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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 016. 조선 전기 일본의 침략과 하청전투
삼포왜란과 관련한 하청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삼포개항과 계해약조, 삼포왜란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알 필요가 있다. 그래서 먼저 삼포개항부터 알아보려고 한다. 삼포란 세 개의 항구를 말한다. 그 세 곳은 진해 웅천의 내이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를 말하는데 아래와 같다.
016. 조선 전기 일본의 침략과 하청전투
- 황승화
 
 
삼포왜란과 관련한 하청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삼포개항과 계해약조, 삼포왜란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알 필요가 있다. 그래서 먼저 삼포개항부터 알아보려고 한다.
 
 
삼포개항
 
삼포란 세 개의 항구를 말한다. 그 세 곳은 진해 웅천의 내이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를 말하는데 아래와 같다.
 
삼포개항은 1426년(세종 8년)에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종정성)의 청에 따라 기존에 개방했던, 웅천(진해)의 내이포(乃而浦), 부산포 이외에 울산의 염포(鹽浦)를 추가로 개항하고 일본인의 교역을 허락한 일을 말한다.1)
 
1419년(세종 1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후,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종정성)의 요청으로 1426년(세종 8년)에 삼포를 개항하고 삼포에는 각각 왜관을 두어 왜인 60명의 거주를 허락하였다.
 
 
▶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계해약조
 
계해약조는 1443년(세종 25년)에 신숙주가 통신사 서장관으로 동행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주와 맺은 조약으로, 그 내용은 조선은 매년 오는 정기 무역선의 수를 50척으로 제한하고, 대마도주에게는 해마다 쌀과 콩을 합하여 200석을 주기로 하였다. 대마도주가 만일 부득이하게 보고할 일이 있으면 특송선을 보내게 하였다.2) 이것은 대마도주에게 왜구 문제에 대한 관리와 책임을 부여하는 대신 그에게는 여러 특권을 주어 왜구 문제를 안정시키려는 장치였다.
 
 
삼포왜란의 배경
 
1443년(세종 25년) 계해약조 이후 성종 대와 연산군 대를 거쳐오면서 대마도 사람들은 엄격한 무역 통제정책과 국가재정 부실로 인한 접대규정 위반사례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왜관 일본인들의 법규 위반과 왜구의 약탈행위가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조약상 삼포에 있는 왜관은 일시적 거주만 허락된 곳이나 항상 머무르는 일본인인 항거왜인(恒居倭人)들이 늘어나고, 항거왜인(恒居倭人)들은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어 삼포왜란의 핵심세력이 되었다.3)
 
 
삼포왜란 발발
 
삼포왜란은 1510년(중종 5년)에 발생한 왜인들의 반란을 말한다. 앞에서 말했듯, 삼포에는 60명의 왜인들이 거주할 수 있고, 면세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세종 말년에는 왜인 거주자가 60명에서 2,000명 으로 늘었고, 다양한 문제가 드러났다. 대마도주는 자신들의 자치조직을 만들어 공물을 받아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종반정으로 조정의 분위기가 바뀌고 정치개혁을 추진한 중종은 삼포에 대한 혜택을 용납하지 않았다. 60명을 초과한 인원 철거를 요구하고, 원래 정했던 법규를 엄격하게 적용하게 된다. 이에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은 왜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1510년(중종 5년) 4월 4일 왜인 약 4,000~5,000명이 거제도를 공격했다. 이들은 웅천성(진해)을 포위하여 근처를 분탕질하고, 제포(진해) 첨사 김세균을 납치했다. 부산포(동래)와 염포(울산)에 있던 항거왜인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조선에서는 유순정을 도원수로 임명하고 황형을 경상좌도 방어사, 유담년을 경상우도 방어사로 삼은 후 관군 5천 명을 보내 진압을 시도했다. 일본인들은 부산 첨사 이우증을 살해한 후 퇴각했다. 삼포왜란은 15일 만에 진압되었고, 조선 전사자는 272명, 796호의 집이 불탔다. 일본은 선박 5척이 소실, 295명이 사망했다.4)
 
 
삼포왜란의 결과
 
삼포왜란 후 대마도와의 교류는 즉시 중단되었다.
 
 
삼포왜란과 하청
 
1510년(중종 5년) 4월 4일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는 왜선 1천여 척을 거느리고 거제도 영등포로 침입을 기도하였지만 영등포 군민들이 격퇴하였다. 같은 달 병신일에 왜구들은 병력의 반을 주물도에 주둔시켜 거제현을 계속 공격하고, 나머지는 웅천, 부산포로 이동시켰다.5) 1510년(중종 5년) 4월 5일 밝을 녘 왜구들이 큰 배 5척을 타고 하청리에 도착하였다.
 
거제 현령 오세한(吳世翰)이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쫓아 나가니, 왜적 1백여 명이 육지로 내려와 민가를 수색하였다. 왜적이 화살을 맞고 바다에 떨어졌으므로 쫓아가 목을 베지는 못하였다. 적선 4척은 ‘멀리 바다 가운데로 들어갔으므로 쫓아가 잡지 못하였다. 적들이 버린 기물이 대단히 많았다.’라고 김석철이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틀 뒤 하청을 비롯한 거제현은 함락돼 왜구의 거점이 되었다.6)
 
1510년(중종 5년) 4월 15일(경자)에 성희안은 거제와 수영 쪽으로 공격하여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황형(黃衡). 유담년(柳聃年)을 경상좌우도 방어사로 임명하여 이를 반격하여 왜구를 대파하였다. 곧 삼포의 일본인 거류민도 추방하였다. 따라서 조선과 일본의 교통도 중단되었다. 이후 일본 아시카가막부의 재수교 요청에 따라 계해조약을 개정하여 새로 임신조약을 체결하고 내이포만을 개항하였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위키백과 〈삼포개항〉.
2)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삼포왜란의 배경.
3)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삼포왜란.
4)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삼포왜란.
5) 하청면지편찬위원회, 전갑생, 《하청면지》, 2009. 5. 31. 도서출판 선인, P.183.
6) 하청면지편찬위원회, 전갑생, 《하청면지》, 2009. 5. 31. 도서출판 선인,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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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