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남부면 근대 역사의 남겨진 문화유산 - 옥광석
● 근포마을 땅굴
근포마을 뒤편 바닷가에 5개의 땅굴(길이 20~50m, 높이 5m)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41년 일본군이 외지인 보급대를 동원하여 발파 작업 등으로 포진지 용도로 굴착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중단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2015년 당시 윤치원 마을 이장의 모친(당시 92세. 현 작고)께서 18세 때 시집오니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굴착을 시작하였고, 김부관(당시 84세) 마을 어른은 당시 10살 때 발파작업을 하면 멀리서 구경하며 뛰놀았다고 전하며, 이 두 어른의 이야기를 들어 그 유래를 알 수 있었다.
2015년 최초 탐사를 시작하였고 지금은 SNS 등에 유명한 포토존으로 널리 알려져 수많은 관광객이 연중 찾고 있다.
▶ 2015년 발견 당시 모습
● 쌍근마을 포진지
쌍근마을 위 산고개 무지개길을 넘어가다 보면 오른편 산중턱 끄트머리 절벽(30m) 위에 일제강점기 때 설치된 포진지 6개가 나온다. 2014년 당시 마을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일본군이 판 “대박구덕”이 있다길래 현지 확인하니 산 능선을 따라 계단 형식으로 된 대포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어른들의 지역사투리 대박구덕(대포구덩이)으로 발음되어 전해져 내려왔고 어릴 적 대포 소리를 들었다 한다. 발견 당시 오랜 세월 묻혀 있어 크고 작은 잡목들이 많이 우거져 이를 2015년 정비한 결과 대포 구덩이 규모(길이 8m, 폭 5m, 깊이 3m)의 형태가 나타났다. 또한, 인근에 일본군 관할 1.3m 높이의 화강석의 표지석 ‘大日本帝國 海軍所轄地’가 발견되어 현재 면사무소 창고에 4 개가 보관되어 있다.
(좌) 포진지 (우) 일본군 표지석
● 천장산 레이더 기지 터
▶ 레이다 기지 터 붉은 벽돌 및 대삼각점
거제의 최남단에 있는 천장산(높이 275.5m) 정상에는 1904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레이더를 세웠던 곳으로 지금도 붉은 벽돌의 구조물과 넓은 기지 터가 남아 있다. 또한 산 정상에는 1914년 5월 1일 지적 세부측량을 시작할 때 일본의 대마도에서 32해리 60㎞를 삼각점으로 측량 경상남도 제1호를 매설하여 우리나라 지적도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여차마을 주민에 의하면 당시 일본군 소대 병력이 주둔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산 아래에 일본군이 먹던 우물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산 정상에 오르면 대한해협이 눈앞에 펼쳐져 멀리 대마도를 조망할 수 있고 좌우를 돌아보면 매물도, 해금강 등 경치가 환상적이다.
● 탑포산성과 절충장군 묘
탑포마을 위 지방도를 따라 고개에 다다르면 오른쪽에 나지막한 산이 보이는데 이곳을 ‘시루봉’이라 부르며 이곳 정상에 작은 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성곽 주위는 대부분 허물어지고 빙 둘러 186m 규모의 작은 산성이다. 이 산성의 정상에는 조선시대 정3품 무관 벼슬인 절충 장군(折衝將軍) 묘가 있다. 오랜 세월에 봉분은 많이 낮아 있었 고 비문을 확인 결과 공의 이름은 수항(壽恒)이고 조선 21대 영조왕 계유년(1753년) 2월 29일 태어나시고, 23대 순조왕 신사년(1821년) 1월 9일 돌아가셨다. 동부면 율포마을의 “광정공파” 최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시루봉 정상의 절충 장군 묘
● 남부면 포로수용소 잔존 유적
남부면에는 6·25 때 옛 신현읍(장평, 고현, 상문, 수양동) 관내의 포로수용소와 더불어 저구, 명사, 다포마을에도 많은 포로가 수용되었다 한다. 인근 용초도 섬에도 악질 포로와 그 수용소 잔재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지리적 근거리에 위치함에 따라 함께 포로를 관리하지 않았나 추측할 뿐,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농경지로 일구고 일부 잔재만 남아 있을 뿐이다.
(좌) 군무원으로 근무한 다대마을 신영규 씨 (우) 명사마을 포로수용소 잔존 유적
● 대포마을 당산제(堂山祭)
대포마을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에게 마을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마을 제사를 1980년대 초까지 마을 안 당산나무(팽나무, 일명 포구나무)에서 매년 고유봉 어른이 제관으로 선정되어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마을 안에 그 당산나무가 서 있다. 2015년 당시 고유봉(현 작고) 어른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제관으로 선정되면 매일 목욕재계와 매사에 근신하여야 하며, 제날은 음력 12월 20일에 날을 정하되 이듬해 정월 초 3일과 5일 중 택일했다. 제날을 받은 후부터 제날 당일까지 마을에 초상이 났을 경우 당산제는 지내지 않고 대신 당산신께(당산나무) 신고만 하고 양해를 구하며, 특히 제날을 받은 이후부터 정월달에 출산예정 임산부는 마을 밖으로 나가서 출산하고 정월달이 지나서 돌아와야 했다. 제물상은 집집마다 정성껏 준비하되 마을에 제일 먼저 입거한 집 순으로 상을 앞에서부터 차리며, 제는 남자 웃어른부터 그다음 여자 순으로 지냈다. 제가 끝나면 남은 음식을 가지고 마을 앞 바닷가에서 용왕신께 제를 올리는데 이때는 남자만 참석했다.
▶ 당산제의 상차림
● 남부면 숭어둘이(숭어들망어업)
다대와 다포마을이 있는 앞바다는 숭어잡이로 유명하다.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떼를 지어 다니는 특성으로 매년 2월에서 6월까지 이곳 앞바다를 지나는 숭어를 건져 올리는 육소장망(일명 숭어둘이) 어업을 마을 공동으로 하고 있다.
숭어 떼 길목의 관찰이 용이한 망루에서 망수(일명 망쟁이)가 바닷물 빛깔과 물속의 그림자와 물살 등의 변화를 관찰하여 어군을 판단하고 그물을 들어올려 잡는 어법으로 지금도 100년이 넘도록 그 전통적인 방식으로 어업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숭어둘이는 정식명칭이 숭어들망어업인데 국가중요어업유산 12호로 지정(2022. 8. 17)되어 전국에 7곳이 있는데 거제에 6곳이 있다.
▶ 망루와 그물에 잡힌 숭어 떼
● 남부면 해녀
▶ 다대마을 해녀(2016년 5월)
남부면은 일제 해방 전부터 관내 12개 마을마다 해녀들이 있었고, 젊은 처녀 및 주부를 상대로 물질을 가르쳐 1950년대에는 약 200여 명의 해녀들이 있었다. 주로 봄에 마을마다 해녀사업을 하는 사람이 제주도 해녀들을 모집하고 선주들이 데려오면 가을 무렵에는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고 일부는 지역에 남아 정착하기도 했다. 미역, 우뭇가사리, 전복, 소라 등을 채취하는데 주로 미역을 많이 채취하였으며 말려 놓으면 매년 외지 상인들이 찾아와 개별로 100kg 이상의 많은 양을 사갔다. 수입금은 선주 70%, 해녀 30% 배분하며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하면서 억척 스럽게 생활하다 지역민과 결혼 정착한 해녀들이 80년대까지 20여 명에 이르렀다 한다. 23년 현재는 6~7명의 해녀만 다대, 다포마을 일부에서 물질을 하고 있으나 이마저도 대부분 60~80대의 나이로 대를 이을 해녀들이 없다.
※ 위 해녀 이야기는 2023년 11월 다대마을 주민오(86세), 박영연(85세), 근포마을 김하일(81세), 대포마을 해녀 이명숙(65세)으로부터 면담하여 작성한 것이다.
- 거제 역사의 남겨진 이야기 (거제문화원, 2023년 1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