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거제의 읍기를 수월에서 사등으로 옮기다 - 박광숙
수월평(水月坪)1)에 목책을 만들고 임시 거처를 만들고 소규모의 농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지냈으나 2년 만에 자리가 좁고 백성을 보호할 장소가 협소하여 사등으로 치소지를 옮기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경상도 감사 이자직은 거제현의 이전과 수호군의 증원에 따른 의견을 장계하고 있다.2)
삼가 경상도 감사와 경차관(敬差官) 이자직(李自直)이 장계한 바, 도내 거제현(巨濟縣)의 이전과 본현의 수호군(守護軍) 증원에 대한 편의 여부를 가지고 본조에서 의정부 및 여러 조(曹)와 더불어 같이 의논하여 이를 조열(條列)하여 아뢰나이다.
현재의 거제현 관청 소재지는 진실로 불가한 곳입니다. 농장이 협소하여 사람들이 모여서 살 수 없고, 지대가 낮고 습하며, 삼면에 산이 압림(壓臨)하고 있어 수호하기에 곤란합니다. 또 적의 배가 쉽게 들어올 수 있어 불측의 변란이 예측됩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안심하지 못하고 있고, 조석 사이에도 보장되기 어렵고 보니, 자못 이곳은 장구한 땅이 못 됩니다. 오직 고읍(古邑)의 지형은 읍(邑)을 설치할만하옵니다. 사월포는 농장이 넓고 기름질 뿐 아니라, 왜적도 돌입할 수 없어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실로 이익이 있을 것이오니, 청컨대, 금년 가을철에 성을 쌓고 고을 청사를 옮기도록 하소서.
하여 조정의 명으로 거제를 떠난 후 151년 만에 환도를 하고 세종 8년(1426년)에 사월포(현, 사등리)에 사등성을 쌓기 시작하여 1448년 에 완공하였다.
사등면 사등리 2300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사등성은 둘레 986m, 높이 3m로 평지성이고 1974년 2월 16일 지방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 었다. 1451년 도제찰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사등성의 규모는 둘레 1,916척(250m), 동국여지지·대동지지에는 2,511척 6촌(761m), 경상 도읍지·영남읍지·경상도여지집성에는 둘레 1,809척(548m)로 기록되어있다고 한다.3)
▶ 성내마을 항공사진
사등성은 동, 서, 남, 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는데 성문 앞에 ‘ㄱ’자 형태로 옹성을 두어 방어를 보완하고 있다. 성문 사이에는 앞쪽으로 돌출된 치성4)을 두고 있다. 사등성은 조선 초 규정에 따라 제대로 쌓은 읍성으로 옹성(甕城)5)이 조선 초기에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평사낙안의 평지에 쌓은 사등성은 거북이가 망치산을 향하여 산으로 올라가는 형상이다. 대리마을은 성을 쌓은 후 군합정을 지어 수군을 훈련시켰고 임진왜란 후 창녕조씨가 들어와 경원제와 정종사를 세워 큰 마을이 되어 대리라고 불렸다 한다. 또한 성을 쌓을 때 대리마을 오른쪽에 있는 산 반송대에서 돌을 채취하여 성을 쌓았다고 하며 반송대는 돌을 채취한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사등성은 북쪽과 서쪽의 성벽이 양호한 편이며 동쪽과 남쪽은 훼손이 심하다. 주택의 담벼락과 밭의 경계, 도로의 확장으로 구분이 어려우며 항공사진으로나마 그 형태를 짐작할 수가 있으며 사등성지 종합정비계획서의 〈사등성지 잔존 현황도〉를 보면 동문지(추정), 서문지, 남문지, 북문지 4개의 문지와 치1, 치2, 치3, 치4, 치5(추정) 5개의 치, 해자, 우물지, 장방형 수구, 건물지 기단석, 문지 등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각 체성별 축조 양식이 조금씩 다르다. 동문 쪽 구간에는 품(品)자 형식의 방식이나 나머지 구간은 장대석을 지대석으로 사용하여 그 위에 자연대석을 지대석으로 사용하고 쐐기돌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축조집단이 여러 지역에서 성을 쌓기 위해 동원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특히, 동문 치성 추정 부분과 수구 발견지점 사지에 ‘산음(山陰: 산청의 옛 지명)이 새겨져 있으며 사등교회 치성 성벽에는 ‘삼가시면 오십일척문말간 오십오척산음(三加始面 五十一尺門末間 五十五尺山陰)-삼가현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문 끝까지 51자를 쌓고, 산음 사람들은 55자를 쌓았다.’란 명문이 발견되었다.
(좌) 삼가시면 오십일척문말간(三加始面 五十一尺門末間) (우) 산음(山陰) 산청의 옛지명
사등성은 세종 8년(1426년)부터 성을 쌓기 시작하여 세종 30년(1448년)까지 22년의 대공사를 하였으나 성이 협소하고 물이 적다는 이유6)로 문종 1년(1451년) 고정부곡7)으로 치소지를 옮기고 성을 쌓기 시작하여 단종 원년(1453년)에 완공하게 된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수월천 따라 넓은 들판을 수월평 또는 한들이라 하였다.(《新巨濟地名總覽》, 거제문화원향토연구소) 2) 《신현읍지》 제7장 조선시대, 신현읍지편찬위원회/ 《세종실록》 27권 【태백산사고본】 9책 27권 29장 B면 3) 최대윤, 《성곽박물관 거게》, 거제신문사. 4) 적의 방어를 위해 성벽 일부를 외부로 돌출시켜 쌓은 부분. 5) 큰 성문 밖의 작은 성. 성문 밖에 부설하여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든든히 지키기 위하여 원형이나 방형(方形)으로 쌓은 성. 6) 영의정(領議政) 하연(河演), 좌의정(左議政) 황보인(皇甫仁), 우의정(右議政) 남지(南智), 좌찬성(左贊成) 김종서(金宗瑞)는 생각하기를, “성안에 샘이 매우 적어서 성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고여 둡니다. 청컨대 추수를 기다려, 지금 정한 성터 안의 샘의 근원과 산의 형세를 다시 살펴서, 만약 옮겨 설치하는 편리가 옛 성보다 갑절이면 옮겨 쌓게 하소서.”(《문종실록》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29장 B면) 7) 경남 거제시 거제면(巨濟面)에 있던 옛 지명. 현 고현동 일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