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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 024. 임진왜란 시 공을 세운 거제 선무원종공신 22인
임진왜란이 끝나자 전란 중에 각 방면에서 공을 세운 문·무 관원에 대한 공신책봉 문제가 논의되다가, 선조 37년(1604) 호성공신(扈聖功臣), 청난공신(淸難功臣)과 더불어 ‘선무공신’을 선정하였다. 지휘관급인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18명을 ‘선무공신’으로 칭호하여 1등에는 임진왜란에서 육군과 해군을 이끈 이순신(李舜臣), 권율, 원균 등 3인의 장수가 선정되었다.
024. 임진왜란 시 공을 세운 거제 선무원종공신 22인
- 김해정
 
 
임진왜란이 끝나자 전란 중에 각 방면에서 공을 세운 문·무 관원에 대한 공신책봉 문제가 논의되다가, 선조 37년(1604) 호성공신(扈聖功臣), 청난공신(淸難功臣)과 더불어 ‘선무공신’을 선정하였다. 지휘관급인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18명을 ‘선무공신’으로 칭호하여 1등에는 임진왜란에서 육군과 해군을 이끈 이순신(李舜臣), 권율, 원균 등 3인의 장수가 선정되었다. 2등에는 신점·권응수·김시민·이정암·이억기 등 5인이 선정되었고, 3등에는 정기원·권협·유사원·고언백·이광악·조경·권준·이순신(李純信)·기효근·이운룡 등 10인이 선정되었다.
 
선조 38년(1605)에 선무공신 책봉에서 빠진 장수와 병사, 의병 등 공을 세운 9,060명을 ‘선무원종공신’으로 봉했다. 이중 거제 출신 장군 22명이 포함되어 있다.
 
 
 
 
● 1등공신의 업적1)
 
1) 신응수(辛應壽)
 
임진왜란 때에 1592년 5월 12일 고현성이 함락되자 반중경(潘仲慶) 등과 함께 남여산(南呂山) 암혈에 모여 재기의 모의를 할 때 이들은 오히려 이순신의 막하에서 싸우는 것이 상책이라면서 떠나갔으나 공은 고현성을 지키며 백성을 구하고, 왜병에게 원수를 갚기로 하여 윤영상·김희진·신응수는 의형제로서 함께 계속 항전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남아 있는 왜병을 소탕하려고 고현성에서 동쪽으로 나오는 왜병을 기습하여 많이 죽였으니 지금도 밀바대(현 다공, 왜군을 밀어낸 들)라고 전해오고 있다. 뒷날에 공은 제국, 반중경(潘仲慶) 의병장에게 찾아가 충무공의 막하에서 왜적의 목을 많이 베어 큰 공을 세웠다. 그 뒤로도 사천 등 해전이 있을 적마다 나가 싸워 공을 세웠으며, 1596년(병신년) 5월 4일에 죽었다. 뒷날에 훈련원 정(正: 정3품 당하 관)을 추증받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삼충사(三忠祠)를 연초면 다공리에 건립하였고, 봉안 향사하였으나 한·일합방 뒤에 파괴되었으나 현재 거제면 법동리에 후손들에 의해 사당과 추모비가 세워져 배향하고 있다.
 
 
2) 윤영상(尹榮祥)
 
첨정(僉正) 윤승보(尹承輔)의 맏아들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윤승보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마침 돈암(遯巖) 윤영상은 전주(全州)에 갔다가 왜적이 거제에 침범하였다는 말을 듣고 밤을 새워가면서 달려오다가 남해·사천 등지에서 장정들을 모집하여 거제 전하도를 건너와 고현성의 영내에서 그의 부친을 뵙고 신응수·김희진과 의형제를 맺어 고현성을 구제하기로 맹세하였다. 그의 아우 윤흥량도 힘을 합하여 무기를 장비하고,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아버지 윤승보와 함께 전사하였다. 현재 연초면 다공리에 후손들에 의해 그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3) 반중경(潘仲慶)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고현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로 가서 형 반중인과 함께 윤흥량, 조윤전 등이 3년간이나 쫓고 쫓기면서 향토 수호라는 이름으로 항전하였고, 해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595년(을미년) 5월 2일에 한산대첩에서 전사했다고 전한다. 뒷날에 공은 훈련원 첨정과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후손들이 장목면 궁농리에 수궁사(水宮祠)를 세워 제향하고 있다. 또 신현읍 고현리의 문절사(文節祠)에는 거제 반씨의 시조 반부(潘阜)와 함께 배향하고, 해마다 10월 20일에 유림에서 봉사하고 있다.
 
 
4) 김희진(金希璡)
 
통정대부 장예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 정3품 당상관) 김원(金元)의 아들이다. 공은 1575년(기해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 훈련원 첨정(종4품)으로 싸웠으며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뒷날에 연초면 다공리의 삼충사에 모셨다가 통영의 충정사로 옮겨서 봉향한다. 공은 윤영상·신응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현성을 방어했으며, 왜적을 추격하여 용호(현 고성 삼산면)에 이르러 충무공 이순신을 만나 그 막하에서 일하기도 했다. 특히 임진년 5월 12일 고현성이 왜적에게 함락될 적에 공은 고현성 남문의 방어진을 맡아 3일간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이때 하청장터에서는 왜적이 주둔하고서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민가를 약탈하며 불태우는 등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는데 공은 윤영상·신응수 공과 함께 야음을 틈타 적진에 돌입하여 솥뚜껑에 불을 담아서 왜적의 화약고와 총기고에 내던졌더니 그 폭발은 하늘을 진동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내게 했다. 이것이 5월 7일 왜적이 거제에 상륙하여 갖은 만행을 저지르던 설움을 깨끗이 씻었다 하여 하청장터 설욕전(雪辱戰)이라고 한다. 현재 거제면 법동리에 그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5) 신덕룡(辛德龍)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둔덕의 유림 신씨 문중을 대표하여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는 공이 많으므로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판관을 지냈으며, 훈련원 첨정의 벼슬에 올랐다. 5월 12일 고현성이 함락되자 공은 옥계성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의 막하로 가서 많은 공을 세웠다. 공은 1598년(무술년) 11월 19일 노량해전 때에 삼도 수군과 명나라 수군이 왜군 500여 척과 해전하면서 창선도 앞바다에서 전사했다. 정유재란이 끝나자 신응수 의병장이 공의 시체를 운구하여 출생지인 거제 하청으로 돌아와 장사 지냈고, 연초면 연사리 충효사에 모시고 있다.
 
 
● 2등 공신의 업적
 
1) 윤승보(尹承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아우 다헌과 그의 아들 영상(榮祥)·흥량(興良)과 함께 민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5월 초에 왜적들이 장목·옥포·지세포 등지에서 고을 사람들을 죽이고 관청과 민가를 불지르는가 하면 부녀자에게 행패를 부리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면서 고현성으로 진입해 왔다.
 
거제현령 김준민은 명으로 진주성으로 떠나면서 거제읍성을 공에게 부탁했다. 공은 고향 땅에 익숙하여 산과 하천을 이용하여 유격전을 벌이면서 적을 몹시 괴롭히기도 하였다. 이렇게 왜적을 전율케 하다가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5월 12일 고현성이 함락되면서 왜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2) 여막동(余莫同)
 
본관은 의령(宜寧), 임진왜란 때에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서 김희진·윤영상·신응수 등과 함께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훈련원 정(正: 정3품 당하관)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3) 김옥춘(金玉春)
 
선전관 훈련원첨정 김명석(金明碩)의 아들이다. 김해인으로 선무원종 2등공신이며, 효종 때에 가선대부 중추부사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수직(壽職)도 받았다. 이들 부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석자(三尺) 되는 칼을 들고 팔공산(八公山)에 들어가 망우당 곽재우의 휘하에서 의병을 거느리고 왜적을 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
 
 
4) 반관해(潘觀海)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같은 문중의 반중인, 반중경과 함께 거제 방어작전에 참전하였고,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서 해전에도 참가했다. 이들은 유약한 유생이 아니라 전위부대에 자진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유생 의병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왜적 소탕 작전이나 해전에서 선봉에 나서서 싸워 많은 공을 세웠지만 1596년(병신년) 4월 8일에 전사하여 뒷날에 통정대부의 벼슬과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공의 무덤은 옹정(甕井)에 있으며, 신현읍 도론곡 영모사(永慕祠)에 봉향하고 있다.
 
 
5) 옥계성(玉桂成)
 
거제 출신 옥관(玉寬)의 아들이다. 1571년(선조 4년) 4월 6일에 태어나 1658년(효종 9년) 9월 11일에 죽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 막하로 들어가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자 곽재우는 공에게 용맹스럽고 훌륭한 전략을 제공하니 견수당이라는 호를 주었고, 조정에서는 공의 공로를 찬양하여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하였다. 그리고 1926년 연초면 오비리에 공을 모시는 경절사(景節祠)를 중건하고 해마다 10월 첫 정자일〔初丁日〕에 사림이 향사하고 있다.
 
 
6) 윤흥량(尹興良)
 
윤승보의 둘째 아들이요, 윤영상의 아우이다. 송재(윤흥량)는 선조 원년(1568, 무진년)에 태어나 인조 11년(1633, 계유년) 10월 10일에 죽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자간이 모두 의병이 되어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정들을 모집하고, 고현성을 지킬 전투 준비를 하였으며,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밤을 이용하여 적진에 기습하여 하룻밤 사이에 수백 명의 왜적의 목을 베었다. 5월 12일 고현성이 무너지면서 부친 윤승보가 전사하고, 형 윤영상과 함께 겨우 빠져나와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며칠이 지나서 왜적들이 하청장터에 있다는 정보를 받고서 밤중에 기습하여 왜적의 두목을 비롯하여 수백 명의 목을 베어 공을 세우니 하청장터의 설욕전이라고 일컫는다.
 
 
7) 조윤전(趙允詮)
 
명종 15년(1560년)에 태어나 인조 원년(1623년) 10월 14일에 죽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제를 지키기 위하여 동지 윤흥량, 반중인과 더불어 의병을 모아 험한 곳에 진을 치기도 하였으며, 고현성이 무너지자 유격전을 벌여 수많은 왜적의 목을 베었다.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 해상작전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도 의병들과 함께 팔공산에서 왜적을 물리쳤고, 거제를 중심으로 남아서 최후까지 향토를 수호하여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8) 제인국(諸仁國)〔=제괵(諸漍)〕
 
명종 10년(1555년)에 태어났다. 제인국(제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억(諸億)·제진(諸璡) 삼 형제와 아들 제홍록(諸弘祿)은 충무공 이순신 휘하로 들어가 여러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충무공은 제씨 집안의 사람이 공을 많이 세우는 것을 보고 “어찌 이토록 제씨 집안에 충의가 많은고!” 하고 칭찬했다. 특히 충무공의 눈길을 끌게 한 것은 제인국(제괵)과 그 아들 제홍록이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도 앞장 서서 위난을 꺼리지 않았으며, 견내량해전을 비롯하여 당포·노량· 벽파정 전투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다. 거제 의병을 맨 처음 창의한 선봉장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9) 제억(諸億)
 
본관은 칠원으로 호는 명산(明山)이다. 명종 19년(1564, 갑자년)에 태어나 효종 6년(1655년)에 죽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형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현성을 지키는데 많은 공을 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었다. 그 뒤에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당포·노량·벽파정 전투에서 공을 세워 수문장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0) 이언량(李彦良)
 
완풍군(完豊君) 원계(元桂)의 후손으로 통정대부 윤량(允良)의 아우이며 찬위수군장이었다. 임진왜란 때 1592년 5월 10일 거제현령 김준민을 따라 진주성으로 출동하여 고령의 무계(茂溪)에서 전공을 세우고, 선조 26년(1593년) 6월 28일 진주성 함락 때 김준민 거제현령 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선무원종공신 2등 수문장(守門將)으로 수록되 어 있다.
 
 
11) 반중인(潘仲仁)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오봉(五峰), 윤흥량, 조윤전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다가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가서 한산해전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들과 함께 팔공산으로 나아가 왜적을 치기도 했고, 해전에도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으므로 장락원(掌樂院) 주부(主簿: 종6품)에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1606년(선조 39, 병오년) 3월 3일에 죽었다. 무덤은 연초면 죽토리 삼봉산에 있고, 고현동 서문 도론곡 문절사에 시조 반부와 함께 해마다 10월 20일에 향사하고 있다.
 
 
12) 김후석(金厚錫)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판관(判官)까지 되었다. 공은 당파의 난국을 한탄하며 관직을 마다하고 부친과 함께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가 임진왜란을 맞았다.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은 진주 관할의 고을의 군대를 모두 진주성으로 집결하라고 명령을 했다. 이 명령을 받은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은 군사를 모아 진주령으로 떠나면서 전직 판관을 지낸 후석공에게 “공께서는 판관을 지낸 경험이 있으니 우리 고을을 통솔할 수 있는 적격자로 생각되어 본인이 진주로 떠나더라도 나 대신에 현령의 직책을 맡아 거제를 끝까지 지켜주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나라가 위급하니 직책의 막중함을 알고, 신명을 다하여 우리 거제를 사수하여 백성을 구하겠습니다. 이곳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시고 본영 방어에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고현성이 함락되자 공은 다른 의병장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 많은 공훈을 세웠다.
 
후석공은 100여 명의 적병을 무찌른 공적을 조정에 바치니 배 1척과 8년 동안에 계속 상을 내리셨으며, 어모장군(禦侮將軍: 정3품 당하관), 훈련원 첨정(종4품)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에 올랐고, 통영 정충사에 봉안했다가 착량묘에 다시 배향했다.
 
 
13) 제진(諸璡)
 
명종 21년(1566, 병인년)에 태어나 효종 3년(1652년)에 죽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형 제괵, 제억과 함께 옥포해전에 상륙해 온 왜적들을 무찌르기 위하여 가족결사대를 조직하는 한편, 하청·연초 등지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연초 다공전투에서 왜적을 살상하는 큰 공을 세웠다. 5월 10일 거제현령이 진주성 방어를 목적으로 거제를 떠나자 그 뒤부터 사흘 동안 12일까지 고현성에는 왜적이 물밀듯이 쳐들어와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고현성주 윤승보 등이 전사하고 고현성도 무너졌다. 제괵 등 삼 형제와 그 아들 홍록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음을 알고,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가 해전마다 다 이겨 많은 공을 세움으로써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4) 유녹상(劉祿祥)
 
명종 2년(1547년)에 태어났으며, 1614년 10월 2일에 죽었다. 공은 일찍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부정(副正: 종3품)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가 우국충청으로 몸 바쳐 싸운 공이 많아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 3등 공신의 업적
 
1) 제홍록(諸弘祿)
 
제국〔=제괵(諸漍)〕의 아들이며, 선조 6년(1573, 계유년)에 태어나 정유재란 때에 진주성을 수호하다가 1597년 6월에 순절하였다. 19살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고현성을 지키다가 고현성이 무너지자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가 숙부 제말(諸沫) 장군과 함께 싸웠다. 진주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 고성전투에서 용전하였고, 다시 진주성 전투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뒷날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거제에 사는 후손들이 장목면 송진포리 후룡산 자좌에 장의하고 1792년에 쌍충비각이 건립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하청면 중리에 경충사(景忠祠)를 건립하고 제말과 제괵·제억·제진·제무상·제홍록을 매년 10월 첫 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2) 윤개보(尹介輔)
 
중종 32년(1542년) 3월 5일에 태어나 선조 39년(1606년) 10월 1일에 죽었다. 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형 승보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때 거제현령 김준민은 진주성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갔으므로 이들 형제가 의병들과 함께 고현성을 지키다 접근하는 적세가 너무 거세므로 이를 보고서 분을 참지 못하고, 동지들에게 맹세하고 창을 앞세워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의 머리를 베고 또 병기를 빼앗아 돌아왔다. 5월 10일부터 사흘 동안 격전 끝에 형 승보가 적의 화살에 맞아 쓰러지니 격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빗발치듯한 적진 속으로 돌진하다가 적의 칼에 맞았으며 이때 “왜구를 다 잡아 죽이지 않고 어떻게 내가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소리쳐 울었다 한다. 공은 충무공의 막하에 들어가 수문장을 지내고 병절교위(秉節校尉: 종6품)에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3) 원산(元山)/원평(元平)
 
본관은 원주(原州), 자(字)는 산(山), 호(號)는 학란(學瀾)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일주일이 되는 4월 20일에 노비의 신분으로 김옥춘, 옥계성, 이언량 등 거제 출신 의병들은 당시 거제현령 김준민과 더불어 낙동강 일대의 전투에 참가했다. 적병들을 발견할 때마다 돌격하여 무찔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분의 불타는 마음을 참지 못하여 곽재우와 같이 낙동강 연안에서 왜군과 여러 차례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으므로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어 노비에서 면천되어 절충장군과 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거제 출신 선무원종공신 22인을 기리기 위해 거제에서는 임진왜란 첫승지 옥포에 옥포대첩기념공원을 조성하여 효충사(孝忠祠)에는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선무원종공신 22인은 거충사(巨忠祠)에서 매년 음력 5월 7일을 기려 6월 셋째 주 금요일에 제례를 봉행하고 옥포대첩을 기억하기 위한 ‘거제옥포대첩축제’가 열린다.
 
 
① 옥포대첩기념공원 ② 거충사 ③ 효충사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거제시지》, 〈제2편 역사〉, 〈제7절 거제 출신 선무원종공신 22인〉, 2000,
【문화】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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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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