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최전방 거제의 통신수단 ‘봉수대’ 이야기 - 조정래
남해안의 최전방 기지 거제도
한반도는 유사 이래 북쪽으로부터는 유목민족, 남방에서는 왜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침탈을 받아왔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변방에 봉수대를 정비하고 중앙에 신속하게 알리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그리하여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요해처 곳곳에 봉수대가 설치되었다. 그중 거제도는 한반도를 침략하는 왜구가 식수와 땔감을 얻기 위해 가장 먼저 선착하는 지역 중 하나였다. 특히 조선 전기에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와 매우 인접했기에 거제도에 많은 봉수대가 증설되기 시작하였다.
이 장에서는 거제도에 설치된 봉수대의 설치 연혁, 위치, 기능 등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역사 속에서 거제도의 해방(海防) 역할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1. 가라산봉수대
거제도 내부에는 조선 전 시기에 걸쳐 9개의 봉수대가 설치되었다고 파악된다.1) 그중 가장 먼저 설치되었으며 오랫동안 사용된 곳은 가라산봉수대다.2) 가라산은 거제시 남부면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 585m 높이의 거제도 내 최고봉이다. 본섬 최남단에 위치하여 맑은 날은 대마도를 비롯한 대한해협과 남해바다를 넓게 조망할 수 있으며 북쪽으로도 계룡산이 조망될 정도로 그 시계가 넓다. 그 때문에 가라산은 왜선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용이하였고 조선시대 이전부터도 활발히 활용되었음이 확인된다.
고려 충렬왕 28년(1302년), 원(元)에 상서한 내용을 보면 ‘본국의 군관과 군인을 뽑아 합포·가덕·동래·울주·죽림·거제 등에 보내어 요해처 입구와 길목 및 탐라 등에 나누어 배치하고 봉수를 설치하였으며’라는 기록이 전한다. 이곳이 가라산봉수대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충혜왕 초 김문귀라는 인물과 김보가 가라산 방어소로 유배 보냈다는 기록을 보면3), 충렬왕이 말하는 봉수대는 가라산봉수대임이 확실해 보인다.
가라산봉수대는 조선이 개국되고 거제현이 복구된 이후에도 가장 먼저 봉수대로 활용되었다. 1425년 편찬된 《경상도지리지》를 보면 가라산 봉수는 “현의 남쪽 35리에 있으며 처음 불을 피우는 장소”라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신호는 서쪽 바닷길로 30리 거리에 대응 봉수대인 미륵산봉수대로 전달되었다고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경상도속찬지리지》까지도 가라산 봉수는 거제현의 유일한 봉수로 기록되어 있다. 거제현이 공도정책으로 비워진 이후 복구되는 과정 초반에서 거제도 인근 해역의 첩보는 오직 가라산봉수대를 통해 중앙으로 전달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후기에도 가라산봉수대는 거제도에서 가장 핵심적인 봉수대였다. 《증보문헌비고》를 보면 ‘거제도에 있는 5개의 봉수대가 모두 각자 거화(擧火)하여 가라산 에 합쳐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라산봉수대는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 지도 1 조선 후기 제2로 간봉 봉수 노선 지도 4)
2. 계룡산 봉수대
15세기 후반, 거제도의 중심부인 계룡산에 봉수대가 추가로 설치되었다. 계룡산은 해발 566m로 인근에 이보다 높은 산이 없다. 고현면 일원과 서쪽 통영 해안까지 볼 수 있는 넓은 시야와 조망권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계룡산은 새로운 읍치로 설정된 고현읍성의 배후에 있다. 거제 현령과의 연결을 짐작할 수 있는 위치에 새로운 봉수대가 건설된 것이다.
계룡산봉수대의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기록상 《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하므로 설치 연간은 《경상도속찬지리지》가 작성된 예종 원년(1469) 무렵부터 《동국여지승람》이 작성된 성종 12년(1481년) 사이일 것이다. 봉수대가 폐지된 시기도 정확하지는 않다. 1757년(영조 33년)에 편찬된 《여지도서》를 보면 ‘금폐(今廢)’, 즉 지금은 폐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계룡산봉수대는 18세기 후반 무렵 그 기능을 다하고 폐지된 것이다.5)
계룡산봉수대는 특이한 점이 많다. 왜선들이 출몰하는 바닷가가 아닌 거제도 한복판에 위치했다는 점과 가라산봉수대에서 미륵산봉수대로 보내던 신호를 대신 전달했다는 점이다.6) 동북 해안가 수군진과 봉수대에서 수집한 정보를 현령이 신속하게 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봉수대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계룡산봉수대가 15세기 들어 추가로 설치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계룡산봉수대는 넓은 거제도 해안선의 첩보를 통할(統轄)할 수 있는 최적지였던 것이다.
3. 강망산봉수대
강망산은 덕포동에 위치한 해발 361m의 산인데 옥포만과 같은 거제도 동쪽 해안을 살펴보기에 용이하다. 강망산봉수대는 강망산에서 해발 228m 평지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강망산봉수대는 직접 중앙으로 봉화를 피우는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가라산, 계룡산봉수대 같은 간봉 봉수를 보조하기 위해 설치된 권설봉수(權設烽燧)다.7) 계룡산과 가라산봉수대 같은 간봉 봉수만으로는 복잡한 해안의 구석까지 감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설치된 것이다.
강망산봉수대는 운영 시기가 짧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문헌 기록이 거의 없다. 하지만 봉수대 지표 조사에서 출토된 기와의 문양, 백자의 파편 등이나 축조 기법으로 볼 때 조선 전기에 만들어졌다고 여겨진다.8) 15세기에 초축되어 이후 어느 시기에 폐지되었다가 18세기에 다시 복구되어 재사용되었다는 것이다.9)
강망산봉수대의 설치 시기가 15세기 무렵이라면 계룡산봉수대가 설치된 1468~1481년을 즈음하여 병설되었음이 유력하다고 생각된다. 계룡산봉수대를 설치하며 거제도의 통신망을 세밀하게 재편해 나가는 과정에서 함께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또 15세기 말은 전국 요해처에 수군 진성이 추가로 많이 축조되던 시점이다. 따라서 강망산봉수는 거제도 동쪽 해안에 위치한 옥포진과 조라포진 등의 수군진이 보강되는 시점에 함께 건설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4. 와현봉수대
거제도 동남쪽 해안 끝에는 와현봉수대가 설치되었다. 와현봉수대는 일운면 와현리 망산 정상부(304m)에 건설되어 있다. 인근에 지심도, 내도 및 외도, 공곶이 유적 등이 있으며 대마도로 가는 바닷길이 한눈에 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기상 상태가 좋은 날에는 대마도에서 나오는 선박의 모습도 조망될 정도로 거리가 가깝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지세포진이나 조라포진이 설치된 시기에 일찌감치 봉수대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사진 1. 와현봉수대 전경 10)
와현봉수대의 설치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또 문헌 기록상 《대동지지》(1866)부터 나타난다. 하지만 강망산봉수대와 마찬가지로 출토 유물은 조선 전기의 것으로 측정된다.11) 아마도 세조 3년(1457) 지세포와 조라포 사이에 후망(候望)을 설치하고 본진의 군인들이 지키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12) 이때 수군진의 병사들이 바닷가를 경비하는 간이 봉수 형태로 처음 운영되었다가, 강망산 봉수대처럼 권설봉수로 증축된 것이 아닐까 싶다.
5. 옥녀봉봉수대(옥림산 봉수대)
옥녀봉봉수대는 거제시 중앙부에 위치한 옥림산의 줄기인 연대골 산등성이 해발 226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김정호가 펴낸 《大東地志》를 보면 거제도에 옥림산봉수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옥녀봉 봉수를 의미한다고 보인다.
옥녀봉봉수대는 먼저 서술한 봉수대에 비해 기록상에 등장하는 시기가 조선 후기이다.13) 따라서 설치 시기는 정확히 추측할 수 없지만 19세기 무렵으로 생각된다. 둘레가 141m로 경상도 해안가에 위치한 다른 봉수대들의 평균인 97.6m보다 크다.14) 따라서 해안가의 봉수대 중에서도 봉수군의 규모가 많았을 것이다. 또한 그 규모를 유지하기위해 무기, 방어 체제, 기반 시설의 양과 크기도 여타 연안 지역 봉수대보다 컸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옥녀봉봉수대는 그 입지상 인접한 수군진인 지세포진과 옥포진에서 오는 신호를 주고 받는 권설 봉수대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미 설치되어 있던 강망산봉수대, 와현봉수대 등과 협조하여 왜선을 정밀하게 관측하는 한 축을 담당하였다.
거제도 봉수대의 작동 체계
일반적으로 봉수대들은 함께 증설되기 시작한 수군진들과 함께 묶여서 작동되었다. 수군진의 활동에는 첩보가 중요했다. 수군진은 바닷가에 위치했고 인근 높은 봉우리에 봉수대가 짝지어져 설치되었다. 수군진과 비슷한 시기에 설치된 각각의 봉수대는 수군진과 유기적으로 협조하며 해상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 지도 2 15세기 말엽 거제도의 봉수대 편제15)
15세기 무렵까지 거제도에 설치된 봉수대와 수군진이 연계되어 동된 모습을 지도상에 재구성한다면 〈지도 2〉로 나타낼 수 있겠다. 거제도 각 지역 해상 첩보는 각 봉수대를 통하여 섬의 중심부인 거제현으로 집중되었다. 거제현에서 1차적으로 확인된 정보는 자세한 경위를 담은 장계로 작성되어 육로는 오양역을 통해 뭍으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왜적의 침입과 같은 촌각을 다투는 보고는 봉수대의 거화, 연기를 통하여 직결된 미륵산봉수대로 전달되었다. 이 정보들은 중앙으로 전달되어 왜적에 대한 대처로 이어질 수 있었다. 요컨대 거제도는 봉수대라는 정보 체계를 잘 활용하고자 많은 시도가 이루어졌던 지역이었다. 조선 조정의 해방 체제 작동에 일조하는 남해안 왜구 전선 최전방 기지였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1) 심봉근, 이동주, 〈거제 강망산봉수대 정밀지표조사 보고서〉, 《석당논총》 85, 2002, P.55. 2) 《전국 봉수유적 기초학술조사》, 문화재청, 2015, P.166. 3) 《고려사》 권32, 세가32, 충렬왕 28년 12월/ 《고려사》 권108, 열전21, 김이/ 《고려사》 권114, 열전27, 김보. 4) 앞의 책, 문화재청, 2015, P.277. 5) 심봉근·이동주, 위의 논문, 2002, P.53. 6) 《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고성현 “彌勒山烽燧 東應 巨濟縣 鷄龍山” 7) 홍성우, 창원대 박사학위논문 〈조선시대 봉수대와 봉수군 연구〉, 2021, P.104. 8) 심봉근·이동주, 위의 논문, 2002, P.55. 9) 홍성우, 위의 논문, 2021, P.133. 10)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술연구총서 제59집 《경남지역 봉수 II-경남·부산·울산의 연변 봉수》, 2013,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P.31. 11) 홍성우, 앞의 논문, 2021. P.135. 12) 《세조실록》 권9, 세조 3년 9월 戊子(27일). 13) 이철영·남상욱, 〈조선시대 경상도지역 봉수 연구〉, 《대한건축학회연합논문집》 44호(제2권 제4호). 2010, P.161. 14) 이철영·남상욱, 위의 논문 158쪽의 표를 참고하여 작성. 15) 심봉근, 이동주, 위의 논문 18쪽을 참조하여 재구성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