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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중랑구 서울특별시 중랑구 정보
서울특별시 중랑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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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중랑구의 마을 소개
중랑구의 생활문화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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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3. 23:51) 
◈ 중랑구의 생활문화자원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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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활문화자원

 

1.1. 전통생활민속

◈도당제
도당제는 매년 음력 삼월 삼짇날(3월 3일) 봉화산 정상에 있는 도당에서 신내동, 상봉동, 중화동, 묵동 토박이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400여 년의 전통을 이어오는 대동제이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묵동토박이들은 묵동을 내려다보는 산중턱에서 따로 도당제를 지내고 있다. 도당제는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고 전통문화유산을 보존, 계승한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능말 경주임씨 집성촌
능마을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이 동구릉으로 행차하던 길목에 있던 마을로 현재 경주임씨가 약 50호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원래 경주에서 살다가 임진왜란 이후 이주, 정착한 300여 년 된 집성촌이다. 신내동 98번지와 105번지는 전통가옥이 남아있고, 부근에 경주임씨 묘역이 있으며, 교지, 문건, 우마차, 여물통, 옹기 등 생활사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양원리 동래정씨 집성촌
양원리는 구릉산 남서쪽 망우동의 자연촌이며, 조선시대 역대 왕들이 태조 건원릉에 행차할 때 지났던 마을로 동래정씨가 600여년전부터 16대에 걸쳐 모여 살고 있는 집성마을이다. 양원리는 조선태조가 건원릉을 정하고 오는 길에 망우리 고개를 넘다가 갈증이 생겨서 이 곳 우물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하도 좋아서 양원수(養源水)라 하여 붙여졌으며, 현재는 우물의 자취만 남아 있다.
 
 

1.2. 구전설화

◈중랑이야기
조선시대에는 중랑천 근방에 국립 여관인 송계원이 있어서 중랑천을 송계라고 불렀다고 한다. 송계교를 석교로 개축할 때 인근 마을의 장정은 모두 부역으로 동원되었는데 열여섯 살 되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 장님 중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를 안 딸은 아버지 대신 부역을 하겠노라고 관아를 찾아가 간청하자 부역허가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반드시 남장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참여했으나 생리현상이 문제였다. 생각 끝에 그녀는 대나무를 잘라서 옷 속에 넣어 관을 통해 서서 배뇨를 할 수 있게 하고 되도록 적게 수분을 섭취해서 가능한 배뇨횟수를 줄이도록 노력했다. 이런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들은 관아에서는 마침내 중이의 부역을 해제함으로써 부역을 대신하던 딸도 눈먼 아버지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남자로만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를 중낭자(仲郎子)라고 불렀으나 그가 사실은 남장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녀를 중랑(仲狼)이라 불렀고 다시 중랑(中浪)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장사바위
옛날 서울에서 전국 장사모임이 있었는데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경상도 장사가 허겁지겁 짐을 꾸려 서울로 오던 도중 집으로 돌아가는 강원도 장사를 만났다. 강원도 장사는 “서울 도성 문을 닫을 시간이 다 되었고, 오느라고 기운도 다 빠졌으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상도 장사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상봉동까지 왔을 때 몹시 갈증이 나서 중랑천의 물을 마시기 위해 엎드리자, 바위에 손과 무릎의 자국이 깊게 패이게 되었다. 물을 마시고 일어나는데 포졸들을 앞세운 마을 사람들이 “저 사람이 냇물을 모두 마셔 농사를 지을 수 없음은 물론 식수마저도 없어져 버렸으니 이는 요물임이 틀림없다”며 에워 쌓는 것이었다. 장사는 “나는 요물이 아니고, 단지 강원도에서 온 사람이 먼저 물을 마시고 남은 물을 조금 마셨는데 죄가 되느냐”며 오히려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관아로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받고 죽음을 직전에 둔 그는 “내 한이 물을 말려 사람이 살 수 없는 검은 땅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며 저 중랑천은 해마다 홍수로 넘쳐흘러 농사를 망치게 될 것이다”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 후 해마다 중랑천은 범람하였고 엎드린 자국이 생긴 바위가 있던 마을 일대는 검은 가루(석탄)가 날리는 곳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성덕사
중화동 303-10번지에 있는 성덕사는 1957년 대지 800평 위에 신설된 사찰로 이곳은 터가 세서 사람 살 곳이 못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말 노부부가 땔감을 하러 산으로 갔는데 아이 키만큼 자란 나무가 빽빽하게 모여있는 곳을 발견하고 부지런히 도끼질을 하며 ‘이제 마지막 나무구나!’ 하고 힘껏 도끼질하여 드디어 마지막 나무가 쿵하고 쓰러지자 지금껏 해놓은 나무를 보기 위해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쓰러뜨린 나무는 한 그루도 누어 있지 않고 원래대로 빽빽하게 서있는 것이었다. 나무꾼은 혼비백산하여 마을로 돌아와 이 사실을 동네사람에게 알렸다. 이때 지나가던 승려가 “그곳은 과거에 호열자가 나돌 때 채 죽지도 않은 아이들까지도 한꺼번에 내다 버려 어린이들의 원한이 서린 곳이니 매년 정월 보름에 짚으로 만든 인형에 이름을 써서 나무에 걸어놓고, 애동지가 들었을 때 절대 팥죽을 쑤어 먹지 말아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만한 숫자의 아이들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해 봄 질병이 크게 유행해 아이들이 많이 죽게 되었으나 한 과부만이 이를 지켜 과부의 아이들은 무사하였다고 한다. 그후에도 여러 사람이 다치는 일이 많았지만 1957년 대한 불교 조계종 성덕사라는 절이 건립된 다음부터는 마을에 액이 떠다니는 경우도, 사람이 사고로 다치는 일도 없어졌다고 하니 이는 성덕사가 치성을 대신 들여주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먹골배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대항하여 단종복위 운동을 꾀한 사육신은 처형당하고 단종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가게 되었다. 이때 호송을 책임졌던 금부도사 왕방연은 단종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 목적지까지 가슴 졸이며 호송한 후, 서울로 돌아와 관직을 그만두고 봉화산 아래 중랑천 가에 거주지를 선정하여 날마다 필묵과 벗을 하며 키우기 시작한 것이 배나무였다. 유배지를 떠나는 단종이 갈증으로 인해 물을 마시고 싶어했으나 물 한 그릇도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매년 단종이 승하한 날이 되면 자신이 가꾼 배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후에 왕방연의 무덤은 후손에 의해 이장되었으며 그가 손수 심었다던 배나무만 무성하게 자라서 이 일대가 배나무로 유명한 명성을 날렸다. 먹골배는 왕방연의 눈물과 정성이 배에 스며들어 단 듯하면서 혀끝에 여운이 남고 씹을 수록 단맛이 난다고 한다.
 
◈신(申)장사
망우동 359번지 일대는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방면에서 서울로 오는 길목 역할을 하던 곳으로 망우리 고개를 기점으로 길손이 쉬어 가는 주막거리였다. 주막거리 부근에는 세 살 때 돌절구를 번쩍 들고 다섯 살에 아름드리 서낭목을 뽑아 올릴 정도로 힘이 장사인 신(申)씨가 살았다. 신장사가 스물 한살이 되던 해에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관직을 받기 위해 대기상태이던 어느 날, 주막거리에 나갔는데 왕의 행차를 알리는 깃발이 나타나고 곧 호위군사들의 길을 비키라는 호령이 있었다. 호위군사들은 모든 사람들을 엎드리게 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신장사는 말을 듣지 않아 대여섯 군졸이 몰려나와 서로 당기고 밀던 중 신장사에게 잡힌 호위대장이 근처 개울로 쳐박히는 소동이 일어났다. 이를 본 임금은 비록 불손하다 생각되나 힘이 장사인데다 대담한 성격도 지닌 것 같아 호위대장의 밑으로 오게 하여 왕의 행차 때마다 호위를 담당하게 되었다. 어느날 왕의 행차 중 갑자기 강풍이 일어나서 모든 것들을 날려 버렸고, 왕의 어가도 날려 가려하자 군사 여럿이 잡아도 소용이 없었다. 겨우 신장사가 달려 와서 어가를 잡아 나무에 고정시킴으로써 왕이 무사할 수 있었다. 그후 신장사는 임금의 신임을 받아 빠른 출세 길로 접어들어 재상의 지위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박수고개
옛날에 한 나무꾼이 구릉산에서 숱하게 많은 나무를 하면서도 한 번도 산신께 제사를 드린 적이 없어서 산신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해질녘에 능마을에서 구릉산으로 가려면 반드시 박수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종일 비가 내려 땅이 질퍽거리고 물안개로 사방을 분간하기 어렵고 게다가 막 고개를 넘으려는데 “네가 넘어뜨린 소나무에 살던 귀신이다. 오갈 데가 없으니 네 몸을 내 집으로 대신 삼겠다”며 커다란 물체가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가까운 곳에서 박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치는 우뢰와 같은 소리였다. 이 소리 때문에 소나무 귀신은 물러났으며, 후에 나무꾼이 정신을 차려 박수소리를 다시 들으니 짐승들이 일부러 내는 소리였다. 이 소리는 그 동안 나무꾼이 밥을 먹을 때마다 한 알, 두 알 밥알을 얻어먹던 짐승들이 내는 소리였다. 그 후 이 고개를 넘을 때는 일부러 박수를 치며 여럿이 산을 넘은 것과 같은 소리를 하였고 다 넘은 후에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낭당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1.3. 주민의 종교생활

봉화산을 중심으로 봉화도당제와 면목동의 동제가 지역 토박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각 동별로 불교, 개신교, 천주교가 주류를 이루며, 기타의 종교를 믿고 있다. 교당수는 불교·기독교·천주교가 각각 61·227·5개이며, 교직자는 93·362·16명이다.
 
◈불교극락사
망우동 73-10, ☎ (02)208-6095, 434-1717
 
◈성덕사
1957년에 건립된 성덕사는 상봉동 303-10번지에 소재하며 대지 800여 평, 건평 20평으로 인근 주민들의 복을 비는 명소이다.
 
◈개신교
·경동제일교회 : 1904년 감리교 선교사 한운설과 한국인 최성열이 창립한 중랑구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 명소로 중화동 92-1번지에 소재한다.
·금란교회 : 망우동 227, ☎ (02)208-3411∼5
 
◈천주교
면목천주교회 : 면목동 112-9 ☎ (02) 432-9221
 
◈원불교
·면목교당 : 면목 6동 113-38, ☎ (02) 433-9050, 494-9050
 
 

1.4. 주민의 생활권역

◈신아타운
지하 5층, 지상 12층 총면적 104,529.94㎡, One stop life로 한번 들어와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구입할 수 있다는 취지 아래 건설되었다. 재래시장 및 각종 생활 필수품이 있다. 신내동, 상봉동, 중화동, 망우동 주민이 주로 이용하며, 9대의 셔틀버스가 움직이고 있다. 신내동 666번지, ☎ (02)494-9977
 
◈까르프
총면적은 70,608.67㎡, 층수는 단층이며 약 3만 2,000여종을 판매하고 있으며, 주로 면목동과 상봉동 주민이 이용하고 인근의 동대문구와 광진구 주민도 이용하고 있다. 교통은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 2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시내버스, 17, 19, 568, 960 이용, 면목5동168-2, ☎ (02)491-7400
 
◈이마트(상봉점)
총면적 29639.71㎡이며 지상 3층에 각종 상점, 지상 4-8층은 주차장으로 이용, 대부분 면목동과 상봉동 주민이 이용하며, 교통은 지하철 7호선 상봉역에서 도보로 10분, 자체내에서 14방향의 셔틀버스가 운행, 망우2동 506-1, ☎ (02)490-1234
 
 

1.5. 지역의 토산품과 특산품

◈ 먹골배
왕방연이 관직을 그만두고 봉화산 아래 중랑천 가에서 키우기 시작하였으며, 먹골배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 봉화산 기슭에서부터이고, 지금의 묵동에서 신내동, 남쪽으로는 중화동, 상봉동 일대 전체가 먹골배 밭으로 형성되었다. 먹골배는 이곳의 토질이 모래가 많이 섞인 사질토양으로 배나무 생육에 알맞은 토질이며, 유달리 달고 수분이 많은 것이 특징이고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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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