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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 018. 옥포해전 출전 경로와 송미포(松未浦)는 어디일까
옥포해전은 경상우수사 원균(1540~1597)과 전라좌수사 이순신(1545~1598)의 연합함대가 협력하여 싸운 최초의 연합전투이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자 희망의 신호탄이었다. 그동안 옥포해전 출전 경로를 두고 전라좌수영 수군과 경상우수영 수군이 고성 당포(唐浦) 앞바다에서 합류한 후 거제도 북쪽 해역을 돌아 옥포에 이르렀다는 북로설(北路設)과 거제도 남쪽 해역을 경유했다는 남로설(南路設)로 나뉘어져 그와 관련한 많은 연구가 있었다.
018. 옥포해전 출전 경로와 송미포(松未浦)는 어디일까
- 송재식
 
 
옥포해전은 경상우수사 원균(1540~1597)과 전라좌수사 이순신(1545~1598)의 연합함대가 협력하여 싸운 최초의 연합전투이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자 희망의 신호탄이었다.
 
그동안 옥포해전 출전 경로를 두고 전라좌수영 수군과 경상우수영 수군이 고성 당포(唐浦) 앞바다에서 합류한 후 거제도 북쪽 해역을 돌아 옥포에 이르렀다는 북로설(北路設)과 거제도 남쪽 해역을 경유했다는 남로설(南路設)로 나뉘어져 그와 관련한 많은 연구가 있었다. 이렇게 북로설과 남로설로 나뉘게 된 이유는 이순신 장군의 〈옥포파 왜병장〉에 “두 도(道)의 장수들을 한데 불러 모아 적정에 관한 정보 를 교환하고 수차례 약속을 거듭한 후 당포 앞바다에서 발선하여 거제도 송미포(松未浦)에 이르러 해가 저물어 밤을 지냈다”1)고 기록되어 있어 송미포에 대한 비정(比定)이 학자마다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제군지》2)와 《거제시지》3)에는 송미포를 송진포(장목)로 비정하여 북로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거제문화원에서 발간한 《거제지명총람》4)과 이봉수의 《이순신이 싸운 바다》5)에는 송미포를 남부면 다대리로, 임원빈의 〈옥포해전의 경과와 의의〉6)에는 갈곶리(남부면)로, 정진술의 《조선 수군 임란초기대응 연구》에는 저구리(남부면)로, 김일룡의 〈임진왜란과 옥포해전 연구〉7)에는 율포리(동부면)로 비정하여 남로설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까지 학계에서는 남로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임진장초》8)에는 “거제도 송미포 앞바다에 이르러 날이 저물어 밤을 새우고 5월 7일 새벽에 일제히 발선하여 적선이 정박하고 있다는 천성 가덕으로 지향하다가 정오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송미포에서 가덕으로 가는 해로의 중간에 옥포가 있음을 알 수 있어 남로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본문에서는 당포에서 출발하여 한산도 북측을 통과하여 거제도 남단으로 이동하였는가? 아니면 한산도 남쪽을 통과하여 거제도 남단으로 이동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5월 6일 정박한 ‘송미포(松未浦)’가 거제도 어디이며, 안방준의 《은봉전서》9)에 기록된 도슬포(島瑟浦)는 어디인가에 대해 김일룡 통영문화원장이 2021년 《통영문화》에 연구 발표한 논문 〈임진왜란과 옥포해전 연구〉를 토대로 비정(比定)한 결과를 제시하고자 한다.
 
 
▶ 옥포해전 출전 경로도(1592. 5. 4~5. 7)
 
 
위 ‛옥포해전 출전 경로도’는 5월 4일부터 5월 7일까지 옥포해전 출전 경로설(設) 3개를 표시하였다, 경로 1은 북로설로 송미포를 송진포로, 경로 2는 남로설로 송미포를 다대리 또는 갈곶리로, 경로 3은 남로설로 송미포를 율포, 도슬포를 저구로 비정한 것을 표시하였다. 본문에서는 ‘경로 3’을 비정한 이유와 출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옥포파왜병장〉에는 “당포 앞바다에서 발선하여 거제도 송미포에 이르러 해가 저물어 밤을 지냈다”고 했으며, 《은봉전서》에는 “5월 6일 한산도 북쪽 해역을 지나 거제 도슬포에 이르렀다”10)고 했다. 위의 ‘송미포’와 ‘도슬포‘는 그 위치가 정확히 규명되지 않은 임진왜란 지명 가운데 하나이다.
 
송미포는 옛 송변현(松邊縣)의 치소였으며 현재까지도 ‘송곶이마을’, 또는 ‘솔곶이’로 속칭하는 율포(栗浦)의 옛 지명이다.11) 오늘날의 율포리에는 옛 율포진과 관련한 ‘율포산성’, ‘솔도지진터’, ‘동헌 (東軒)터’, 전선(戰船)이 정박했던 포구인 ‘전선창개(진선창개·송고지개·솔오지선창머리)’라는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소나무가 울창한 해변이라는 뜻의 송변현(松邊縣)과 관련된 토박이 지명으로는 솔오지마을 송곶(松串), 솔오지개, 솔구등, 솔티골 등이 구전되고 있다.
 
 
그리고 도슬포는 도야지(돼지)의 옛말인 ‘돗’에서 유래한 토박이 지명 ‘도토구미’(돗구미)의 한자 지명이다.12) 남해안의 전래 토박이말에서 ‘구미’는 해안의 포구(浦口)를 말하고 ‘구지’는 육지의 곶(串)을 칭하는 방언임을 감안하면 ‘토도구미’를 도슬(島瑟·돗)+포(浦·구미)라 칭한 것으로 해석된다.13) 선후기·저구미(豬仇未·猪仇味)와 저구포(猪仇浦)로 각각 변천된 송미포와 인접한 현 저구(猪仇)의 옛 지명이라 하겠다. 즉 ‘도슬’은 도야지(돼지)의 옛말인 ‘돗’의 음(音)을 차용하고, ‘포’는 포구의 방언인 ‘구미’의 뜻을 차용하여 도슬포(島瑟浦)라 표기한 한자 지명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의 동리명은 저 구미리(猪仇未里·猪仇味里)14)였으며, 1899년에 저구리(猪仇里)15)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도슬포(島瑟浦, 도토구미·돗구미) → 저구미(豬仇未·猪仇味) → 저구포(猪仇浦)로 각각 변천된 지명이라 하겠다.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6일 당포 앞바다에서 출발하여 한산도 북쪽 해역을 따라 왜적들이 있다는 천성과 가덕으로 향하다가, 옥포 근해에 왜적이 내침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견내량 해협 입구에서 항로를 급선회하여 거제도 남단으로 향했다고 추측된다. 또한 당시 전라 좌수영 수군들과 경상우수영 수군들이 송미포 한 곳에 정박했다기보다는 전라좌수영 수군들은 송미포(율포만) 앞바다, 그리고 경상우수영 수군들은 도슬포(저구만) 앞바다에 각각 결진하고 밤을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16)
 
송미포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으로, 이순신의 《난중일기》 병신년(1596) 8월 11일 초저녁 거제가 급히 보고하기를 “왜선 1척이 등산(登山)으로부터 송미포(松未浦·松美浦)17)로 들어왔다.”고 하더니 밤 10시경에 다시 보고하되, “아자포(阿自浦)로 옮겨대었다.” 하므로 배를 정하여 내어보낼 즈음 다시 보고가 오기를 “견내량(見乃梁)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복병장에게 잡으라고 했다.’18) 여기서 등산(登山)은 대동여지도 거제부를 보면 지금의 망산자리에 등산망(登山望)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조선지도 거제부에도 같은 표기를 볼 수 있다. 따라서 등산은 현재의 남부면 망산(望山)을 지칭한다.
 
 
(좌) 대동여지도 거제부(등산망, 登山)
(우) 조선지도 거제부(1789~1795년 제작)
 
 
또한 아자포(阿自浦)는 거제면 법동리 아지랑포를 지칭한다.19) 이 기사를 분석하면 왜선은 등산(登山, 망산) 앞바다 → 송미포(율포) → 아자포(아지랑포) → 견내량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아 송미포는 망산 과 아지랑포 사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위의 《난중일기》 기사에 의한 왜선의 이동 경로는 거제도 서남단에 있는 등산(망산) 인근의 남부면 해역에서 동부면 송미포(율포) 앞바다(율포만)로 들어와 거제만 입구의 아자포(아지랑포), 그리고 현 둔덕면 해역을 경유하여 사등면의 견내량 해협을 경유하여 거제도 북쪽 해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해석된다.
 
 
▶ 《난중일기》 병신년 8월 11일 왜선 이동로
 
 
안방준의 유고를 후손들이 후대에 정리하여 펴낸 《은봉전서》는 비록 관찬 사료가 아닌 개인 문집이지만 1차 출전 경로상의 구체적인 지명을 순차적으로 거론하고 있어 남로설을 뒷받침해 줄 뿐만 아니라 당포에서 발선하여 한산도 북쪽 해역을 경유하여 거제도 서쪽 해협으로 항진했음을 밝힌 유일한 문헌이다.
 
결론적으로 옥포해전의 출전 경로는 〈옥포파왜병장〉, 《임진장초》, 《은봉전서》 기록 등을 종합해 볼 때 5월 4일, 전라좌수영 본영 → 남해도 평산포 → 상주포 → 미조항 → 소비포·사량도 → 5월 5일 당포 → 5월 6일 한산도 북쪽해역 → 거제도 송미포·도슬포 → 5월 7일 조라포(현 구조라) → 지시포(현 지세포) → 양암지협(현 능포동 양지암) → 옥포로 정리된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李忠武公全書》, 〈玉浦破倭兵狀〉, “兩道諸將招集一處 再三申明約束後 至巨濟島松未浦前洋 日沒經夜”
2) 《거제군지(巨濟郡誌)》, 〈거제의 역사〉, 옥포해전, 1964.
3) 《거제시지(巨濟市誌)》, 〈거제의 역사〉, 옥포해전, 2002.
4) 《거제지명총람》, 거제문화원, 1996.
5) 이봉수, 《이순신이 싸운 바다》, 2004.
6) 임원빈, 〈옥포해전의 경과와 의의〉, 《이순신 연구논총》, 2019.
7) 김일룡, 〈임진왜란과 옥포해전 연구〉, 《統營文化》 2021년 제22호, 통영문화원, P.21.
8) 《壬辰狀草》 “至巨濟島松未浦前洋。 日沒經夜。初七日曉頭。 一時發船。指向賊船留泊之天城, 加德。 午時至 玉浦前洋.”
9) 안방준, 《隱峯全書》: 조선 중기의 학자 안방준(安邦俊)의 문집, 1864년(고종 1년) 저자의 후손이 간행.
10) 안방준, 《隱峯全書》 “初六日 過閑山島北 次干巨濟之島瑟浦.”
11) 《嶺南邑誌》 巨濟府邑誌 坊里編 邑內面條, 栗浦卽舊松邊.
12) 《거제지명총람》, 1996, P.56/ 《신거제지명총람》, 2019, P.196
13)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구복리 저도(猪島, 돗섬)의 용례가 있다.
14) 〈戶口總數〉 1789. “巨濟 邑內面 猪仇未里/ 《慶尙都邑地》, 1832, 巨濟 邑內面 邑內面 東部十四坊猪仇味.”
15) 《거제부읍지》, “東部二十二坊 猪仇里.” 1899.
16) 김일룡, 〈임진왜란과 옥포해전 연구〉, 《統營文化》 2021년 제22호, 통영문화원, P.46~47.
17) 《난중일기》 丙申八月十一日/ 〈옥포파왜병장〉, 松未浦/ 《이충무공전서》 卷之七 日記, 丙申八月 十一日, 松美浦.
18) 《난중일기》 “丙申八月十一日丙午 晴...初更巨濟馳報內 倭賊一船自登山由入松未浦 二更又報阿自浦移泊整.” “船出送之際 又報日見乃梁踰越云”
19) 《거제지명총람》, 1996, P.39/ 《신거제지명총람》, 2019, P.221~222.
【문화】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 017. 조선 수군의 기쁨 ‘옥포해전’ 그리고 거제는?
• 018. 옥포해전 출전 경로와 송미포(松未浦)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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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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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