현으로 옮겨 오면서 역원들이 함께 왔기 때문에 가조면 서쪽에 오량역을 두었다고 한다. 그 위치는 가조면 장기리 역촌마을이다.
조선 순조 때의 거창부지, 고적 편에는 아주촌 부동(府東) 15리, 송변현 무촌역 남(南) 5리, 오량역 가조 서쪽으로 표기되어 있다. ‘오량’의 지명 어원은 우리나라 고어 ‘오랑’에서 뱃대끈, 즉 “안장이나 길마를 소나 말 위에 얹을 때 배에 조르는 줄”을 뜻하는 말이다. 역참의 제일 마지막 역인 오량역에서 “역마를 교체하고 다시 안장과 길마를 창착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오랑 → 오양(烏壤) → 오량(烏良)으로 명칭이 변하였다. 아주는 남하면 양향리에 아주마을이 있고, 그곳에는 거제골이라는 골짜기도 있었다.
거창으로 피난 온 이후의 거제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비록 현은 가조로 옮겨 육지로 떠난 인구는 관에 직접적으로 소속되었던 약 1 만 명 내외 사람들과 3현에 속한 일부의 주민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섬에서 생업을 이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중기 이후의 거제는 변방 유배지가 되었다.
거제현의 거창 가조로의 피현 이후에 거제도로 유배된 자를 살펴 보면, 충숙왕 8년(1339년)에 나계종(羅繼從)이 유배되고 이어서 공민왕 5년(1356년)에는 김보(金普)가 거제 송변현 가라산(加羅山) 방어소에, 공양왕 말기에는 나계유(羅啓儒)가 유배되었다.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 태조 3년(1394년) 승려 석능(釋能)이, 태종 1년(1401년) 고려 종성(왕씨), 태종 6년(1406년) 조수(曹守), 세종 즉위년(1418년)에는 이원강(李元綱) 조카 이말한 등이 거제도에 유배 왔다는 사실로도, 당시의 거제도에는 관리와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三京四都護八牧圖 참조 2)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 경상도, 거제현. 3) 《고려사》 권57,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거제현. 4) 《거제시지》, 2000, 제2장 거제행정 발달사, P.828. 5) 《거제시지》, 2000, 제3장 역사, P.368. 6) 《가조면지》, 2016, P.142~146 7) 고려사 권57,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거제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