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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 010. 고려 왕족들의 거제도 유배, 그 이후는?
고려시대 거제도는 수도 개경에서 최남단 도서지방으로서 변방이라는 인식이 강하였다. 그러한 지리적 위치에 의해 거제도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왕족과 지배계층의 정치적 유배지 중 하나였다. 고려시대~조선시대에 왜 거제도를 유배지로 정하였을까? 앞서 말했듯이 고려시대 개경 중심에서 보았을 때 가장 거리가 먼 서남부 도서지역을 유배지로 정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010. 고려 왕족들의 거제도 유배, 그 이후는?
- 박지은
 
 
거제도가 유배지가 된 이유
 
고려시대 거제도는 수도 개경에서 최남단 도서지방으로서 변방이라는 인식이 강하였다. 그러한 지리적 위치에 의해 거제도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왕족과 지배계층의 정치적 유배지 중 하나였다. 고려시대~조선시대에 왜 거제도를 유배지로 정하였을까? 앞서 말했듯이 고려시대 개경 중심에서 보았을 때 가장 거리가 먼 서남부 도서지역을 유배지로 정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교통시설이 좋지 않았던 고려~조선시대를 고려할 때 개경과 먼 도서지역으로의 유배는 한 개인으로 볼 때 정치적 고립뿐만 아니라 주변지인과 가정과의 고립을 초래하는 충격적인 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고려시대 행해지는 형벌의 단계 중 가장 무거운 형벌인 사형 다음으로 내리 는 형벌이 유배였다.
 
 
거제를 바라보는 고려인의 시선
 
유배지로서의 거제를 고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고려 사람들이 거제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짐작 가는 대목이 나온다. 역사를 편찬하는 사관의 지위에 있던 지인 이윤보가 좌천으로 거제현령으로 부임하자 안타까워하는 글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려시대 거제는 변방 그리고 유배지로서의 공간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이규보는 거제현을 최남방의 수중(水中) 섬, 독한 안개에다 찌는 듯이 무덥고 태풍이 끊이지 않는 곳, 여름에는 벌보다도 큰 모기떼가 주민을 괴롭히는 곳, 그래서 좌천당하거나 유배된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묘사했다. 1)
 
 
거제에 유배 온 사람들
 
거제도에 유배를 보낸 시기는 고려에서 조선까지 이어지는데, 고려시대 거제도로 유배 온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문종의 아들로 승려가 되었던 승통 왕탱은 유배 보내진 후 곧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는데, 유배의 이유로는 “남들에게 후히 베풀었기 때문에 이익을 탐하는 자들이 많이 붙었고, 결국에는 이로써 패망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2) 또한 1170년(예종 7년) 문종의 왕자 부여후 왕수가 거제현으로 이배되었다. 부여후 왕수가 왜 유배되었는지 기록으로 전하고 있지 않다. 그 외에도 이자겸의 난으로 이지언, 최이가 인사권 장악으로 경유가 거제로 유배 보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 거제 둔덕기성 정과정곡 비석
 
 
1112년 9월 14일(양) 병오 승통(僧統) 왕탱(王竀)을 거제현(巨濟縣)으로 유배 보냈다.
 
 
그리고 거제에서는 의종 5년(1151)에 동래로 유배 갔다가 거제로 유배지를 옮긴 정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유배지에서 다시 불러주지 않은 임금을 향한 마음을 거문고를 치며 불렀다는 〈정과정곡〉이 있다. 정서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하는 거제의 유배지는 둔덕으로 둔덕기성 앞에는 정서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비석이 있다. 정서는 후에 의종의 부름을 받지는 못하고 의종이 폐위된 이후 유배에서 풀려난다.
 
 
임금을 그리워하여 옷을 적시지 않는 날이 없으니
틀림없는 봄 산의 두견새일세.
사람들아, 옳고 그름을 묻지 마시게.
오직 새벽녘의 달과 별만이 알 뿐이리.3)
-정서의 〈정과정곡〉
 
 
둔덕 마을에 남아 있는 역사 한 자락
 
거제시 《둔덕면지》에 의하면 의종왕이 3년간 머물렀다는 둔덕기성이 있고, 둔덕면의 마을 이름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상둔리 옥동 마을은 의종왕이 쫒겨 왔을 때 죄인의 감옥이 있어 옥토라고 하며, 시목마을은 의종왕이 왔을 때 감나무를 많이 심어 감나무골이라 불러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거림리 마장마을에는 의종왕 호위군의 군마를 방목하여 마장마을이라고 전한다고 한다. 거제면 둔덕에 공주샘은 의종왕의 딸이 매일 찻물을 길어 대접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기도 한다. 방하리 고려무덤은 의종왕이 거제에 왔을 때 함께 온 고려 사람들의 무덤으로 불리는 곳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서울대 광중학교가 피난 와서 학교를 세웠을 때 그릇, 칼, 수저 등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지명에 대한 역사적 고증은 확실하지 않지만 거제 둔덕기성에 왕이 머물렀으며, 왕과 함께 많은 시종과 사람들이 따라왔다고 전하고 있다. 의종왕이 거제도로 건너올 때 지나온 견내량은 임금이 건넜다 하여 ‘전하도’로 불린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김광철, 〈고려후기 거제 지역사회의 변동과 巨濟縣의 이동〉, 《석당논총》 46, 2010년, P245~299.
2) 《고려사》 권90, 열전 권제3, 종실(宗室), 문종 왕자 도생승통 왕탱.
3) 《고려사》 권71, 지 권제25, 악2(樂 二), 속악, 정과정.
【문화】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 009. 고려시대 섬을 비워야 했던 공도정책(空島政策)
• 010. 고려 왕족들의 거제도 유배, 그 이후는?
• 011. 수장된 고려 왕족들을 위한 ‘견암사’ 수륙재(水陸齋)
(2024.09.05.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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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