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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 027. 거제도에서 보이는 섬 대마도
“왜(倭)가 고성, 죽림, 거제(固城·竹林·巨濟)를 노략질하니 함포천호 최선(合浦千戶 崔禪)과 도령 양관(都領 梁琯) 등이 싸워 격파하고 300여 급을 참획(斬獲)하였다. 왜구(倭寇)의 침탈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기에 거제·고성 지역은 대마도와 최단 거리에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왜구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027. 거제도에서 보이는 섬 대마도
- 김남희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 용어 시소러스에서 거제도를 검색하면 ‘제주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대마도와 가까워 왜구의 출몰이 잦았음’이라고 표시해두었을 정도로 왜구의 피해가 많은 것으로 확인이 된다.
 
“왜(倭)가 고성, 죽림, 거제(固城·竹林·巨濟)를 노략질하니 함포천호 최선(合浦千戶 崔禪)과 도령 양관(都領 梁琯) 등이 싸워 격파하고 300여 급을 참획(斬獲)하였다. 왜구(倭寇)의 침탈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1)라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기에 거제·고성 지역은 대마도와 최단 거리에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왜구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가조현(加祚縣) 연혁에는 원종 때 거제현이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피해서 이곳에 치소(治所)를 두고 교우(僑寓)하였는데, 그대로 거제라 일컬었다.2)라고 한다. 여기서 교우(僑寓)란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머물러 사는 것을 뜻한다. 후에 왜구의 노략질로 주민이 흩어지고 고을을 내륙으로 옮기면서 황폐해진 거제도 지역은 조선 건국 후 왜구의 기세가 잦아들면서 거제도 등지에 다시 인구가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세종 즉위 당시 거제도 등지의 상황은 《태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었다. ‘거제(巨濟)와 남해(南海) 두 섬은 왜적이 다니는 곳인데, 근래 도둑이 일으키는 변인 적변(賊變)이 가라앉았습니다. 이에 이 싸움 역(役)을 피해 두 섬으로 들어가니 남해가 200여 호, 거제가 360여 호입니다. 만일 변고라도 있으면 반드시 노략질 당할 것이니, 두 섬에 들어가 사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수성군(守城軍)을 두어 방비를 엄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3) 후에 세종은 논의를 거쳐 목책을 설치하는 것으로 귀결하여 새로운 거제의 이야기가 시작되게 되었다.4)
 
그러다 이종무를 앞세워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게 된다. 《세종실록》 4권, 세종 1년 6월 17일 ‘삼군 도체찰사 이종무가 9절제사를 거느리고 거제도를 떠나 바다 가운데로 나갔다가, 바람에 거슬려 다시 거제도에 와서 배를 매었으니…’5)로 시작하여, 세종 1년 6월 19일 임진 7번째 기사에는 이날 사시(巳時)에 이종무가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발해서 다시 대마도로 향하였다고 기록이 되어있다.6)
 
조선시대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 있기 전 고려시대에도 대마도 정벌은 시도되었다. 비록 전쟁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대마도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공포의 시간이었다. 특히 이키섬〔壹岐島〕 에는 무쿠리 고쿠리라는 말이 전해진다. 무쿠리는 몽골군, 고쿠리는 고려군이라는 뜻으로 몽골군, 고려군이 온다는 뜻이다. 마치 임진왜란 이후 거제도에서 ‘이비 온다’라고 하면 코와 귀를 베어간 일본군을 무서워 하는 말이 생겨났듯이 말이다.7) 그래서 이키섬〔壹岐島〕에는 우는 아이를 달랠 때 이 말을 쓰기도 한다. 이키섬에서는 ‘무쿠리코쿠리 인형(むくりこくり人形)’을 만든다. 인형이라고 해도 나무막대 기에 나무 끈을 묶어 몽골군과 고려군을 본뜬 아주 간단한 것이다. 이보다 더 잔혹하고 무자비함을 나타내는 ‘무고이(むごい)’라는 일본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 역시 ‘몽골군 → 무쿠리 → 무고이’라고 동사형으로 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키섬의 인형-무쿠리고쿠리8)
 
 
반대로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유입된 것도 있는데, 추운 겨울이면 조선을 달콤하게 살찌우는 고구마가 바로 그것이다. 고구마는 조선 통신사 때 전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9) 여몽 연합군이 대마도로 출발하던 날도 10월 겨울이었다.10)
 
이렇듯 거제도와 대마도는 서로에 대한 무서움과 잊을 수 없는 달콤함으로 섞여 있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高麗史》 권37, 世家37 忠定王 2년 2월 “倭寇固城 竹枺 巨濟 合浦千戶崔禪 都領梁琯等 戰破之 斬獲三百餘級 倭寇之侵始此.”
2)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居昌郡 屬縣 加祚縣 “元宗時 巨濟縣 避三別抄之亂 僑治于此 仍稱巨濟.”
3) 《太宗實錄》 권29, 태종 15년 4월 癸亥.
4) 《世宗實錄》 권1, 세종 즉위년 8월 丙申 “巨濟南海二島 倭賊往來之地 近年以來 賊變寢息 因此 人民避役于二島 南海二百餘戶 巨濟三百六十餘戶 萬一有變 則必爲所掠若不禁二島居民 則當置守城軍 以嚴守禦.”
5) 《世宗實錄》 권4, “三軍都體察使李從茂率九節制使, 發巨濟島, 至海中風逆, 還泊巨濟.”
6) 是日巳時, 李從茂自巨濟南面周原防浦發船, 復向對馬島.
7) むくりこくり、鬼来るぞ (무쿠리고쿠리, 귀신이 온다)
8) 郷土玩具 ‘壱岐島ムクリコクリ’(향토완구: 이키섬 무쿠리고쿠리) 長崎県壱岐の島(나가사키현 이키섬)
9) 第11回通信使のとき対馬の孝行芋(サツマイモ)が朝鮮に伝わる ⇒ 韓国では〈コグマ〉 という-1764(宝暦 14)
제11회 통신사 때 대마도 효행우(사쯔마이모)가 조선에 전해지다 ⇒ 한국에서는 ‘고구마’라고 불리다-1764년
《日本遺産 「国境の島」 壱岐·対馬·五島 交易·交流と緊張の歴史》〔2018年(平成 30) 3月(編集·発行 長崎県文化観光国際部文化振興課)〕
《일본 유산 ‘국경의 섬’ 이키·쓰시마·고토 교역·교류와 긴장의 역사》〔2018년 3월(나가사키현 문화관광국제부 문화진흥과에서 편집 발행)〕, P.215.
10) 《 고려사절요》 권19 원종 15년 10월(《高麗史節要》 卷19 〈元宗 十五年〉 冬十月) “… 以蒙漢軍二萬五千我軍八千梢工引海水手六千七百戰艦九百餘艘, 發合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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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