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조선 수군의 영광 ‘견내량해전(한산도대첩)’ - 송재식
우리가 알고 있는 ‘한산도대첩’의 원래 명칭은 ‘견내량해전’이다.1) 이는 이순신 장군이 선조 임금에게 보낸 장계 〈견내량파왜병장〉에서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해전의 이름은 전투가 최초 일어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옥포해전이나 사천해전, 합포 및 적진포, 당포해전도 마찬가지로 전투가 최초 일어난 지역의 이름을 붙여 명명하였다.
육상에서 항상 승리하였던 일본은 해전에서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해 육군까지 동원하여 조선 수군을 격파하도록 하였다. 와키자카는 용인전투에서 쉽게 이기고 6월 19일 웅천으로 내려왔다. 7월 6일에 82척을 거느리고 견내량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7월 6일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우수사 이억기는 함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경상우수사 원균 함대와 합류하였다.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7월 7일 저녁 당포 앞바다에 진출하여 일본 수군이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7월 8일 아침 조선 수군 함대는 당포 앞바다에서 견내량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함대의 위치를 확인하고 전투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견내량은 포구가 좁고 암초가 많은 해협이라 조선군의 대함인 판옥선이 기동하기 곤란한 곳이었다. 이에 조선 수군은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판옥선 몇 척을 견내량 쪽으로 접근시켜 일본군을 자극하였다. 이미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던 일본 수군은 모두 출항하여 조선군 함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유인에 성공한 조선 수군은 일제히 선수를 돌려 학익진을 펼쳐 일본 함대를 포위하고 일본군 선단의 중앙으로 거북선을 돌격시키면서 화포사격을 가하여 여러 척의 일본 함선을 격파하고 대형을 흐트러 뜨렸다. 조선 수군의 포위망에 갇힌 일본 함대는 47척 침몰, 12척 나포, 14척이 도주하고 9천여 명이 사망하였으며, 와키자카와 400여 명의 일본 수군은 무인섬인 한산도로 도주하였다. 후에 와키자카는 뗏목을 타고 탈출하여 김해성으로 도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의 피해는 3명 전사, 10명 부상이 전부였다.
견내량해전(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평가되며, 이 전투에서 대승한 조선 수군은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고, 일본 수군의 경상도 서쪽 해안 진출 기도는 좌절되었다. 이때의 전황을 이순신의 장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있는데 사방으로는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왜적이 비록 육지로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 죽게 될 것이므로 먼저 판옥선 5·6척으로 하여금 선봉으로 나온 왜적선을 뒤쫓아서 엄격(掩擊)할 기세를 보였더니 여러 배의 왜놈들이 한꺼번에 돛을 달고 쫓아 나왔습니다. 우리 배는 짐짓 물러나는 척하면서 돌아 나오자 왜적들도 줄곧 뒤쫓아 나왔습니다. 그래서 바다 가운데로 나와서는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鶴翼陣)’을 벌려 한꺼번에 진격하여 각각 지자·현자·승자 등의 각종 총통을 쏘아서 먼저 2·3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왜놈들이 사기가 꺾이어 물러나 달아나려 하였습니다. 그때 여러 장수와 군사 및 관리들이 이기는 틈에 기뻐하면서 앞다투어 돌진하면서 대전(大箭)과 철환(鐵丸)을 마구 쏘니 그 형세가 바람과 우레 같아 왜적선을 불태우고 왜놈을 죽이기를 한꺼번에 거의 다 해치워 버렸습니다.2)
9일에 다시 왜 적선을 찾으러 출항하여 10일에서 다음날 새벽까지 안골포에 정박중인 왜적선 42척(견내량해전 때에 도망한 14척포함)을 포격으로 모두 격침시키고, 육지로 도망한 적을 소탕한 다음 12일에 한산도에 이르러 해전에서 도망간 왜적을 원균에게 소탕하도록 하고서 13일에 여수 본영으로 돌아갔다. 이 3차 출동에서 조선 수군은 왜적선 89척을 쳐부수고 12척을 나포하였으며, 왜군 150급을 참획하는 등 개전 이래 가장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이 한산도대첩과 안골포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남해에서 완전히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왜군의 서해쪽 진출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의 풍신수길은 한산도에서 패전한 뒤로 수군의 전략을 바꾸어 구귀·협판·가등 등의 장수에게 부산포 등 안전한 포구에 주둔케 하고, 조선 수군과는 해전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던 것이다.
▶ 한산도대첩이 벌어진 견내량 해역(출처: 거제신문)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임진장초》 원문에는 제목이 두 쪽에 걸쳐 가로로 굵게 “三度閑山島勝捷啓本”이라고 했지만 뒷날에 조정에서 충무공 이순신 특집을 편찬하면서 《이충무공전서》의 〈장계〉에는 “見乃梁破倭兵狀”이라 하였다. 2) 《李忠武公全書》 卷 2, 狀啓 33 〈見乃梁破倭兵狀〉 “同(閑山)島在於巨濟固城之間 四無游泳之路 雖或登陸 餓斃丁寧乙仍于 先使板屋船五六隻 追逐其先鋒之賊 揚示掩擊之狀 則諸船之倭 一時懸帆追逐次 我船佯退而還 彼賊逐之不已 及出洋中 更令諸將鶴翼列陣 一時齊進 各放地玄字勝字各樣銃筒 先破其二三隻 則諸船之倭 挫氣退遁 而諸將軍吏乘勝 躍 爭先突進 箭丸交發 勢若風雷 焚船殺賊 一時殆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