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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송파구 서울특별시 송파구 정보
서울특별시 송파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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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005년 6월 13일
송파구의 역사문화자원
2005년 6월 3일
about 서울특별시 송파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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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3. 23:51) 
◈ 송파구의 역사문화자원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삼전도비, 충헌김공 신도비 / ◈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조운흘(趙云屹, 1332∼1404), 서거정(徐居正, 1420∼1488), 김상헌(金尙憲, 1570∼1652), 홍익한(洪翼漢, 1586∼1637), 윤집(尹集, 1606∼1637), 오달제(吳澾濟, 1609∼1637), 최명길(崔鳴吉, 1586∼1647), 김구(金構, 1649∼1704), 이윤재(李允宰, 1888∼1943) / ◈ 내 고장의 문화유산 - 송파산대놀이, 풍납토성
목   차
[숨기기]
 

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삼전도비
이곳 지명을 딴 삼전도비의 원명은 「대청황제공덕비」이다. 이 비는 병자호란 3년 뒤인 인조 17년(1639) 12월에 청나라 강요에 따라 조선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거짓 표현을 써서 한강변 삼밭나루터, 항복 당했던 자리에 세워졌던 치욕의 비이다. 그 후 청·일 전쟁이 끝나자 고종 32년(1895)에 이 비를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 강점 후(1913년)에 일제가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예속되어 왔던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세워 놓았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이 비를 지역주민들이 땅 속에 매몰하였다. 1963년에 홍수로 그 모습이 드러나자, 문교부에서 원위치보다 조금 동남쪽인 석촌동으로 옮겼다가 송파대로 확장으로 현 위치에 서게 되었다. 3개국 문자가 새겨진 비로 전면 오른쪽에는 만주(여진) 글자로 20행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몽고문자 20행이며 비문은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명필인 오준, 두전은 여미징이 썼다.
 
◈ 충헌김공 신도비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내에 위치한 청풍 김씨의 비이다. 이름은 구(構), 박서채의 문하생으로 조선 후기(1649∼1704)의 문신이다. 숙종 8년(1682) 춘당대 문과에 장원급제 후 전적과 6조낭관을 거쳐 양사 청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스승의 탕평성을 따라 노론, 소론 사이의 조정에 힘썼다. 이어 황해·충청·전라·평안 4도의 관찰사를 두루 역임, 1697년 강화유수가 됨에 따라 흉년으로 모든 역사가 중단됨에도 불구하고 내전의 뜻을 받아 장령전을 건립했다가 이광좌 등의 탄핵을 받았다. 이어 판결사로 있으면서 노산군의 북위론에 동조, 이를 실현시킨 후 형조판서를 거쳐 1703년(숙종 29) 우의정까지 올랐다. 이 비의 글은 영의정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청백리 서명균이 썼으며, 두전은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의 필적으로 미술적 수법이 뛰어나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난 공의 휘호는 고성의 백천교중창비와 선산의 김수신도비에 남아있다. 시호는 충헌이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조운흘(趙云屹, 1332∼1404)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안동서기(1361년 홍건적 침입으로 남쪽으로 피난하던 왕을 호종)를 거쳐 1363년에 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감 직장에 이어서 전라, 서해, 양광 등 3도 안렴사를 지냈다. 1374년 전법총랑으로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누하옹이라고 하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이때 「기우도찬」, 「석간가」등의 시를 지었다. 1377년(우왕 3) 다시 등용되어서 판전교사사로 있다가 1380년에 사임하고, 광주 고원강촌(몽촌)으로 퇴거하였다. 그곳에서 판교원·사평원을 중건하여 원주가 되고 공사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은둔생활 8년째인 1388년(우왕 14) 전리판서로 기용되어 그해 창왕이 즉위하자, 서해도 도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후 계림부윤·강릉부사 등을 역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조선조 때 검교정당문학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몽촌에 은거하여 지내다가 태종 4년 73세로 자신의 묘지문을 손수 지어놓고 여생을 마쳤다.
 
◈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조선 초기 서울에서 태어난 문신으로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지리·의약·점술·성명·풍수에까지 통달, 문장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시에 능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이 전하며, 공동찬집으로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국선』, 『경국대전』, 『연주시격언해가 있고, 개인저술로서는『역대연표』, 『동인시화』, 『태평한화골계전』, 『필원잡기』, 『동인시문』등이 있다. 광주(경기도)의 구암서원에 제향되었다가 대구로 옮겨졌다. 시호는 문충이다. 50세 전후에 자신도 한강변에 별장 겸 우거지를 마련하였다. 처음에는 광진, 즉 아차산 아래 지금 광장동에 농장을 마련하고 수시로 나와 심신을 휴양하며 강변풍물을 시로 읊었다. 그후 죽음에 이르러서는 후손들에게 자신의 묘 또한 이곳에서 멀지 않은 현 방이동 근처에 써 줄 것을 당부하였다. 대한제국 말까지 이곳 방이동(안산)에 묘가 있었는데, 일제의 도시계획 등으로 인해 후손들이 경기도 화성군 구암서원 근방의 선산으로 이장해 갔다.
 
◈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조선 인조, 효종 때의 문신이다. 병자호란 때는 판서로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하면서, 화의를 극력 반대하고 끝내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낙향했다. 그로 해서 심양(瀋陽)에 잡혀가 3년간이나 있었는데도 끝내 굽히지 않아 청나라 사람들이 그 충절에 감동하여 돌려보냈다. 귀국 후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특히, 글씨를 잘 썼는데, 그의 서체는 동기창체(董基昌體)로, 그 필적은 「향천군정은묘갈(香泉君貞恩墓碣)」에 남아 있으며 시조 4수와 함께 『청음전집(淸陰全集)』4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正).
 
◈ 홍익한(洪翼漢, 1586∼1637)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미처 강화로 피난가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최명길 등의 화의론을 극구 반대하였는데, 이 난으로 그의 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적의 칼에 죽었고, 아내와 며느리는 적한테 붙들렸으나, 몸을 깨끗이 보존하고자 자결하였다. 그 통에 늙은 어머니와 딸 하나만이 살아 남았다. 이듬해 화의가 성립되어 조약이 거론될 때 김상헌·오달제·윤집 등과 척화를 주장하였다. 강화체결 이후 조정의 권유로 청군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평양부서윤으로 나갔으나, 청나라의 강요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 윤집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다. 그곳에 붙들려갔어도 문초하던 청장 용골대에게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다” 하였고, 온갖 협박과 유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숙종 19년(1693)에는 3학사에게 영의정이 추증되어 그 절개를 가리게 되었다. 광주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영천의 장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 평양의 서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이 있다. 시호는 충정이다.
 
◈ 윤집(尹集, 1606∼1637)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산성이 적으로부터 포위당하자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었을 당시 오달제, 홍익한 등과 함께 화친의 사신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으며, 이를 규탄하는 극력한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병에 의하여 북쪽으로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여 청병이 오히려 감복, 존경하였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오달제, 홍익한과 더불어 3학사라고 이른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 남한산성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영천의 장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 오달제(吳澾濟, 1609∼1637)
병자호란 때 3학사의 한 사람이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자, 청나라측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윤집과 더불어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서서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적장 용골대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협박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였다.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서 윤집, 홍익한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3학사라고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후에 좌승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 남한산성의 현절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영천의 장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가 있다. 시호는 충렬이다.
 
◈ 최명길(崔鳴吉, 1586∼1647)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당시 강화론을 펴 극력한 비판을 받았다. 1642년 영의정을 지냈으며, 1645년 인조를 보필하다 죽었다.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체로 이름이 있었다. 저서로는 『지천집』, 『지천주차』, 『경서기의』, 『병자봉산』 등이 있다. 박천의 지천사에 제향, 시호는 문충이다.
 
◈ 김구(金構, 1649∼1704)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헌부와 사간원에 있을 때 노론, 소론의 격렬한 대립을 완화하기 위한 만언에 가까운 시무소를 올려 일반의 찬탄을 받았으며,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는 데에 힘썼다. 노산군(단종)의 복위를 극력 주장하여 숙종으로 하여금 단종의 위를 추복하게 하였고, 아울러 단종비 송씨의 묘를 능으로 추봉하고 능역을 감독하여 그 공으로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어 육조의 판서를 거쳐, 1703년 우의정이 되었다. 임금의 위엄에 굽히지 않았고, 의리에 따라 처신하였으므로 임금의 총애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병서와 도가류에 정통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가 힘찼다. 글씨로는 고성에 있는 「백천교중병비」와 선사에 있는 「김수신도비」가 있다. 시호는 충헌이다. 만년에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안에 거주하였는데, 광주유수도 이곳까지 찾아와 인사드리고, 비록 죄를 지은 자라도 이곳에 들어오면 그의 허락을 얻은 뒤에야 체포할 수 있다. 묘도 몽촌토성 내에 있는데, 묘에는 곡장을 두르고 장명등과 문인석이 각 1쌍씩 있다. 묘앞에는 영조 19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이의현이 짓고 서명균이 쓴 ‘충헌김공 신도비’다.
 
◈ 이윤재(李允宰, 1888∼1943)
독립운동가, 국어학자로 평북 영변의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중 3·1운동에 참가, 평양감옥에서 3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중국으로 건너가서 베이징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1924년에 귀국하여 오산, 배재, 동덕 등의 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잡지 『한글』을 편집·간행하는 등 국어 연구에 진력했다. 1927년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위원, 1931년 연희전문 교수, 1934년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에 참여하여 국사연구에도 힘썼다. 1935년 감리교신학교 교수,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사건으로 투옥, 이듬해 11월에 석방되었다. 1941년에는 「기독교신문」의 주필을 역임하면서 교회 및 강연회 등을 통해서 한글의 보급과 민족혼의 고취에 힘썼으며, 여러 학자들과 한글맞춤법을 제정하고 사전을 편찬하는 등, 국어의 통일과 보급 및 연구에 헌신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최현배, 이희승 등과 홍원경찰서에 유치, 함흥형무소에 수감중 고문으로 옥사, 송파구 방이동산 28번지에 암매장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문예독본』, 『문장독본』, 『도강록(渡江錄)』, 『성웅 이순신』등과 『표준한글사전』이 있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단장(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중요무형문화재
◈ 송파산대놀이 제49호, 잠실동 47 (서울놀이마당내)
 
■ 사적
◈ 풍납토성 제11호, 풍납동 73∼96번지 일대
◈ 삼전도비 제101호, 석촌동 289-3
◈ 백제초기적석총 제243호, 석촌동 248
◈ 백제고분군 제270호, 방이동 125 일대
◈ 몽촌토성 제297호, 방이동 88-4 (올림픽공원내)
 
■ 유형문화재(시지정)
◈ 충헌김공 신도비 제59호, 방이동 88-4
◈ 거창 신씨묘역 제78호, 오금동 51
◈ 문화 류씨묘역 제79호, 오금동 51
 
■ 무형문화재(시지정)
◈ 송파답교놀이 제3호, 잠실동 47 (롯데월드 뒷편 서울놀이마당내)
 
■ 보호수(시지정)
◈ 향나무 제12호, 거여동 32 (수령 600년)
◈ 느티나무 제1-32호, 문정1동 동사무소 뒤 (500년)
◈ 은행나무 제1-31호, 방이동 88 (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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