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는 북으로 구봉산 멧줄기를 이어받은 보수산 자락에 둘러싸인 배산임해(背山臨海)의 지형으로 평지가 적은 부산에서도 행정구역이 가장 좁은 곳이다. 삼한시대엔 변한의 거칠산국으로, 신라시대엔 대증현, 동평현으로 양주군(현 양산)에 영속되기도 하였으나 조선조에 이르면 동래를 중심으로 한 부산지방이 우리나라 최첨단의 국방전초 기지로서 대일외교와 대일교역의 필요성이 강조되던 당시에 동래부에 속하였다. 고려때부터 왜구의 창궐이 극심하여 이를 회유하기 위해 설치하였던 왜관이 삼포왜란 이후 부산포에만 단일 왜관을 두게 된다. 절영도에 이어 두모포(현 수정동)에 설치되었던 왜관이 1678년 초량(지금의 용두산 일대)으로 옮겨 온 후로 중구는 한일간 교류의 중심지역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1876년 강화조약체결로 부산항이 개항되면서 일본 외교사절을 비롯한 서구의 외교사절이 쉴새없이 드나드는 국제외교 협상의 거점이 된다. 그리고 새로운 서구문물을 간접 또는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전초기지가 된다. 일본에 의해 1902년 북항부터 매축하기 시작한 토목공사는 부산항의 면모를 오늘과 같이 바꾸어 중앙동과 자갈치를 만들었으며 경부선 철로도 놓이게 된다. 오늘날 중구는 수출입 화물선과 국내외 여객선이 쉴새없이 드나들고 있는 부산항의 중추지역이자 국가경제상 전략적인 부두를 안고 있는 해상운송망의 요충이 됨으로써 부산을 상징하는 지역이 되고 있다. 그러나 1998년 말 새로운 부산광역시청사와 시경찰청이 연산동에 신축됨으로써 행정의 중심이 이동해 버렸고 시장의 중심도 서면 등으로 흩어져 버린 느낌이나 좁은 행정 구역치고는 부산에서도 가장 많은 금융기관이 집결해 있을 뿐 아니라 시외전화국 등 국내외 통신업무 및 우편업무의 중심에서 부산을 국제도시로 부상시키는 핵심되는 지역이 되고 있다. 가까이는 한국동란으로 인한 피난민의 집결처였고 민족분열의 애환을 안고 있으나 이 동란은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활성화시키는 데 한몫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