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조선시대 거제부사(府使) 이야기 - 원수민
초대 부사 변진영과 비석군
조선 후기 숙종 37년(1711년)에 거제는 현에서 도호부로 승격된다. 거제가 도호부로 승격하는 데에는 거제의 지리적 위치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거제(巨濟)는 해문(海門)의 요충(要衝)에 있으니, 중진(重鎭)을 설치하고 열진(列鎭)을 절제(節制)함이 마땅한데, 그 현령(縣令)이 도리어 첨사(僉使)의 아래에 있으니 부사(府使)로 승격시켜 방어사(防禦使)를 겸임케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조정의 의논이 옳다고 인정하였으나, 시행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관찰사(觀察使) 유명홍(兪命弘)이 다시 청하자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하여 말하기를,
“방어사를 겸임한다는 한 가지 조항은 천천히 의논하는 것이 온당하나, 청컨대 먼저 현(縣)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지세포(知世浦)는 도로 만호(萬戶)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1)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거제 8진을 종5품의 현령이 지휘하기에는 맞지 않았기에 종3품의 지위인 부사를 파견한 것이다. 숙종 37년 3월 20일 거제 초대부사로 변진영이 임명된다. 부사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완수하여 거제현 관아에 송덕비가 남아 있다. 거제현 관아에 남아 있는 비석군에는 석비 8기와 철비 6기가 있는데, 그중에서 규모가 크고 화려한 석비가 ‘통정대부행부사변공진영재리 인정몰세불망비(通政大夫行府使邊公震英材吏 仁政沒世不忘碑)’이다.
▶ 거제 기성관 비석군
변진영은 방어사를 겸직했고, 통제영의 보조업무를 담당했다. 죽림마을에는 어해정을 건립해 수군들의 무기와 식량을 보관하고, 전선대장을 설치하여 수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2)
하겸락(1862~1863)과 유처자의 인연
1862년 거제 부사직을 맡았던 하겸락과 유섬이에게는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많은 천주교인이 잡혀가게 되는데, 전라도 지역의 최초의 신자인 유항검은 의금부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했으나 다른 천주교인의 거처를 발설하지 않았다. 결국, 유항검은 능지처참에 처하게 되고, 가족들은 모두 연좌제로 인해 유배형에 처해진다. 유섬이는 9살 나이로 거제도로 남동생들은 흑산도, 신지도로 뿔뿔이 헤어지게 된다. 어린 나이에 아는 이 없는 거제에서의 삶을 불쌍히 여겨 유섬이는 내간리 어느 노파의 수양딸로 살게 된다.
양어머니로부터 바느질을 배워서 살아가게 되는데, 13~14세에 이르자 중매쟁이들이 혼담을 이야기하자 “나는 선비의 혈육으로 거제부의 관비가 되었다. 내가 결혼을 하여 자식을 얻게 되면 모두 노비가 될 것인데, 내 괴로움을 어찌하오. 다시 시집가라고 한다면 죽음으로 갚으리오.” 양어머니는 유섬이의 말에 따랐다. 16~17세에 유섬이는 흙과 돌로 집을 지어달라고 하고 바느질을 하면서 집 밖으로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양어머니가 돌아가시자 40여 세가 지난 후에야 바깥으로 나와서 평범하게 살았다고 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긴 칼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니 감히 유섬이의 정절을 더럽히지 못했다. 그런 유처자가 71세에 죽었다.3)
거제 부사직의 임기를 마치고 다른 임지로 떠나려는 하겸락은 유섬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좋은 무덤 자리를 찾아서 장사를 치르게 하고, “칠십일세류처녀지묘” 아홉 자를 묘 옆 바위에 새기게 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묘비에는 “유처자묘”라는 글만 새겨져 있다. 거제를 떠난 후에 유처자의 제문을 지어서 보냈다. 하겸락은 유처자의 어떤 면을 보고 무덤에 묘비까지 세워준 것일까?
▶ 유처자묘
하겸락이 1870년 신도진절제사로 있을 때, 중국의 어선이 조선 바다를 침범해서 고기잡이했을 때, 중국 어선을 나포해서 우리 어민들을 보호하였다. 강계도호 부사 겸 청북병마우방어사로 있을 당시에는 회재서원의 철폐를 막았으며,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4)는 기록으로 보아 유섬이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한 유섬이의 일생에 대한 애달픔과 정절을 지킨 백성에 대한 애민사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송희승과 옥산금성
거제면 너른 들녘에서 수정봉을 바라보면 홀로 우뚝 서 있는 누각이 보이고 능선을 따라 성벽이 보인다. 이 성곽은 수정같이 솟아 있다고 하여 수정봉성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산성 성문 아래 바위에 ‘옥산금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옥산금성이라는 명칭이 더 정확하다. 옥산금성은 고종 9년(1872년) 6월 29일 거제 부사로 임명된 송희승 부사가 쌓은 것이다.5) 1874년 강원도 삼척영장(三陟營將)에 임명되어 거제를 떠나지만 옥산금성을 쌓았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고 그해 5월에는 장 100대 형에 처해졌으며, 경상도 풍기군으로 유배형을 받는다. 산성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지키려고 쌓은 것인데, 산성을 쌓는 과정이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는 이유로 파직된 것이다.
▶ 옥산성지 금성대
옥산금성 축성기에 의하면 송희승 부사는 행정, 경제, 군사 중심지에 읍성을 쌓자고 건의하였으나, 거제는 사등성, 고현성, 거제현으로 옮기면서 힘들었을 백성의 고충을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희승 부사는 1873년 읍성 대신에 수정봉에 산성을 축성하게 되는데, 많은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쌓았으니 백성들의 고달픔을 짐작케 한다. 또한 총 비용이 무려 2만 냥이 소요되었으니, 백성들의 짐이 무거웠을 것이다. 산성은 능선을 따라 타원형이며, 둘레는 778m, 높이 4.7m, 폭 3m로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다. 성안에는 무기고, 연못, 누각이 있으며, 남쪽과 서쪽의 성문 이 ‘ㄱ’ 자 모양의 흔하지 않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 옥산금성 누각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노란 들판의 풍요로움과 막힘없는 시야로 시원하다.
송희승 부사는 고종 16년에 다시 순천영장으로 등용되었고 고종 17년에는 정3품 오위장에 임명될 정도로 뛰어난 무관이었다. 송희승 부사가 옥산금성을 축성했기에 지금 우리가 볼 수 있으니 고맙기도 하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조선왕조실록》, 1711년 3월 3일. 2) 고영화, 〈거제읍지〉, 《뉴스앤거제》(http://www.newsngeoje.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58) 3) 《사헌유집》. 4)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5) 《승정원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