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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양천구 서울특별시 양천구 정보
서울특별시 양천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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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005년 6월 13일
양천구의 역사문화자원
2005년 6월 3일
about 서울특별시 양천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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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3. 23:51) 
◈ 양천구의 역사문화자원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삼국의 각축장 경인지역의 첫 발판, 고려 왕실의 휴양지였던 연꽃 군락지와 양천팔경, 철거민 이주지에서 서울 서남권 중심지로 / ◈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허선문(許宣文), 허공(許珙), 허준(許浚), 허종(許琮), 허엽(許曄), 허난설헌(許蘭雪軒), 허완(許完), 김도연(金度演)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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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삼국의 각축장 경인지역의 첫 발판
고대에는 지금의 목동 신시가지가 저습 침수지대로 드넓은 초원과 한강으로 흘러드는 안양천 등은 물고기와 각종 동물의 서식지로서 수렵과 채취경제에 의존하던 고대인들에게는 수로와 강변을 이용한 교통의 편의와 식량자원이 풍부하여 좋은 삶의 터전이 되었을 것이며, 그 증거는 주변지역에서 발견되는 고인돌 유적과 청동유물, 토성지(추정) 등으로 입증이 된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14년(BC 5년) 하남에서 백제를 건국한지 6개월만에 한강 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 백성 일부를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는 바 백제가 강성하게 된 원인도 양천지역을 첫 발판으로 경인지역을 장악하였기 때문이며, 그 후 이 지역은 통일신라가 출현하기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려던 각축장이었던 곳이다.
 
◈ 고려 왕실의 휴양지였던 연꽃 군락지와 양천팔경
목동 신시가지 주변은 『택리지(擇里志)』에 “염창사안(鹽倉沙岸)이 막혀서 물이 빠지지 않아 연꽃의 군락 서생으로 장관을 이루어 개성에서 어가가 매양 와서 연꽃을 구경하며 묵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강변은 양천 8경(이수정, 소요정, 선유봉, 양화진, 귀래정, 낙건정, 소악루, 개화사 중에서 거의가 현재 강서구에 있음)을 비롯한 절경이 많아 중국에서 오는 귀빈과 국내 풍류객이 많이 찾았으며, 특히 ‘양진낙조(楊津落照)’의 아름다움과 조선 성종대의 명신으로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던 서거정(徐居正)의 ‘한도십영(漢都十詠)’중 눈 쌓인 양화도의 경치를 읊은 ‘양화답설(楊花踏雪)’이 유명하다.
 
◈ 철거민 이주지에서 서울 서남권 중심지로
오늘의 양천지역은 1970년대 도심지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 무허가 판자집 이주민을 받아들이던 곳이었는데 1980년대에 목동신시가지 건설 사업이 이루어져서 1988년 강서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구이다.
 
이제 양천구는 의료, 문화, 교육시설이 완벽하게 정비된 최적의 주거지역일 뿐 아니라 영종도 신국제공항 시대의 관문이자 최첨단 상업지역으로서 서울 서남권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허선문(許宣文)
99세에 고려 왕건(태조)을 섬겨 견훤을 칠 때에 군량을 보낸 공이 많아 공암촌주(孔岩村主)로 봉하여졌다.
 
◈ 허공(許珙)
고려 충열왕 때 원나라 합단(哈丹)이 국경을 침범하였을 때 여러 중신의 강화 천도를 극구 반대한 충절과 강직하고 검소, 겸손한 분으로 충렬왕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 허준(許浚)
양천 허씨로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岩), 1546년 4월 15일 아버지 허론(許論)과 어머니 손(孫)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의서 대중화와 의학 집대성에 일생을 바쳤던 그는 일찍이 중국과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고, 현대 한의학에서도 백과사전과 같이 필수적으로 참고되는 『동의보감』을 저술한 크나큰 공적을 세웠다.
 
어머니가 첩이었으므로 서자 신분인 그는 전통있는 문벌과 천재적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기술관으로 내의원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엄격한 가정교육과 선대부터의 교훈으로 다져진 인격이 궁중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어 입신의 영예를 안았고, 1590년에는 왕자의 병을 고쳐서 특명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던 무리들의 모함으로 유배되는 불운을 맞기도 한 그는 갖은 인고와 싸워가며 15년간에 걸친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동의보감』을 완성하여 광해군에게 바쳤다. 광해군은 감탄을 하고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포상을 대신해서 그의 일생 일대의 숙원인 서자의 불명예를 씻어주었다. 곧 특별 교지로 “이후로 양천 허씨에 한해서는 영구히 적서의 차별을 국법으로 금한다”는 것이었다.
 
◈ 허종(許琮)
조선 단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고, 양천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얼굴이 크고 이마가 넓고 키가 12척이었다. 재주는 문무를 겸하였고, 뛰어난 지식이 신통하고 꾀가 있어 남들이 놀라는 일을 많이 했다. 북병사(北兵使)로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였다. 나가면 장사(將師)가 되고 들어와선 정승(政丞)이 되니 조정과 민간에서 명망이 높았다.
 
◈ 허엽(許曄)
조선 명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경상감사에 이르렀다. 서경덕(徐敬德) 밑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서경덕이 세상을 떠날 적에 ?G구점원리기육편(口占原理氣六編)?H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임금님을 모시고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여러 번 정직한 말로 조광조의 억울함을 씻어주기를 건의하였고, 윤원형의 간사함을 알리었다. 또한 이황과 남명 조식 등 두 어진 분들을 다시 불러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고, 국가의 근심 걱정이 임금의 외척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을 진정하였다. 이에 모든 간사한 무리들이 곁눈질을 하며 미워하였다.
 
◈ 허난설헌(許蘭雪軒)
허엽의 딸로서 글짓기를 잘하였으며 작품에 「원규가(怨閨歌)」와 「유선시(遊仙詩)」 등이 유명하다. 문장이 우리나라 여성 중에서 매우 뛰어나다.
 
◈ 허완(許完)
조선 선조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병자호란에 경상병사로서 보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임금을 도와 싸우려고 오다가 쌍령에서 왜군 복병과 크게 싸웠으나 군사가 모두 죽자 자신도 칼로 목을 찔러 자진하여 그 충정으로 사후 병조판서로 봉해졌다.
 
◈ 김도연(金度演)
양천 출생으로 마음이 깨끗하고 욕심이 없으며 행실이 바르고 너그럽고 친절하며 의지가 굳은 애국지사로 경제학을 전공한 정치가이다. 그는 조선 말기 일본 경응대학에 유학하던 중 일제침략으로 국치를 당함에 분개하여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의 독립선언에 참가하였다. 그 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해방 후 서대문 갑구에서 1, 3, 4, 5대 민의원에 선출되었으며 대한민국 초대 재무장관을 역임하였다.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양천구는 10여 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신시가지로서 공공기관 지정 사적지나 유형문화재, 기념물은 없고 다만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비지정 유적과 기념물 몇 곳이 있을 뿐이다.
 
◈ 열녀문
양천구 신월2동 606-3 열녀문의 주인공인 부인 이씨는 전의 이씨 명문의 귀한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행실이 단정하며 재주가 뛰어나고 총명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 그는 원주 원씨 가문에 출가해서 남편을 하늘과 같이 섬기며 시부모를 정성껏 모시고 동기간에 화목이 돈독하였다. 어느날 남편이 중병으로 눕게 되자 그는 동분서주하며 널리 약을 구하고 밤을 새워 간호를 하였고 남편이 운명 직전 손가락에 피를 내어 먹이는 정성을 다했으나 결국 세상을 떴다. 부인 이씨는 사별한 남편에 대한 애통함으로 단식을 하다가 20대 후반에 죽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 조정에서는 1729년(영조 5년) 부인 이씨의 높은 뜻을 백성들에게 귀감으로 삼고자 하여 열녀문을 하사하였다.
 
◈ 150년 된 느티나무
목4동 760-28, 목4동에 수령 150년 가량 된 고목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느티나무는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뜻 있는 나말(목4동의 옛 이름) 주민이 심어 가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6·25전쟁 때는 폭격을 받아 고사 상태였으나 소생하여 잘 자라고 있으며 목4동사무소에서 동민과 함께 관리하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누구든 건강을 빌면 잘 이루어졌다고 하며 함부로 훼손하면 저주를 받고 재앙이 따라서 오래 전부터 잘 보호하여 현재까지 살아있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 철곶포(鐵串浦) 자리(지금의 양화교)
옛날에 서울이라는 거대 시장을 배경으로 한강에 무수히 많은 포구가 번성하였고, 양천지역의 많은 백성들이 서울에 나무(땔감)를 팔아 생계를 이어갈 때 이 나루는 양천 사람들에게는 더 없는 중요한 통로였음은 물론 당시 김포 강화 방면에서 서울로 통하는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하여 관선 두 척으로 건너다가 나무다리가 놓이게 되었고 김포 비행장이 생기면서 시멘트 교량으로 바뀌었다.
 
◈ 목2동의 연자방아와 향나무
옛날 달거리마을(月村 , 목2동의 옛 이름)에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던 연자방아가 큰 나무 밑에 있었는데 하루 종일 소가 돌면서 방아를 찌었다고 한다. 그 연자방아가 쓸모 없게 되어 방치되다가 한 주민에 의해 보존되고 있는데 지금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수수하고 소박한 돌연자매이지만 그 속에는 달거리마을 사람들의 당시 애환이 서려있다.
 
또한 목2동 연립주택에 붙어있는 고목 향나무는 그 굵기로 보아 상당히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온 나무로 보호받아야 한다.
 
◈ 신월7동 서낭당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경인고속도로를 지나 신월3동으로 넘어가는 길 양쪽에 옛날 곰달래부락의 서낭당터가 남아 있다.
 
한글학회가 편찬한 『한국지명총람』을 보면 이 서낭당터에는 보호수였던 큰 소나무 한 그루와 돌무더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죽고 그 표시만 남아있다. 이 서낭당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곰달래 주민들에게 구심점 역할을 해 오고 있으며 곰달래부락이 사라진 지금에도 옛부락의 주민들이 모임을 만들어 음력 칠월 초하루와 시월 초하루에 이 곳에 모여 고사를 지낸다.
 
◈ 정랑고개
신정3동 산103-1, 옛날 인천 한성 사이를 과거응시, 보부상, 관료행차, 소금운반, 진상품 등의 목적으로 걸어서 다닐 때 지름길로 그 첫 고갯길이다. 그 옆은 ‘성넘어’라 부르는 곳으로 토성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길목이었기에 그 역사성을 보전하기 위하여 근래에 표지석 조형물과 정자를 세웠다.
 
◈ 백제 토성지(추정)
지표조사 ·1998년 1차 조사 : 양천구 신정동 산 106번지 일대에 위치한 신정동 토성(추정)이 백제 초기의 토성으로 알려지자 서울시에서는 이 성의 규모와 구조 등을 파악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소장 임효재)에 조사 의뢰한 결과 토성지로서의 확증을 못하고 주변 지역 정밀 조사가 더 필요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1999년 2차 조사 : 양천문화원에서 신월동 지양산 일대의 지표조사(단장 한종섭 양천문화원 이사, 향토사학자)를 한 결과 ‘댓골토성(추정)과 지양산토성(추정)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경인지역을 장악, 방위함은 물론 특히 댓골 고개와 우렁이 고개 정상은 봉화대로 이용되고, 당시 경인지방 농수산물과 소금 수송의 중요한 길목으로 군사 차단 시설(추정)을 하고 통행을 통제하여 행인, 화물 왕래의 안전과 한성 방위지역으로 추정되나 확증이 없어서 보다 정밀한 발굴 조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 중요무형문화재
◈ 판소리 제5호(91.5.1), 조상현
◈ 북청사자놀이 제15호(93. 11.15), 전광석
 
■ 무형문화재(시지정)
◈ 삼해주(민속주) 제8호(93.2.15), 이동복
◈ 화문석(초고장) 제8호(93.2.15), 한순자
◈ 체메우기(공예) 제19호(93.2.15), 최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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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