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거제 현령(縣令) 이야기 - 원수민
● 이호성
거제현령 이호성은 어릴 때 체격이 좋았고, 자라서는 병법서를 많이 읽었으며, 말타기, 활쏘기에 뛰어났다. 세종 9년(1427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여진족 정벌에 참여할 장수로 뽑혀 최윤덕을 따라 여진족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1) 동서(東西) 양계(兩界)에 화포를 능숙하게 다루는 감련관으로 선발되어 파견되기도 한다.2) 이후 공조참의, 경주부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뛰어난 무신이다.3)
거제도는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면서 거창에 있던 거제도민은 1422년에 본격적으로 환도하게 된다. 수월평에 목책을 설치하고 치소지로 삼으려고 했으나 땅이 협소하다는 의견으로 사등이 선정된다. 사등성 축조는 세종대(1426~1448) 22년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하지만, 1450년 거제현의 읍기에 대한 적합성에 대한 문제는 도체찰사 정분에 의해 논의하게 된다. 도체찰사4) 정분은 거제 읍성의 규모가 작고 물이 부족하다는 근거로 고정부곡으로 옮길 것을 건의한다. 문종실록 1년(1451년)에 거제현 사람들이 이전 불가의 상언을 올린다.
본읍이 예전에는 섬 안의 수월리(水月里)에 목책을 설치하였었으나, 지난 병오년(1426)에 사등리(沙等里)로 옮겨서 관사를 설치하고 성지(城池)를 건설하는 일이 무진년(1448)에 이르러 끝났는데, 이제 도체찰사 정분(鄭苯)의 심정(審定)으로 말미암아 또 고정리(古丁里)로 옮기려 합니다. 본읍의 인리(人吏)와 관노비가 이미 모두 토착하여 번성한데 이제 고을을 옮기게 한다면 영선(營繕)에 끝이 없으니, 바라건대 옮겨 설치하지 말아서 민생을 편안하게 하고, 만약 부득이하다면 뭍으로 나가 옮겨 살게 하여 장구(長久)한 일을 도모하게 하소서.
이에 조선 조정에서 다시 거제 읍성의 위치를 의논한 결과 고정리로 옮기는 것이 합당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읍성을 옮기는 중요한 시점에 이호성을 거제현령으로 파견한 것이다. 거제현령 이호성은 문종 원년(1451년) 11월부터 고현성을 축성하기 시작하여 단종 3년(1455년)에 3천 6백여 척의 성을 완성한다.5) 이호성은 성 안에 40여 칸의 건물을 지은 후 사등성에 있던 관아를 옮기고 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백성들이 들어와서 지키도록 했다.6) 고현성 축성이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이호성의 통솔력이 돋보인다.
▶ 고현성
현재 고현성은 거제시청을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복원이 되어 있으며 곳곳에 벤치가 있고 오래된 성벽 위의 돌들은 운치가 있다. 고현성은 거제시민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서 애완견과 산책을 즐기기도 하고 청소년들이 자전거를 타는 장소로 거제시민들의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 김준민과 임진왜란
거제현령 김준민은 여진족을 상대로 용맹하게 싸워 공을 세우나 문벌이 낮아 알려지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큰 공을 세워 형조판서로 추증된다.7)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김준민은 거제현령으로 고현성을 지켰다.8) 또한, 왜적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신음하고 있을 때 5월 7일 이순신 장군이 옥포해전에서 크게 승리한다. 승리한 기쁨도 잠시 패전한 왜구가 고현성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들은 김준민은 북병사 이제신과 함께 거제 의병들과 함께 송정고개에서 왜적의 공격에 대비한다.9)
그러나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은 왜적이 진주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에 김준민 현령에게 진주성으로 합류하라고 명(命)한다. 김준민 현령은 거제지역의 유림과 의논하며 거제 방어에 도움을 요청하여, 유림의 윤승보를 거제읍성의 성주로, 김후석에 현령 직무대리 직책을 맡기고 김준민은 진주성으로 향한다. 김준민이 떠났다는 소식에 옥포대첩의 패잔병들은 5월 8일 송정 고개를 넘어 고현성으로 진격하여 결국 고현성은 함락되고 만다.
진주성으로 떠난 김준민은 결사대 80명을 거느리고, 왜군의 관사를 불사르고 돌격하여 왜군들을 물리치면서 1차 진주성 전투의 승전보에 공을 세운다. 1593년 일본의 명장인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 30만 명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한다.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관군과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 의병들을 이끌고 왔으나 역부족이었다. 거제현령 김준민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고10) 함락당한 고현성은 임진왜란이 지난 이후 오랫동안 거제 읍성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 이동구와 거제읍성의 이전
1664년 거제현령으로 부임한 이동구는 고현성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어 읍성의 역할을 할 수 없어서 거제현청을 서부면으로 옮기기로 한다. 서부면을 읍내면으로, 고정리를 고현면으로, 거제읍성을 고현성으로 개칭하고 폐성한다. 거제현청이 서부면으로 이전하고 도론골에 있었던 향교와 기성관도 옮겨간다.11) 향교는 현재 청소년수련관 자리에 있었던 것을 옮기게 되는데 조선의 교육기관이 있었던 곳에 현재도 많은 청소년들의 배움의 터전인 교육기관이 자리 잡은 것을 보니 고현 도론골에는 특별한 기운이 있는 것 같다.
1666년 7월 이동구 현령은 조정의 허락 없이 거제현청을 옮기고 행정구역 명칭을 고쳤다는 이유로 파직된다. 거제현청의 기성관과 질청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동헌 자리는 거제면사무소로 바뀌어 아쉬움이 남는다.
● 김대기와 김현령재
거제종합운동장 옆에 김현령치비가 있다. 거제현령 김대기는 숙종 14년(1668년)에 부임했을 때 읍치가 거제면으로 옮겨가 고현과 거제는 길이 험하고 산이 높아 다니기 불편했다. 김현령은 거제공설운동장에서 거제면 화원마을로 통하는 새로운 길을 만들게 된다.
폭 3m, 길이 8km의 도로공사를 시작하는 중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으며, 전염병이 퍼져 많은 사람이 죽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조선 조정에서는 공사 중단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김대기 현령은 당장 어려움이 있지만 중단하면 다시 시작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고 길을 계속 닦았다. 이에 명령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부임한 지 6개월 만에 파직되어 일운면 망치로 귀양간다. 망치는 김현령이 산 고개에서 넓은 바다를 보면서 마음을 달랬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김현령치비의 비문 내용을 살펴보면, 고을의 백성들이 김현령이 만든 길을 기리기 위해 김현령재라 불렀으며, 시간이 지난 후 조선 조정에서 김현령재의 편리함을 알고 김대기를 김해부사 직에 임명했으나 거절하고 고향 공주에서 여생을 보낸다. 이후 김현령의 후손이 망치마을에 와서 정착하고 살았는데 후손 김계윤이 선조의 업적이 잊힐까 염려하여 비문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2)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 2월 25일 신유 4번째 기사. 2)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 8월 1일 을축 1번째 기사.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조선시대 의정(議政)이 맡은 임시관직으로 정1품에 해당. 5) 《사등면지》, P.122~124. 6) 〈두산백과〉 7)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6월 1일. 8)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8일 병진 6번째 기사. 9) 《신현읍지》, P.103. 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1) 《신현읍지》, P.105. 12) 《신현읍지》, P.5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