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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 019. 임진왜란 거제 의병의 넋이 깃든 거제읍성 ‘고현성(古縣城)’
거제는 한반도 남해안 방어의 최전선 역할을 한 군사적 요충지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외세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다양한 성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거제에는 현재 우리가 쌓은 성 20개, 왜구가 쌓은 성 4개 등 모두 24개의 성곽 유적 및 그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으며, 단일 섬 지역에 이렇게 많은 성곽이 잔존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사례로 알려져 있다.
019. 임진왜란 거제 의병의 넋이 깃든 거제읍성 ‘고현성(古縣城)’
- 송재식
 
 
거제는 한반도 남해안 방어의 최전선 역할을 한 군사적 요충지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외세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다양한 성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거제에는 현재 우리가 쌓은 성 20개, 왜구가 쌓은 성 4개 등 모두 24개의 성곽 유적 및 그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으며, 단일 섬 지역에 이렇게 많은 성곽이 잔존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사례로 알려져 있다. 이 중 12개의 성곽 유적(고현성, 사등성, 둔덕기성, 오량성, 구조라성, 다대산성, 가배량진성, 지세포진성, 구율포성, 구영등포성, 옥포진성지, 장문포왜성)은 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나머지는 성곽의 훼손이 심해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거나 이미 소멸된 상태다.1)
 
고려 원종 12년(1271년)에 거제 주민들은 왜구의 잦은 침략과 삼별초의 난 등을 피해 거창 가조현과 진주 영선현으로 피난 가게 되었으며 151년 만인 세종 4년(1422년)에 거제로 돌아와 수월리〔심포(深浦)〕에 목책을 설치하고 살다가 세종 8년(1426년) 사등성 축조를 시작하면서 관아를 사등성으로 옮겨 살았으나, 1449년 부임한 거제 현령 이호성(李好誠·1397~1467년)은 사등성의 지형이 협소하고 동남쪽의 방비가 제한되어 고현으로 읍을 옮기고 고현성을 새로 쌓았다.2)
 
 
▶ 1453년 지어진 고현성은 1663년 거제면으로 옮겨질 때까지 210년 동안 거제의 대표 읍성
 
 
고현성은 문종 원년(1451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단종 원년(1453년)에 완성하였다. 이때 6개 지역(진해, 사천, 곤양, 진주, 청도, 영천)에서 도민 2만여 명을 동원하였으며, 석축 둘레 3,038척(921m), 높이 13척(약 4m), 성문 3개소(동·북·남), 샘물 3개소, 연못 2개소, 집 40여 채가 있었고 황취루(현 계룡루) 누각이 객관과 마주한 북쪽, 향교는 성 서문 북쪽(현 청소년수련관 위치), 사직단은 성 서쪽, 성황사는 고현성 남쪽 1리, 여제단은 현 북쪽에 조성하였다.3)
 
 
(좌) 고현성 추정도: 배(船) 모양
(우) 2022년 고현성 일대 모습
 
 
고현성은 계룡산 기슭의 동쪽으로 뻗은 대지 위에 평면의 배 모양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성의 동, 남, 북 3곳에 성문을 세웠으며 성 문 앞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옹성을 쌓았고 적을 관측하고 공격하기 위해 돌출시켜 쌓은 치(雉)를 만들었으며, 성 둘레에는 못을 파서 물이 흐르도록 하는 방어시설인 해자를 설치했는데 북쪽과 남쪽에는 자연적으로 있던 하천을 해자로 사용했고 동쪽에는 인공적으로 해자를 만들었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패한 왜군 1천5백여 명은 육지로 올라와 거제읍성으로 진격하였으며, 이때 거제현령 김준민의 관군 300여 명과 의병장 제인국이 이끄는 의병 200여 명은 송정고개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고, 거제 삼장사(三將士)로 불리는 신응수(辛應壽), 윤영상(尹榮祥), 김희진(金希璡) 등 의병장의 활약으로 승전을 거둔다. 하지만 거제 현령 김준민은 진주성 방어의 명령을 받아 거제 의사 이언량 등 3백여 명의 관군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출동하였다.
 
왜군은 읍성에 관군이 없음을 알고 공격을 하였으며 거제의 현민 모두가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읍성 수호를 독전하던 성주 윤승보가 전사하고 거제 읍성은 함락되고 불타고 말았다. 함락 당시 고현성을 방어한 의병은 일반 백성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들은 왜군과의 전투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거제시 청사와 시민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고현성에는 이들을 위한 위령비조차 없는 것이 안타깝다.
 
1950년 한국전쟁 때 UN군 포로수용소를 건설하면서 고현성 성벽 대부분의 돌을 비행장, 도로, 건축자재 등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고현성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성은 서쪽과 남·북쪽의 일부로 둘레는 818m(평균 높이 2m, 폭 5.5m) 이다.
 
2006년 북문을 복원하면서 누각의 이름을 시에서는 시민들에게 공모하여 ‘계룡루’라고 명명하였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황취루(黃翠樓)’로 명명되어 있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최대윤, 《성곽박물관 거제》, 2021, 거제신문, P.46~51.
2)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1월 13일 임인 6번째 기사〔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3) 《신증동국여지승람》 32권, 경상도 거제현, 1530년(중종 25년), 이행 등 증보판
【문화】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 018. 옥포해전 출전 경로와 송미포(松未浦)는 어디일까
• 019. 임진왜란 거제 의병의 넋이 깃든 거제읍성 ‘고현성(古縣城)’
• 020. 조선 수군의 영광 ‘견내량해전(한산도대첩)’
(2024.09.0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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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