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수장된 고려 왕족들을 위한 ‘견암사’ 수륙재(水陸齋) ― 고려 마지막 왕과 왕족들을 위로하고 국가의 안녕과 화합 기원 - 김해정
수륙재(水陸齋)란 불교에서 물과 육지에 훌훌 떠도는 영혼들과 악귀들에게 공양함으로써 고뇌를 제거한다는 법회이다. 조선 태조가 고려 왕족이 살해된 강화, 거제, 삼척에 명하여 고려 마지막 왕과 왕족들을 위로하고 국가의 안녕과 화합을 기원하기 위해 삼척의 삼화사와 강화도 관음굴, 거제현 견암사에서 수륙재를 지내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견암사는 거창 가조면 우두산 의상봉 아래 있는 고견사의 옛 이름이다. 당시까지는 거제현이 가조로 옮겨온 후 되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거제 앞바다에서 왕족이 수몰되었으나 수륙재는 거제현의 치소가 있던 가조의 견암사(고견사)에서 거행되었던 것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까지 당시 거제현 관아는 거제도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거창군내, 거제현(가조현)으로 존속하고 있을 때 거제현 내에 견암사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시행했던 의례로 국행수륙대재 봉행의례만 실행했던 것이 아니라 음식과 옷을 나누고 병을 고쳐주고 만민이 참석하는 큰 행사였다.1)
거창군 가조면에 있는 ‘견암사(見巖寺)’는 신라 30대 문무왕 7년(667년)에 원효·의상 대사가 창건하였다. 의상대사께서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전국을 순회하던 중 우두산에 도착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산세가 너무나 아름답고 수려하여 이곳에 산막을 치고 수도장으로 삼아 불법을 전도하고 신도가 많아져서 절을 지으니 이것이 고견사(古見寺, 견암사) 창건 역사이다. 고견사는 시대의 변천과 함께 그 이름도 견암(見庵)·견암사(見巖寺: 見庵寺)·견암선사(見庵禪寺)로 불리어 왔다. 《조선왕조실록》 권10 태종 5년(1405) 11월 초에는 ‘견암(見庵)’이라고 적혀 있다.
태종 14년 12월 초에는 거제 ‘견암사(見庵寺)’로 적혀 있고, 세종 6년(1424) 4월에는 경상도 거제 ‘견암사(見巖寺)’라고 적혀 ‘암자 암(庵)’이 ‘바위 암(巖)’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원종 12년(1271년)에는 고견사가 거제에 이속되어 거제 ‘견암사’로 불렸다. 조선 인조 8년(1630)에 설현(雪賢)과 금복(金福), 종해(宗海) 스님이 중건하면서 ‘고견사’로 개칭하였다.2) 또한 해인사를 창건할 때에 재정, 기술, 성물 등을 고견사에서 가져다가 건축하니 고견사를 해인사의 큰집이라 하였다. 해인사보다 135년이나 먼저 창건된 고사찰이다.3) 견암사의 규모가 크고 웅장 했으며 해삼사(海參寺), 동암사(東岩寺) 등의 절이 인근에 있었고 암자가 여럿 있었다고 전한다. “견암사는 가조현 우두산(牛頭山)에 있다”고 《고려사절요》 등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4) 거제도에도 둔덕면 우두산(우두봉) 아래 ‘견암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5)
조선 왕실에서는 고려 왕씨(王氏)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경상도 거제(巨濟) 견암사(見巖寺)에 밭 100결을 하사하고 대궐에서 향을 내려 매년 해마다 2월과 10월에 수륙재(水陸齋)를 지낸 원찰(原刹)이다. 해인사의 창건주 순응 ‘이정 스님’과 중창주 ‘희랑 대사’가 머물다 간 곳이며 조계종 본산 해인사 말사(末寺)이다. 고견사는 1988년 9월 전통사찰로 등록되었으며, 보물 고견사 동종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고견사 석불, 조선 숙종이 내린 강생원의 운영당(雲影堂) 현판이 있는 천년 고찰이다.6)
현재 거제에는 둔덕면 우두산에 조선시대 고찰 ‘견암사’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흔적도 없어 전통을 이어줄 사찰이 없음이 아쉬웠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가조면지》, 2016년. P.146~148 2) 《고려사절요》, 《목은시고(牧隱詩藁)》,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태종, 권10) 3) 고견사 동종 명문에 기록되어 있다. 4) 《조선왕조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거창조. 5) 《거제의 사찰을 찾아서》, 1998년, 거제문화원, P.143. 6) 고견사 사찰 안내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