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조선 수군의 기쁨 ‘옥포해전’ 그리고 거제는? - 송재식
임진왜란 중 거제에서 일어난 주요 3대 해전은 조선 수군의 기쁨이었던 옥포해전(1592. 5. 7)과 영광이었던 견내량해전(한산대첩, 1592. 7. 8) 그리고 눈물이었던 칠천량해전(1597. 7. 14~16)이라고 할 수 있다.
▶ 거제의 환란, 임진왜란 3대 전투
옥포해전은 1592년 5월 7일 정오에 옥포에 정박하여 거제지역을 약탈하고 있던 왜선 30여 척 중 26척을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격파하고 왜군을 수장시킨 전투로 임진왜란 승리의 원동력이 된 전투로서 조선의 백성들에게 희망의 신호탄이 된 전투였다. 옥포해전을 위한 이순신 장군의 1차 출정에 대해 알아보겠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5월 4일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포함 총 85척을 이끌고 여수 본영을 출발한다. 이때 일반 어선인 포작선을 46척이나 이끌고 간 것은 멀리서 보면, 전선인지 어선인지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에 위장전술용으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순신 함대는 소비포(고성 하일면)에서 1박을 한 후에 당포(통영 산양읍)에서 원균 함대(판옥선 4척, 협선 2척)와 합류한 후 1박 후 거제 송미포(거제 율포 추정)1)에서 1박 후 가덕도로 가려고 하였으나 사도 첨사 김완이 옥포지역에 적선 30여 척이 정박해 있음을 신기전으로 알려와 양지암을 돌아 옥포에서 기습공격으로 적선 26척을 격파하였다.
▶ 조선 수군 연합함대 옥포대첩 경과도
이후 영등포에서 휴식을 취하려 하였으나 다시 합포지역에 적이 있다는 신기전이 올라와 적선 5척을 격파하고 남포에서 1박을 한 후 다시 적진포에서 적선 11척을 격파하였다. 이순신 장군 1차 출정에서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거제를 한바퀴 돌며 적선 42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첫 승리를 함과 동시에 조선의 백성들에게 우리도 왜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육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는 동기가 되었다.
옥포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은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육지로 올라온 왜군 1,500여 명이 거제 곳곳을 약탈하였고, 조정의 명에 의거 김준민 현령과 관군 200여 명이 진주성 방어에 투입됨으로써 비어 있던 거제읍성(고현성)이 점령당하였다. 거제 현령과 관군이 진주로 감에 따라 거제는 의병들이 조직되어 항쟁하기 시작하였다.
5월 7일 승판치(현 옥포중앙공원 덕포 쪽)에서 기습공격을 하여 적의 진격속도를 늦추었고, 5월 8일은 송정고개와 열녀천과 밀바대(연초 아우름센터 부근)에서 적에게 피해를 주었으며, 5월 10일에는 가조도와 서갈곶(청포) 쪽으로 온 지원군이 고현성으로 공격해왔다.
윤승보 성주는 고현성을 방어하다 장렬히 전사하였고, 고현성을 지키던 삼 장사(신응수, 윤영상, 김희진)는 계룡산, 국사봉, 앵산 등지에 숨어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진주성 1차 전투 후 패전한 적선(賊船)들이 거제에 가득히 밀려들어 남아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고 성책 (울타리)을 많이 설치한 다음 영등포, 지세포, 옥포 등을 나누어 점거하였다.2)
옥포해전과 진주성전투 후 거제는 일본이 점령하였으며 한때 5~6천여 명의 왜군이 주둔하였다. 뿐만 아니라 송진포왜성과 영등 왜성, 장문포왜성을 거제현민을 동원하여 쌓았고, 견내량왜성은 정유재란 때 쌓았다. 거제의 인구는 임진왜란 전에는 2만여 명이었으나 임진왜란 후에는 죽거나 타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일본으로 끌려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가 수천 명만이 남았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김일룡, 〈임진왜란과 옥포해전 연구〉, 《統營文化》 2021년 제22호, 통영문화원 P.46~47. 2) 《선조실록》 52권, 선조 27년(1594년 갑오년/ 명 만력 22년) 6월 20일(정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