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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연제구 부산광역시 연제구 정보
부산광역시 연제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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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제구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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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3. 01:02) 
◈ 연제구의 어제와 오늘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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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고장의 어제와 오늘

부산의 연제구는 구석기·청동기·철기(삼한)시대를 거쳐 거칠산국이나 장산국에 소속되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742∼765) 때 부산지역이 동래(東萊)군으로 개명됨에 동래군에 소속된다. 고려시대는 동래현이었고 조선시대는 동래부였다. 동래부 아래의 서면에 대조리·거벌리가 연제구의 전신이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시대인 1957년 1월 1일 동래구로 승격하여 거제동과 연산동이 동래구에 속하게 된다. 1995년 3월 1일로 동래구에서 연제구가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99년에 부산광역시청이 연산 5동에 새 청사를 지어 이전하고 거제동에 법원 및 검찰청 등 법조타운이 형성되고, 각종 정부 기관이 연제구 관내에 들어서서 행정 중심지역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예로부터 연제는 황령산을 비롯한 금용산, 화지산등 수려한 산세와 조상들의 얼이 살아 숨쉬는 배산성지와 연산동고분군 등 소중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며, 특히 고려의 충신 정서가 권신들의 모함으로 유배를 당하여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임금에 대한 충절을 다짐했던 「정과정곡」의 탄생지로 이름난 자랑스러운 고장이기도 하다.
 
 

2. 역사문화자원

 

2.1. 역사적 사건과 현장

◈배산성지(盃山城址) 배산성곽은 성곽사의 초기 형태인 산정식(山頂式) 성곽으로 연산동 고분군의 피장자들이 축조한 성곽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5∼6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이 시기에는 거칠산국이 성곽을 축조하고 기마병 집단을 형성한 토착세력이었으나 6세기 이후 강력한 신라세력의 진출로 신라에 흡수되고 말았을 것이다. 조선 영조 16년(1740)에 편찬된 『동래부지』 산천조에 의하면 배산(盃山)을 척산(尺山)이라 하였고 부(府)의 남쪽 5리에 있으며 그 위에 겸효대(兼孝臺)가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동래부지』 고적조에는 겸효대가 선인 김겸효가 놀던 곳이라고 하였다.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4호.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산 38, 39번지 일대 위치
 
◈연산동 고분군 배산 줄기가 북쪽으로 뻗어 나온 50m 전후의 능선에 10기의 대형 봉토분이 줄을 지은 듯 위아래로 배치되어 있고 그 주위에는 민묘들이 발견된다. 이 연산동 고분군은 그 내부에 장방형 수혈식 석곽을 영조하여 시신과 부장품을 묻고 이를 흙으로 덮은 봉토분이다. 직경이 20m에 이르는 8호 고분은 이 지역을 통치한 수장급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8호 고분에서는 다량의 경옥(硬玉), 무수한 괘갑(卦甲)과 갑옷의 작은 미늘, 혁유, 대도(大刀)와 철촉, 단갑(短甲), 금동행엽, 등자 등 마구류, 신라토기편이, 4호 고분에서는 금동호록편, 금동금구편, 철도자(鐵刀子), 철꺽쇠, 철제 교구(交鉤), 각종 철촉 및 철제 이기(利器)와 토기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2호.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산 90번지 일대 소재
 
 

2.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정서(鄭敍) 동래 정씨 정항(鄭沆, 1080∼1136)의 아들 정서(鄭敍)의 호는‘과정(瓜亭)’이고, 본래 이름은 사문(嗣文)으로 고려 17대 인종비 공예왕후 임씨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 인종과는 동서간이다. 18대 의종 때 내시낭중이던 정서(鄭敍)는 내시 정함 등의 1·2차 모함에 의하여 의종 5년(1151) 5월 8일 동래 전리(田里)로 유배되어 정자를 건립하고 정과정(鄭瓜亭)이라 칭하였다. 이곳에서 가사를 지었고 이에 악곡을 붙인 것을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 하였는데 그에 관한 기록이 『악학궤범』, 『고려지』, 『동국통감』에 나타나고 있다.
 
◈김득인(金得仁) 조선초 김득인이라는 효자가 황령산에 묘소를 쓰고 6년간 부모 거상을 하며 효도를 극진히 하던 중 흉년을 만나 노략질을 하던 부산포의 왜인들이 김득인의 여막에 이르러 약탈을 하려다가 김득인의 효도 사실을 알고는 오히려 미역·쌀·향을 갖다 주고 갔다. 성종 3년에 이 일이 보고되어 장사랑 풍저창 부봉사의 벼슬을 하사 받았다는 내용이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현편에 있다.
 
◈문시환(文時煥) 연산동에서 1899년 태어나 동명학교(현 동래고)에 다니던 중 김병규 교사의 교육에 감화받고 일본의 조선합병에 대한 민족적 의분으로 만주 안동을 거쳐 상해에서 민족해방운동 지사들을 도우며 활약하였다. 귀국해서는 백산상회 안희제에 의하여 1920년 동경정칙영어학교에 유학이 주선되었고 다시 상해에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하여 구여순·강홍렬·김정현·오세덕·배치문과 같이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조선은행·종로경찰서 등의 파괴와 충독 등 대관 암살의 임무를 띠고 국내로 들어오다가 1923년 12월 29일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언도 받고 온갖 고초를 겪었다. 1995년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이도윤(李道胤) 1923년 8월 거제동에서 태어나 동래중학교 5학년 재학중이던 1940년 11월 21일, 22일 양일에 시행된 군사대 연습 중 총지휘자 일본장교 노다이 육군대좌의 한인 학생 차별대우와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한국인 학교에 불리한 편파 판정으로 인하여 동래중학과 부산 제2상업학교(현 부산상고)가 부산중학에 이어 2위, 3위를 하게 되자 한국인 학생들의 울분이 폭발하여 공설운동장에서 부산본역까지 시가행진을 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아리랑을 합창하면서 “일본천황젠자이(팥죽)”을 외쳤다. 해산 후 노다이 관사로 몰려가 노다이를 죽이라고 외치면서 관사를 파괴하여 동래중학교 9명, 제2상업학교 6명의 학생이 기소되어 이도윤은 징역 8개월간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이문곤(李文坤) 1924년 8월 15일 출생으로 일본강압통치 말기 병역을 회피하여 일본군 행정본부 부산출장소에 군관으로 취직하여 일본군의 기밀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 파견 공작원에게 제보하여 병기를 실은 열차가 한만 국경에서 미 공군에 의하여 폭파하게 하였고, 중국 본토 작전용 포탄 및 탄약을 선적한 배를 폭파하게 하는 등 많은 군사기밀을 제보하다가 부산경찰서 고등계에 탄로, 체포되었다. 1945년 징역 15년이 구형되었으나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2.3. 내 고장의 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2호) 거제동 종합운동장 뒷편에 국가의 중요문서를 보존하는 정부기록보존소에 국보 151-2호 『조선왕조실록』 848책이 보존되고 있다. 조선왕조는 1392년 1대 국왕에서 27대 순종(1910)까지 519년간 27명의 국왕이 보위를 계승한 장구한 기간의 왕조이다. 『조선왕조실록』이란 1대에서 25대 철종까지 472년간의 각 왕별 역사를 기록한 서명(書名)으로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기본 사료가 되고 있다.
 
◈정과정(鄭瓜亭) 옛터 정서(鄭敍)가 억울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고향(동래)에 세웠다는 정자가 어디에 있었고, 어떤 형태였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과정(瓜亭)의 옛 터는 적어도 조선 중종 25년(1530)까지는 보존되어 있었음이 확실하다. 오늘날 정과정 옛 터는 연산 9동 또는 연산 7동의 전리(田里) 주변으로 추정하는 설이 있고, 이로 연유하여 연산 9동 주변도로를 과정로(瓜亭路)라 칭하고 인근에 과정초등학교가 있다.
 
◈겸효대(謙孝臺) “겸효대는 현의 남쪽 5리에 있는 선인(仙人) 김겸효가 놀던 곳이다” 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현 편에 있으며, 『동래부지』 산척조 척산에는 “척산은 일명 배산이라고 한다. 부의 남쪽 5리에 있으며 겸효대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산 성곽의 우물터 배산성터 북쪽 정상에서 가까운 아래쪽에 언제 축조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물터가 있다. 직경 2m 가량의 원정이며 수혈을 파고 주위에서 확보했을 듯한 부정형(不定形)의 자연 괴석으로 편축법을 사용하여 원형 우물을 축조하여 토사가 우물에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고 깨끗한 식수를 보존하고자 했다.
 
◈이섭교(利涉橋) ‘하천을 건너기에 편리하도록 가설한 다리’라는 이섭교는 처음에는 목교(木橋)였으나 해마다 고쳐 짓는 민폐를 없애기 위해 인조 12년(1634) 겨울에 민간인들의 필요에 의하여 계(契)의 기부금을 모아 석교로 고쳐지었다. 인조 13년(1635)에 세워진 이섭교비에 다리 가설의 목적과 목교를 석교로 바꾼 계기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섭교비는 1980년 6월 3일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어 금강공원 안에 보존되어 있다.
 
◈세병교(洗兵橋) 원래 나무다리이던 것을 정조 5년(1781) 3월에 돌다리로 고쳤다는 기록이 부산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사처석교비(四處石橋碑)라는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3. 생활문화자원

 

3.1. 전통생활민속

◈거평당산과 당산제 거제동 800번지에 위치한 거평 당산 제당(祭堂) 안에는 주산신위(主山身位) 위패가 중앙에 나란히 두 개 모셔져 있고 그밖에 제대(祭臺) 위에 촛대, 향로 등 다수의 제구가 있다.
제일과 시간은 음력 정월보름 아침 10시부터 12시까지이며 제관은 제일(祭日) 20일 전에 거평씨족회(文, 梁, 宋, 尹씨 성으로 구성된 모임)에서 회의를 거쳐 선정한다.
 
◈배산 산제당 사당 안에는 검은 돌에 ‘배미산신령 대성전(盃美山神靈大聖殿)’이라 쓴 위패가 놓여 있고 왼쪽 벽면에는 ‘산운각(山雲閣)’이라 음각한 목판을 걸었다. 잔뫼산(배산을 잔뫼산이라함) 보존회 회원 중에서 한 명을 제관으로 선정하여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 저녁에서 다음날 새벽까지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지낸다.
 
◈신리당산제(新里 堂山祭) 연산 2동 신리경로당 경내에 있다. 제단에는 ‘南無OO師堂山不降紙位’라는 위패글씨가 있다. 당제는 음력 8월 14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치른다.
 
 

3.2. 지명 유래

◈남문구 동래부로 사람과 우마가 출입하는 주문(主門)인 남문이 있다. 남문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해서 남문구라고 했는데 지금의 부산교육대학교 주변일대이다.
 
◈황새알(한새알, 鶴卵) 터 법원과 검찰청 신축지 근처의 해발 46m의 십자산 일대는 옛날에 숲과 습지대였는데 황새와 학이 날아들어 산란을 해서 십자산 일대에 알이 흔했다고 한다.
 
◈홰바지(炬店) 부산진에서 매월 4·9·14·19·24·29일 열리는 장날에 동래쪽 사람들이 남문구를 통해 출발해서 밤 늦게 귀가할 때 가족들이 싸리나 갈대 등을 묶어 불을 붙인 횃불을 들고 마중할 때 기다리는 지점이다.
 
◈물만골 황령산 두산자락 쪽에서 내려오는 골짜기 물은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다 하여 물만골이라 하였다.
 
◈채봉터(草墳터) 옛날에는 시신을 바로 매장하지 않고 깨끗한 인골만을 보존하기 위하여 부패하기 쉬운 피육(皮肉)을 제거하는 육탈장(肉脫葬) 기간을 3년간 두었는데 이 육탈장 기간을 일차장 또는 초장(初葬)·초빈(初殯)이라 하며, 무덤을 초분(初墳)이라 하는데 지금의 연산 9동 토곡주공아파트 주변이 바로 초분터였다고 한다.
 
◈톳고개(토곡) 연산 9동 토곡주공아파트 입구에서 망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이 고개 주위 야산에 토끼가 많이 서식하여 이른 아침 해뜰 무렵이면 멀리 장산(동쪽)을 바라보면서 많은 토끼들이 왕토끼를 따라 다리를 들고 있었다고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토끼 토(兎)’에 ‘고개 곡(谷)’을 써서 토곡이라 하고 이를 톳고개라 발음한다.
 
 

3.3. 구전설화

◈마하사에 불씨를 구해 준 나한과 동지팥죽 500여 년 전 어느 해 동지 전날, 화덕에 불씨가 꺼져 추운 겨울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부엌에 나가보니 화덕에 불씨가 살아 있었다. 마침 동짓날이라 팥죽을 쑤어 나한전에 올리려 갔더니 오른쪽 3번째 나한의 입술에 팥죽이 묻어 있어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황령산 봉수꾼이 말하기를 며칠 전 눈보라치던 밤에 상좌아이가 불씨를 구하러 왔기에 애처로워 보여 팥죽을 먹이고 불씨를 주어 보냈다는 것이다. 스님들은 그제서야 나한전의 나한이 타심통을 발휘하여 신족통으로 멀고 험한 황령산에 가서 불씨를 구해다 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하사 참새를 쫓아 준 나한 어느해 마하사에 참새떼가 몰려와 곡식을 쪼아먹어 피해가 커 나한전에 가서 참새떼를 몰아내 달라고 기원했더니 참새 한마리가 죽어 뜰에 떨어진 후로는 참새가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마하사의 소리나지 않는 금구(金口) 1860년대 해령(海嶺)스님이 개금(改金) 번와(燔瓦) 불사를 마치고 회향시에 금구를 치니 4주야로 소리가 나지 않았고, 1910년에도 해봉(海峯)스님이 개금과 탱화불사를 마치고 역시 회향시에 금구를 쳤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는 16나한이 나한전의 불사가 자금이 없어 개분(改粉)과 탱화 신작(新作)을 미루는 것을 촉구하는 의미로 신통력을 발휘하여 금구를 쳐도 소리가 나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 놀란 승도들이 목욕재계하고 16나한전의 불사를 약속하자 금구 소리가 울렸다고 한다.
 
◈명당 화지산(和池山)과 동래사조 정문도(鄭文道) 묘터 고려초기 동래 정씨 정문도와 그의 아들 정목(鄭穆)과 후에 정목의 장인이 된 고익공(高益恭)간의 이야기이다. 어느날 고익공이 화지산의 풍수를 보고 탄복하면서도 “좋기는 하나…” 라고 하면서 그 사유를 말해주지는 않았다. 고익공이 개성의 중앙 관직으로 올라가고 정문도도 유명을 달리하자 아들 정목이 아버지 묘소를 화지산에 쓰고 개경으로 상경하여 고익공을 만나 이 사실을 알리자 고익공이 깜짝 놀라면서 정목을 집에서 내쫓았다. 이는 그곳에 산소를 쓰면 역적이 배출된다는 사실을 정목이 알지 못하고 부친의 산소를 썼기 때문에 고익공이 그렇게 한 것이다. 허나 고익공이 한참 생각한후 다시 정목을 불러 묘소를 쓰는 과정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밝히도록 하자, 정목이 “부친을 화지산에 묻을 때 호랑이가 걸터앉아 울었던 그 자리가 명당자리라 생각되어 그곳에 묻고 그 다음날 동생과 같이 묘소에 가보니 누구의 소행인지 몰라도 묘를 파헤쳐 목관이 드러나 있었기에 다시 목관을 묻고 밤에도 감시하게 되었다. 밤이 깊어 3경에 이르자 도깨비 같은 괴물들이 나타나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따위 나무관을 묻느냐. 적어도 금관(金棺)을 묻어야지”라고 하면서 다시 묘를 파헤치고 사라졌다. 두 형제는 금관을 어떻게 마련할까 하고 울고 있는데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 밤중에 웬 사람이냐”라고 말을 하면서 사연을 물었다. 이에 묘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했더니 노인은 “그것은 도깨비의 장난임에 틀림없네. 도깨비 눈에는 보리짚이 금빛으로 보인다고 하니 보리짚으로 목관을 잘 싸두게”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날이 새자 두 형제는 보리짚으로 목관을 싸서 묻고 밤이 되어 무덤 주위에 숨어 보았더니 도깨비들이 나타나서 무덤을 파헤치더니 달빛에 비치는 보리짚으로 싼 목관을 보고 “금관이야. 이제 됐어. 어서 가자”라고 하면서 행적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또 “묘소를 쓴 그 해 여름 어느날 뇌성벼락이 천지를 진동하더니 황령산 괴시암의 바위를 산산히 부숴 버렸다”고 하자 고익공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황령산의 괴시암이 깨어졌으니 이제 그 묘소와 동래 정씨 가문의 화근이 없어졌제”라고 하면서 정목을 거두어 과거시험에 합격시켜 관직에 출사하게 하고 자기 딸과 혼인시켰다. 이후 부산의 동래 정씨가 중앙무대에 진출하여 번성하게 되었다. 「정과정곡」으로 유명한 정서는 바로 정목의 손자이다.
 
◈거울바위(鏡岩) 지금의 배산 동북쪽에 거울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문둥병을 앓아 얼굴이 험악했던 어떤 총각이 거울같이 생긴 미끈한 바위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자 너무 험상궂은 자기얼굴을 비관하여 그 거울바위를 깨뜨려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4. 예술문화자원

 

4.1. 지역문화예술행사

◈한양벚꽃 축제 매년 4월초 벚꽃 만개일에 맞추어 농악놀이·윷놀이·알뜰마당·주민노래자랑 등 주민축제가 열리고 있다.
 
◈구민대축제 매년 10월, 온천천 시민공원 일원에서 구민화합축제로 개최한다.
 
 

4.2. 지역문화예술단체

◈연제문화원 연제구 환경복지홍보관내. 연제구 연산 9동 243-26 ☎ (051)853-3113, 759-3113, 860-4458
 
◈연제문화예술인협의회 연제구 환경복지홍보관내, 회원수 90명, 연산 9동 243-26 ☎ (051)860-4458
 
 

5. 관광, 여가문화자원

 

5.1. 관광자원

◈마하사 마하사의 마하는 고대 인도 아리안어의 산스크리트 마하(Maha)의 한자음 표기이고 그 뜻은 ‘훌륭한’, ‘존귀한’, ‘위대한’이므로 마하사란 ‘훌륭한 사찰’이란 해석이 된다. 마하사는 해발 400m의 금련산(金蓮山)에 자리잡은 고찰(古刹)로 5세기경 신라에 온 최초의 불승인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고 상량문에 적혀있다. 그러다 임진왜란(1592∼1598) 때 전소(全燒)되어 숙종 43년(1717)에 초가집 형태의 대웅전과 웅진전(나한전)을 세운후 여러 차례 중수, 개건을 거쳐 1988년 7월 19일에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감천암(甘泉庵) 거제 2동 쇠미산(釗尾山, 일명 금용산) 중턱 숲 속에 자리잡은 금용암은 1919년에 인법당(仁法堂)으로 창건되어 1964년에 법당을 세우고 1988년 12월 5일에 전통사찰로 지정된 후 1991년에 염화전을 세웠다. 금용암 입구의 300m에 달하는 송림길은 생기를 북돋아주는 도시 속의 자연을 맛보게 한다.
 
◈혜원정사(慧苑精舍) 1925년 절터인 이곳(연산 4동 배산 서쪽)에 작은 사찰을 지은 이래 1975년부터 사찰 재건을 하다가 1988년에 본격적으로 72평의 목조기와 건물인 대웅보전 등을 착공한 이래 장엄전각들이 경내에 꽉 들어차게 된 도심사찰로 1997년 2월 13일에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거제2동 소나무 이 소나무는 거평당산목으로 거평당집과 함께 250여 년 보호받고 있으며, 둘레가 102cm, 수관이 25m에 달하고 수고가 16m이니 수지(樹枝)가 옆으로 더 넓게 벌어진 나무형태이다. 1980년 12월 8일 연제구 보호수로 지정 받았다.
 
◈연산8동 소나무 수령이 250년이며 둘레 73cm 수관 14m, 수고 12m로 1980년 12월 8일 연제구 보호수로 지정 받았다.
 
◈황령산(荒嶺山) 금련산맥에서 장산 다음으로(427m) 대부분 화산이 터질 때 용암이 굳어진 화성암 종류인 안산암질로 산정이 비교적 평탄하며 조선시대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남아 있다.
 
◈금련산(金蓮山) 황령산과 맥을 같이 하는 산으로 산 정산의 능선들이 연꽃 모양을 해서 금련산이라고 불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남쪽 산록에는 청소년 수련소가 있다.
 
◈금용산(金湧山) 높이 152m로 동래 쪽에서 보면 금정산 줄기가 치솟아 끝나는 것 같아 금용산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배산(盃山) 연산동의 주산으로 높이가 255m이고, ‘잔’을 엎어놓은 산 같다 하여 잔 ‘배(盃)’의 배산이라 하였다 하며, 『동래부지』 산천조에 의하면 척산(尺山)이라 하였고, 고적조에는 겸효대가 있었다고 한다. 정상에는 성터가 있고 북쪽 구릉에 고총(古塚) 10여 기가 있다.
 
◈화지산(和池山) 「정과정곡」으로 유명한 정서의 증조부 동래 정씨 시조묘가 있는 명당산으로 천연기념물 제168호인 배롱나무 두 그루가 여름 3개월 100일 동안 빨간 꽃을 피우고 있다.
 
 
 

6. 문화시설자원

 

6.1. 전시관 및 공연장

◈부산광역시청 문화시설 △전시실 - 전시관 : 70평, 역사전시관 : 170평 △야외공연장 : 1개소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 5동 1000 ☎ (051)888-3461
 
◈국제신문사 문화센터 △좌석수 : 대강당 460석, 중강당 195석, 소강당:110석 △1전시실 92평, 2전시실 68평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 1동 76-2 ☎ (051)500-5381
 
◈이사벨여고 무궁화관 △좌석수 : 1,784석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1동 75 ☎ (051)503-2484
 
 

6.2. 문화원

◈연제문화원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9동(연제구 환경복지홍보관 4층) ☎ (051)860-4895∼6, 853-3113, FAX : (051)759-3012 원장 최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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