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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의 역사문화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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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01:00) 
◈ 동구의 역사문화자원
역사의 격전지 식장산 - 대전의 진산 격인 이 산에는 주봉을 중심으로 인근 계족산과 보문산의 크고 작은 많은 성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곳은 백제시대에 이미 전략적인 요충지가 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중 조헌 장군 휘하의 의병들이 이곳에서 일전을 벌인 다음, 전열을 가다듬어 식장산 줄기의 서남쪽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한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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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역사의 격전지 식장산
대전의 진산 격인 이 산에는 주봉을 중심으로 인근 계족산과 보문산의 크고 작은 많은 성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곳은 백제시대에 이미 전략적인 요충지가 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중 조헌 장군 휘하의 의병들이 이곳에서 일전을 벌인 다음, 전열을 가다듬어 식장산 줄기의 서남쪽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한다. 6·25동란 때에는 딘 소장이 이끈 미 7사단이 고전했는가 하면, 고립된 딘 소장을 구출하려 투입된 결사대의 수송 열차가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가, 습격 당하여 결사대와 함께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한 곳이다.
 
◈ 피골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 밑의
이 마을은 싸움으로 흐른 피가 시내를 이뤄 피골이라 하였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금강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던 양국의 군사들은 최전방 노고산성에서 전면전을 개시한다. 지휘계통을 가릴 것 없이 치열한 격전 속에 군사와 백성의 피가 시내를 이루어 피골이 되었다.
 
◈ 3·16 인동시장 만세운동
동구 산내면에 살던 양사고, 장운심, 권학도 등이 시위를 주도하였다. 만세 시위는 오후를 지나면서 점점 더 확대되었는데, 인동 일대와 경찰서 앞 의원동 일대까지 확산되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 헌병대와 보병대의 유혈 진압에 주동인물을 포함한 1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하였으며 9명이 체포되었다. 이후에도 세천리 만세시위, 3월 27일 대전 장터 만세 시위, 4월 1일 대전 장날 만세 시위 등이 있었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1417∼1456)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사육신(死六臣) 박팽년은 집현전 학자로서, 빼어난 정치가 또는 행정가로서 그리고 집대성(集大成)의 문장가로서 그 이름이 높았고 특히 충절(忠節)의 사표가 되는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선생의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 본관은 순천이다. 태종 17년(1417) 회덕현(懷德縣), 흥농촌(興農村), 왕대벌, 즉 현재의 동구 가양동에서 대사헌 박중림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소 거문고 타기를 즐겨해서 자칭 취금헌이라고 호를 지었다고 한다. 세종16년(1434) 18세에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 1438년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4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다시 급제, 단종 1년(1453) 우승지를 거쳐 다음해에 다시 형조 참판이 되었다. 세종때 그는 신숙주, 유성원 등의 젊은 학자들과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이들 모두 당대의 유명한 선비들이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박팽년은 경술과 문장, 필법이 뛰어나 집대성이란 칭호를 받았다. 문약한 문종과 어린 단종을 보살피라는 세종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리지 않고 세조에게 항거하여 신하로서의 지조를 보인 그는, 적극 가담했던 단종 복위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의 직계 3대가 멸절되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유응부, 하위지로 지칭되는 사육신의 의지는 동료였던 김질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실패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동료들과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세조의 끈질긴 회유를 받았으나, 끝내 절의를 굽히지 않고 절사의 길을 택하였다. 그의 일가족 모두가 처형되었고 그의 처 이씨 부인은 관비로 몰수되고 수절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 충암(沖庵) 김정(金淨, 1486∼1521)
충암 김정 선생은 조선 중종때 이조 참판을 지냈고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해 미신타파, 향약의 전국적 시행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개혁 정치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또한 서화와 시문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1519년 기묘사화 이후 제주에 유배되어 사사당함. 그의 부인인 은진 송씨는 김정이 죽자,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조카를 양자로 들여 정성껏 키웠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마치고 남편의 제사를 지낸 후 식음을 전폐하다 8일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 효심을 칭송하여 순조 3년에 정문을 내렸다.
 
◈ 상촌(象村) 신흠(申欽)
조선 중기의 문신.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4대 문장가로 꼽힌다. 본관은 평산, 자는 경숙이며, 호는 현현, 상촌, 현옹, 방옹이다. 선조 18년(1585)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1583년 외숙 송응개가 이이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주장하여 당시 실권세력인 동인으로부터 배척받아 겨우 종9품직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여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평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병조, 예조판서, 상호군 등을 역임하다가 1613년 계축옥사시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을 보필한 유교7신으로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16년 인목대비 폐비 문제로 춘천에 유배되었다. 전란과 정변에 휘말린 체험으로 그의 학문적 깊이는 더해져 많은 시조와 글을 남겼다. 1623년 인조 반정으로 벼슬길에 다시올라 1627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사망하였다.
 
◈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우암 선생은 조선 중기 격동의 역사 한 가운데서 대립된 두 세력 중 한 축을 형성하면서 찬양과 비판을 동시에 받기도 하였다. 당시의 상황은 한 시대의 문화를 생산하는 원천이었고 그 원천의 중심에 우암이 자리잡고 있었다.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40년(1607) 옥천 구룡촌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성장하였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인조 11년(1633)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경릉 참봉에 천거되었다. 인조 13년(1635)에 봉림대군(효종)의 사부가 되었고 효종 9년(1658)에 이조 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군사력을 강화하고, 군포를 증액하는 등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효종의 승하로 좌절되고 말았다. 현종 9년(1668)에 우의정에 취임하였으나 좌의정 허적과 뜻이 맞지 않아 사임, 후에 좌의정이 되었다. 율곡 이이의 학풍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고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숙종 15년(1689)에 왕세자 책봉이 시기 상조라는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되고,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당하였다.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형제
송시열의 9대손, 송병선(1836∼1905)은 성남동 석촌정사에서 무주 구천동을 오가며 유학을 탐구하던 유학의 행동적 인물이고, 또한 학자로서, 1905년 을사 보호조약 폐기와, 친일파 5적 처단을 주장하다가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통분하여 그해 12월 30일 자결을 했다. 동생 송병순(1839∼1912)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일본을 성토하자는 격문을 만들어 8도에 돌렸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이 비보에 통분하여 3회나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그후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 달래다, 그해 12월에 은사금을 받으라고 찾아온 일본 헌병을 크게 꾸짖고 음독 순절하였다. 이 형제는 구한말의 비분강개를 외치며 나라의 숭고함을 일깨워 후세에 귀감이 되었다.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유형문화재(시지정)
 
◈ 송자대전판 - 제1호,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문집
 
◈ 남간정사 - 제4호, 송시열 선생의 학당
 
◈ 고산사 대웅전 - 제10호, 통일신라 말기에 도선 국사가 창건
 
◈ 금암집판목 - 제23호, 조선문인 금암 송몽인의 시를 새긴 판목
 
 
■ 문화재자료(시지정)
 
◈ 삼매당 - 제1호, 조선 인조 22년 박계립이 지은 별서
 
◈ 문충사 - 제4호, 조선 고종때 순국한 송병선, 송병순 형제의 사당
 
◈ 박팽년 유허비 - 제8호,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비
 
◈ 김정 선생 묘소일원 - 제25호, 별묘와 재실, 부인 은진 송씨의 정려각
 
◈ 월송재 - 제31호, 조선 중기의 월송재 송희건의 재실
 
◈ 관동묘려 - 제37호, 쌍청당 송유의 어머니 열녀 유씨 부인의 재실
 
◈ 송자고택 - 제39호, 송시열 선생이 기거하던 고택
 
 
■ 기념물(시지정)
 
◈ 능성 - 제11호, 옛 교통로 방어를 위한 백제 산성
 
◈ 갈현산성 - 제12호
 
◈ 견두산성 - 제20호, 감시시설의 백제 산성
 
◈ 고봉산성 - 제21호, 고봉산 정상의 백제 산성
 
◈ 백골산성 - 제22호,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고 치열한 접전지
 
◈ 계현산성 - 제24호, 옛 교통로 방어의 백제 산성
 
◈ 비파산성 - 제25호
 
◈ 성치산성 - 제19호, 계족산성의 전초기지
 
◈ 노고성 - 제19호, 계족산성의 전초기지
 
◈ 삼정동 산성 - 제17호, 통로 방어기지
 
◈ 신선봉 유적 - 제32호, 신성봉 정상의 산성
 
◈ 마산동 산성 - 제30호, 백제의 산성
 
◈ 박팽년 유허지 - 제1호, 박팽년 선생이 살던 집터
 
 
■ 비지정문화재
 
◈ 남간사 - 남간정사 뒤의 송시열 영정을 배향한 곳
 
◈ 기국정 - 송시열의 별당
 
◈ 미륵원 남루 - 고려말 회덕 황씨 가문에서 자선을 베풀던 개인 역원의 누각
 
◈ 송상민 효자정려 - 효행을 기리기 위한 정려
 
◈ 안평이씨 열부정려 - 1713년 건립된 열녀 안평 이씨의 정려
 
◈ 육진태 효자정려 - 광무 8년에 내려진 육진태의 정려
 
◈ 김재만 효자비 - 양부모를 극진히 봉양한 효행을 기리는 정려
 
◈ 오동 안골 봉강당 - 봉강 김문수 선생의 서재겸 별당
 
◈ 봉강정사 - 조선말 유학자가 세운 학당
 
◈ 사우당 - 송국택의 학당
 
◈ 상곡사 - 조선 명종때의 학자 송기수의 위패를 모신 사당
 
◈ 주산동 고분군 - 13개의 소형 석실고분이 밀집된 공동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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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