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거제도에 남은 ‘삼도수군통제사비’의 흔적 - 천종우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초대 통제사로 이순신(1593. 8~1597. 2)이 임명된 이후, 제2대 원균(1597. 1~8), 제3대 이순신(1597. 8~1598. 11), 제4대 이시언(1599. 1~1601. 5), 제5대 류형(1602. 1~1603. 2), 제6대 이경준(1603. 2~1605. 9)이 거제 오아포, 한산도, 춘원포 일대에서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제208대 홍남주(1894. 10~1896. 5)를 끝으로 1895년에 폐영되었다.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성이 부각되었던 거제도에서 삼도수군통제사의 흔적을 찾아 본다.
제187대 삼도수군통제사 신관호
1861년 52세의 나이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11개월의 근무를 마친 후 고종이 취임한 1864년 형조, 병조판서를 거쳐 공조판서(자헌대부 정2품)를 지냈다.
資憲大夫三道統制使申公觀浩永世不忘碑 烝黎 顯望 咸載其功 土沃鎭樣 船橋民癈 山命復乳 浦頌還珠 曰恩曰德 刻以不忘 乙丑(1865) 五月 日 立
정성을 다하여 보살펴 우리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백성들을 골고루 잘살게 해 주었다. 진영의 논밭은 모양을 갖추고 함선의 장비도 잘 정비하였고 백성들의 질병도 고쳐 주었다.
산도 즐거움을 노래하고 우리들은 다시 태어난 것 같으며 포구의 백성들은 보배로운 분이 다시 돌아왔다고 칭송하였다. 은혜로움을 말하고 큰 덕을 말하기 위하여 이 비석을 새겨 놓으니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통제사로 재임 중이던 1862년 이양선의 출몰 등으로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국방의 중요성과 체제 정비를 담은 민보집설을 펴냈다, 그는 단순한 무인이 아니라 정약용의 실학을 배워 이를 개화사상으로 발전시킨 개화파의 한 사람으로 외국과의 조약 체결에 더 잘 알려져 있다. 지세포 선창마을에 신관호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제107대 삼도수군통제사 조경과 제142대 삼도수군통제사 조심태
통제사 조경의 생애(조심태의 父)
107대 삼도수군 통제사 조경은 1739년 7월부터 1741년 3월까지 1년 8개월을 재임하였다. 칠천량 패전으로 한산도 진영이 불에 탄 이후 방치되었던 운주당을 중건하고 한산대첩을 기념하는 유허비를 세웠다. 조경 통제사는 통영 충렬사에 장서를 마련해 기증했는가 하면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있어 어진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한 이유로 사등면 오량리에 그의 선정비가 세워졌으나 약 40여 년 뒤 그의 아들 조심태(142대 통제사)가 부임해 왔을 때 아버지 조경이 가선대부를 받지 않아서 묻었다는 설과 천한 역졸이 세운 선정비라고 해서 조심태가 선정비를 묻었다는 설이 있다. 1976년 경지 사업 때 사등면 신계마을에서 발굴되어 다시 복원되었다.
(좌) 嘉善大夫三道統制使趙公儆愛恤驛卒碑 (가선대부삼도통제사조공경애휼역졸비) 백성들이 조경 통제사가 베푼 선정을 흠 모한다는 내용의 비석 (우) 通制使趙公儆善政碑埋置處 (통제사조공경선정비매치처) 불효자 조심태가 비석을 묻는다
통제사 조심태의 생애
29살에 무과에 급제하여 48살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뒤 좌포도대장과 총융사를 역임하였다. 정조가 수원을 신 도읍지로 염두하는 시점에 수원부 유수가 되어 정조의 두터운 신뢰 속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겨오고 수원화성의 성공적인 축성과 봉수대를 설치하는 등의 업적을 통제사 조심태의 초상화 쌓아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정조가 조심태에게 보낸 15통의 비밀편지를 통해 왕의 신임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무관으로 보기 드물게 명필이었으며 큰 글자를 잘 썼다고 한다. 군제는 물론이고 지리와 율령, 농정까지 통달한 선비형 무장이 었다.
▶ 통제사 조심태의 초상화
친일반민족명단에 오른 제199대 삼도수군통제사 정낙용
1879년 53살에 통제사에 오른 정낙용은 1880년 1월 통제영의 장부상 자금 8만 냥이 실제로는 없는 돈이라고 조정에 보고 하여 이전 통제사들의 잘못을 들추어 내었으나 1883년 병조참판에 오를 때 통제사 시절의 부패 혐의가 드러나 1883년 6 월에 한양 도성 네거리에서 죄상을 공개한 뒤 전라도 지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향리에 쫒겨났다가 사면되었다.
▶ 삼도수군통제사 정낙용 초상화
嘉善大夫行三道統制使鄭公洛鎔遺惠碑 가선대부행삼도통제사정공낙용유혜비 崇貞紀元后五庚辰五月秋軍卒等立 숭정기원후오경진오월추군졸등립
통제사 재임기간 통제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군졸들이 건립한 유혜비
이후 뛰어난 처세술로 주요 요직에 발탁되었으며 구한말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경술국치에 적극 협조했고 일제강점기에는 귀족 남작 작위를 일본 정부로부터 받았는데 너무 기쁜 나머지 밤을 새워가 며 주연을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 경남도에는 “정낙용은 부처님일세 구관이 명관이야”라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이 말은 정낙용도 통제사를 지내면서 돈을 긁어모아 거부가 되었으나 206대 통제사 민형식에 비교하면 양호하다는 뜻인데 최악의 통제사 중 한 명이 정낙용이었던 것이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