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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 015. 조선통신사의 주 경유지 지세포
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 일본의 실권자인 막부장군에게 파견한 양국 간 정상외교사절단으로, 무로마치시대 초기부터 에도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파견되었다. 사절단의 명칭은 ‘통신사’뿐 아니라 회례사, 회례관, 보빙사, 경차관, 통신관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즉 ‘통신사’ 란 명칭은 현재의 시점에서 역사적 용어를 사용한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015. 조선통신사의 주 경유지 지세포
- 황승화
 
 
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 일본의 실권자인 막부장군에게 파견한 양국 간 정상외교사절단으로, 무로마치시대 초기부터 에도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파견되었다.1) 사절단의 명칭은 ‘통신사’뿐 아니라 회례사, 회례관, 보빙사, 경차관, 통신관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즉 ‘통신사’ 란 명칭은 현재의 시점에서 역사적 용어를 사용한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여말선초부터 그 명칭이 사용되어 파견되기도 했지만, 조선시대 통신사의 개념에 준하는 사절단은 1419년(세종 1년) 대마도 정벌 이후부터 파견된 통신사로 볼 수 있다. 더불어 거제 사람으로서 주목할 부분은 조선 전기 15세기 삼포왜란 이전까지 거제도에서 출발 또는 경유했던 통신사와 삼포왜란으로 중단되었다가, 16세기 초 임진왜란 이후부터 동래현 부산포에서 출발한 통신사로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부산포 출발의 이유는 선박의 기능과 축적된 항해술 발전이 한몫했으며 또한 육지에서 일본으로 가는 가장 빠른 여정이었기 때문이다.)2)
 
조선통신사 일행은 대마도 호위선단을 제외한 상사(上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 수행원, 격군을 포함, 100여 명에 2~4척의 선단으로 꾸렸는데, 조선 후기에는 400여 명에 6척의 선단이나 되었다.3) 조선통신사의 경로는 한성에서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쓰시마, 이키, 오사카로 이어졌다. 그러나 거제도 지세포에서 출발했다는 기록도 많이 찾을 수 있다.
 
 
조선통신사와 거제도(지세포)
 
거제도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이전부터 수군 진영을 구축하기 시작해 조선 태종 때 이미 수군 인원만 4천 명이 넘었다.4) 여말선초 3차례의 대마도 정벌은 모두 거제도 해상을 이용했다. 첫 번째는 1389년(고려 창왕 2년)에 박위가, 두 번째는 1396년(조선 태조 5년)에 김사형이, 세 번째는 1419년(세종 1년) 이종무가 이끌었다.5) 더불어 거제도 지세포는 1443년(세종 25년) 계해약조 이후 대마도 왜선들이 고초도(거문도)나 여서도(완도군)로 고기잡이를 올 때 문인(文引)을 확인하고 어세를 징수하였다. 징수한 어세는 통신사 접대비용으로 사용되었다. 6) 즉, 조선통신사가 거제도에서 출발 또는 경유해서 대마도로 출발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거제도 지세포에서 출발했을까? 거제도는 고대부터 이미 일본으로 가는 해상로의 경유지였다. 그 이유는 지금처럼 선박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연의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 방법이 쓰시마 난류와 편서풍을 이용해 대마도로 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말선초, 15세기 대부분의 조선통신사 또한 지세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거제도 지세포(지세포 만호)
 
지세포는 1441년(세종 23년) 만호를 두어7) 1894년까지 이어진다.8) 아래처럼 지세포 만호는 세종 때부터 쓰시마 사람들의 어업 활동을 규제 또는 허가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조선의 개항 직전까지 이어졌다. 앞에서 말했듯 징수한 어세는 통신사 접대비용 등으로 지출되었다.
 
 
〈김영유에게 대마도의 고기 잡는 왜인들에 대한 사항을 자세히 보고하라 명하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영유(金永濡)에게 하서(下書)하기를,
“대마도(對馬島) 고기 잡는 왜인들은 도주(島主)의 삼착 도서 문인(三着圖書文引)을 받아서 지세포 만호(知世浦萬戶)에게 교부하여, 만호의 문인(文引)을 받아 가지고 고초도(孤草島)에 가서 고기를 잡고 돌아와서 지세포에 이르러 만호의 문인과 어세(魚稅)를 바친 뒤에, 만호가 도주의 문인에 회비(回批)하고 인(印)을 찍어서 돌려주어 보내는데, 이것이 전례이다.” 9)
 
 
조선통신사의 출발지(경유지) 지세포
 
조선통신사의 출발지 또는 기착지(목적지로 가는 도중 잠시 들르는 곳)로서 거제도를 이용한 것은 15세기 대부분이다. 이때 조선통신사는 거제도 지세포항구에서 유숙 후 대마도로 출발했다. 거제도 지세포는 조선통신사가 머무르는 곳이었기 때문에 객사, 관청, 세관, 객주, 여행객을 위한 기방, 의원, 조선소, 선박 정박지에 시설물 등이 생겨나고 거류 왜인들도 생겨났다. 또한 수군들이 살던 마을도 형성되어 세조에서 성종 시기 그 번창함이 절정을 이룬다.10)
 
 
〈출처: 구글지도〉
 
 
조선통신사의 노정
 
 
▶ 1764년 통신사행의 노정(〈우리역사넷〉)
 
 
조선 초기 통신사의 여정은 한양에서 출발해 다시 한양으로 돌아 가는데 7개월에서 11개월이 걸렸다. 조선 전기(15세기) 통신사는 거제도 지세포 바닷길로, 조선 후기(16세기~) 통신사는 부산포 바닷길로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까지 다녀왔다.
 
현대에도 바닷길을 이용한 대마도 여행은 부산에서 출발해 이즈하라와 히타카츠로 간다. 육지에서 대마도까지 가장 빠른 길이 부산포에서 출발하는 여정(49.5km)이고, 조선 후기의 여러 실정과 맞아서 거제도 출발 통신사 행렬은 중단되었지만, 이것은 조선 전기의 상황에선 가장 적합한 곳이 거제도 지세포였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조선통신사행렬도.
2) 고영화, 〈15세기 조선통신사 거제도에서 출발하다〉 1편, 2015.
3) 고영화, 〈15세기 조선통신사 거제도에서 출발하다〉 1편, 2015.
4) 고영화, 〈15세기 조선통신사 거제도에서 출발하다〉 1편, 2015.
5) 위키백과, 대마도 정벌.
6) 고영화, 〈15세기 조선통신사 거제도에서 출발하다〉 1편, 2015.
7) 《세종실록》 94권, 세종 23년 11월 22일 을묘 1번째 기사(1441년)
8) 고영화, 〈15세기 조선통신사 거제도에서 출발하다〉 1편, 2015.
9) 《성종실록》 47권, 성종 5년 9월 23일 을해 2번째 기사(1474년)
10) 고영화, 〈15세기 조선통신사 거제도에서 출발하다〉 1편, 2015.
【문화】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 014. 거제의 중심 고현동의 역사
• 015. 조선통신사의 주 경유지 지세포
• 016. 조선 전기 일본의 침략과 하청전투
(2024.09.0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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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