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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 022 임진왜란과 거제의 왜성
왜성이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사용할 목적으로 쌓은 성을 말한다. 왜성은 두 가지 성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로 가기 위하여 부산에서 서울을 지나 의주까지의 거처와 군수물자 보급로 확보를 위해 쌓은 성이다. 조선의 읍성을 고쳐서 사용하거나 간단하게 축성했다.
022 임진왜란과 거제의 왜성
- 홍춘희
 
 
왜성이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사용할 목적으로 쌓은 성을 말한다. 왜성은 두 가지 성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로 가기 위하여 부산에서 서울을 지나 의주까지의 거처와 군수물자 보급로 확보를 위해 쌓은 성이다. 조선의 읍성을 고쳐서 사용하거나 간단하게 축성했다.1)
 
두 번째는 육지 전투와는 달리 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하였다. 더욱이 내륙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왜군의 보급을 차단하였다. 왜군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남해안 일대에 근거지를 확보하거나 왜군 상호 연락,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성을 쌓았다. 울산에서 순천까지 남해안 지역에 30여 개의 성이 있었다.
 
 
거제 지역에는 영등포, 장문포, 송진포, 견내량에 왜성이 있는데 모두 조선 수군의 뱃길을 차단하기 위하여 바닷가 가까이에 축성되었다. 보급이나 본국과의 연락은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성 가까운 해안 근처에 선착장을 쌓았다. 왜성의 성벽은 잘 무너지지 않고 단단하게 쌓기 위하여 지면에서 70° 정도의 기울기로 쌓았다.
 
왜성은 1차 방어를 위해 외성(外城)에 해자나 목책을 두르고, 크게는 본환(本丸), 이지환(二之丸), 삼지환(三之丸)의 삼중 구조로 쌓았다. 작게는 본성(本城) 주위 지형을 이용하여 다수의 곡륜(曲輪)2)으로 둘러싸는 복잡한 구조로 쌓았다. 적의 침입 시 시간을 벌거나 잠복하여 기습공격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영등포왜성
 
왜군은 한산대첩에서 패한 후 장목면 대봉산에 영등포왜성을 쌓았다. 본성(本城)과 2개의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성은 좁지만, 산등성이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여 복잡한 구조로 축성되었다.3) 영등포왜성은 거제도 북단에 있고 왜성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산성이다. 바다 건너 낙동강 하구 및 진해만까지 조망하여 웅촌왜성이나 안골포왜성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조선 수군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장문포왜성
 
왜군의 입장에서 본진이 주둔하고 있는 부산을 지키기 위한 최대의 요충지가 장목만이다. 거제도는 해안선이 복잡하여 군선이 정박하기 편리하다. 일본 수군의 거점뿐만 아니라 주변 해역을 왕래하는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저지할 수 있는 곳이다. 이에 왜군은 장목만의 서북쪽 끝자락에 장문포왜성을, 동북쪽 끝에 송진포왜성을 동시에 축성하기 시작하였다.
 
장문포는 장목의 옛 이름이다. 장문포왜성과 송진포왜성은 장목만 해협을 가운데 두고 500m 거리에 있으며 두 성이 장목만을 감시하고 방어하고 봉쇄하는 역할을 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1594. 9. 29)에 의하면 장문포 앞바다에 돌입했으나 왜적이 깊이 숨어 나오지 않았고 양쪽 봉우리에는 천수각으로 추측되는 누각을 높게 세운 성곽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문포왜성 앞바다는 왜선 2척을 격침시킨 장문포해전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순신과 곽재우4) 김덕령5)은 수륙 합동작전으로 공격하였으나 일본은 배를 육지에 정박하여 싸울 의사가 없었다. 장문포전투 이후 이순신 장군은 정부에 불복종한 결과가 되어 권율의 밑으로 들어가 백의종군하게 되었고 원균이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① 영등포왜성 ② 장문포왜성 ③ 송진포왜성 ④ 견내량왜성
 
송진포왜성
 
송진포왜성은 장목리 해발 90m 증산(시루봉) 꼭대기에 축성되어 증산왜성 또는 시루성, 농암산왜성이라 불렀다. 본성을 가운데에 두고 산과 해안에 외성이 하나씩 있다. 본성과 외성에 각각 천수대를 축조하였다. 둘레는 420m, 높이는 3m, 폭은 3.2m이다.
 
출입구는 남쪽에 동서 양쪽 두 곳에 설치되어 있다. 서곡륜군은 축성된 전형적인 왜성의 형태를 띠고 있다. 높이나 구조, 군사적인 측면에서 서곡륜군이 중심 시설로 생각된다. 정상부는 동서 10m, 남북 약 15m의 규모이고 석축의 잔존 높이는 약 2m이다. 이 곡륜에서 북서쪽으로 단을 이루며 해안가로 바로 접하도록 연결되어 있다. 서북쪽 해안에 바위섬이 있는데 여기에서 성벽을 쌓는 돌을 조달한 것으로 보인다. 바위에는 곳곳에 구멍을 뚫려 있는데 이것은 바위를 깨기 위한 흔적으로 확인된다.
 
 
견내량왜성
 
견내량은 통영시 용남면과 거제시 사등면 사이의 길이 약 3km, 폭은 180~400m의 좁은 해협이다. 견내량에서 7km 남쪽에는 조선 삼도수군 통제영이 있는 한산섬이 있다.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키기 위한 중요한 지역이며 서해를 지켜내야 하는 전초기지이다.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승리하여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듯했던 왜군은 같은 해 9월 명량해전에서 패하였다. 이에 왜군은 근거지, 연락망과 보급로를 확보하고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안전한 뱃길이 필요하였다. 10월부터 견내량왜성을 쌓기 위해 우리 백성을 동원하였다는 설이 있다. 토성으로 알려져 있고 둘레는 약 350m이다. 물이 없는 해자인 공굴6)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망루와 보루7)를 위한 성으로 판단되며 화포를 설치했다고 한다.8) 왜성 앞바다에 돌을 바닥에 박아 깊이 20m, 폭 4m 정도의 사각형 형태의 선착장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남아 있다. 견내량왜성은 현재 농토로 이용되어 오다가 2019년 이후 왜성의 서남쪽 내성 구조 위에 글램핑장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천수각 터와 외부 성곽 흔적만 남아 있으나 여름철에는 풀이 자라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위키백과사전(https://ko.wikipedia.org/wiki).
2) 왜성 내의 여러 공간을 구획하여 쌓은 성벽으로 둘러싼 소규모 공간(곽)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본환은 성의 중심이 되는 내곡륜으로 다이묘가 거주하고, 외곡륜은 무사나 상인 등이 거주하며 2지환, 3지환 등으로 성을 겹겹이 쌓았다.
3) 신동명·최상원·김영동, 《왜성 재발견》, 2021, 산지니.
4) 임진왜란 당시 공헌한 의병장으로 여러 전투에서 홍의를 입고 지휘해 홍의장군으로 무공을 세웠다.
5) 권율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
6) 물이 없는 해자.
7)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돌이나 콘크리트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
8) 김윤덕, 《우리 땅의 왜성을 찾아서》, 2012, 동영원색인쇄, P.339.
【문화】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 021. 한산도는 옛 거제 땅이었다
• 022 임진왜란과 거제의 왜성
• 023. 조선 수군의 눈물 ‘칠천량해전’
(2024.09.05.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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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