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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정선군 강원도 정선군 정보
강원도 정선군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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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023년 12월 1일
정선군의 역사문화자원
2005년 6월
2005년 6월 3일
about 강원도 정선군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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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01:00) 
◈ 정선군의 역사문화자원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고려의 시인과 정선의 풍광 (목은 이색) , 연산군 아들 폐세자 황과 정선, 정선 민란 / ◈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전오륜(菜薇軒 全五倫), 전민준(全敏俊), 의병장 김시중(金時中, 1883∼1909)
목   차
[숨기기]
 

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고려의 시인과 정선의 풍광
고려 말의 저명한 문신이요 시인인 목은 이색(1328∼1396)은 정선을 다니면서 ‘물구멍은 응당 바다에 통했으라(水穴應通海)’와 ‘나무가 빽빽하니 반은 겨울에도 푸르구나(樹密半冬靑)’라는 시를 남겨 후세에 전한다. 안축(安軸, 1287∼1348)은 경기체가로 노래한 관동별곡 9장에서 ‘강은 10리의 폭으로 흐르고 산은 천층의 높이인데 그 모습이 마치 병풍에 둘러져 거울과 같은 맑은 물인데 더위를 피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江十里 壁千層 屛圍鏡澈 避暑景)’이라고 했다. 또 조준(趙浚, 1346∼1405)은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시 정선을 순행하다가 ‘동쪽 나라 바다를 깨끗이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니 여기 사는 백성은 눈을 씻고 그 때를 기다리게나(滌蕩東溟當有日居民洗眼待澄淸)’라고 당부하는 시를 남겼고, 이밖에 허소유는 아름다운 경치와 그렇지 못한 이곳 주민들의 어려운 삶을 시로 표현했으며 성현, 송인, 곽충룡, 함승경 등은 정선의 순후한 인정과 산천의 서경적 모습을 묘사했다.
 
◈ 연산군 아들 폐세자 황과 정선
조선조 10대 임금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은 알려진 대로 중종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축출되었다. 연산군에게는 3남1녀의 후손이 있는데 세자로 책봉되었던 맏아들 황은 반정이 난 뒤 정선으로 유배되어 20일만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기사가 『조선왕조실록』 중종 1년 9월 신사(辛巳)조에 나온다. 그가 머물렀던 곳이 지금 정확하게 어느 곳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정선읍 덕우리에 폐세자 황이 위리안치되었던 취적옥(吹笛屋)이라는 초라한 집이 있었다는 향토사 보고가 있다.
 
◈ 정선 민란
고종 26년(1889) 1월 30일 발발한 정선민란은 군수 이규학의 가혹한 탄압과 착취에 의한 동기와 앞서 철종 시대부터 전국적으로 일어난 농민봉기의 말미에 해당하는 민중봉기이다. 정선민란은 삼정의 폐단에 의한 이유도 있으나, 직접적인 동기는 충북 괴산의 전태현, 경북 용궁(예천군 용궁면)의 전한구 등이 정선군민인 전군직(全君直) 선조 묘를 발굴한 때문이었다. 또 전태현 등은 군수와 결탁하여 주민들의 돈은 강제로 빼앗기도 하였으며, 이와 같은 일에 격분한 전군직은 통문을 돌려 군민들을 소집하여 관아로 쳐들어가 군수를 축출하고 부신(符信, 결재인)을 탈취하여 도유사(都有司)에게 맡겼으며, 사령(使令) 김응추의 죄를 성토하여 불태워 죽이고 그의 집을 파괴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우선 군수 이규학을 문책, 처벌하는 한편 이천부사 정이섭을 안핵사로 삼아 진상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민란의 주동자인 전군직·김주석·최용서는 효수형에 처하고 그밖의 30여 명에 이르는 관련자들을 백령도로 유배시켰다. 그리고 군수를 제대로 호위하지 못한 좌수 최재휘와 이방 전구하 등과 타 지방민으로 묘를 발굴하고 돈을 탈취한 전태현 등도 유배하였으며, 온갖 불법을 자행한 군수 이규학도 유배시키는 선에서 정선민란은 진정되었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전오륜(菜薇軒 全五倫)
생몰 연대 미상으로 고려 말 전법판서(典法判書)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등을 지내다가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지금의 개성직할시 광덕면 광덕산 서쪽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에 불사이군의 뜻을 굽히지 않는 동료들과 함께 들어가 산나물을 뜯어 연명하며 고려에의 충성을 다짐하였다고 한다. 근간에 ‘꼼짝하지 않고 들어앉아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성어의 어원도 여기에서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채미헌 전오륜은 이후 정선군 남면 서운산에 은거하여 충절을 지키다가 말년에는 본가가 있는 경상도 합천으로 되돌아가 일생을 마쳤다.
 
◈ 전민준(全敏俊)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정선군수를 보좌하던 자문기관인 향소의 향임(鄕任, 지금의 지방의회와 성격이 유사한 조직의 대표)으로 왜병에게 체포되었다. 적군은 전민준에게 군수가 숨어 있는 곳과 양곡창고가 있는 곳을 대라고 고문하였으나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말하지 않았다. 왜적은 전민준을 포박하여 사형장이 있는 평창군으로 데리고 가 거기서 먼저 한쪽 다리를 자르고 이어 한쪽 팔 그리고 나머지 한쪽 팔을 잘랐으나 전민준은 왜적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꾸짖으며 절대로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죽음으로 충절을 다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정문(旌門)을 내려 그의 숭고한 뜻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
 
◈ 의병장 김시중(金時中, 1883∼1909)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출생으로 어려서는 학문에 전념하여 향교의 장의가 되었다. 1907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문경의 의병장 이강년 부대와 영월의 의병장 김상태가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의병에 가입하였다. 이해 11월 11일 신돌석 장군 의병 300명과 합세한 500여명은 경북 순흥읍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고, 1908년 2월 도창의대장 이강년, 김상태와 같이 경북 내성읍 고두목에서 일본군 대부대와 7일 동안 맹렬한 격전을 치루었으나 패퇴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강년 대장은 순직하고, 김시중이 중군장의 중책을 맡아 활약하였다. 다음 해 1909년 의병 약 50여 명을 인솔하고 정선군 사북읍 도사곡에서 일본 헌병대와 치열하게 교전하다가 향년 27세로 순국하였다. 그의 동생 김시백도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1913년 6월 28일 경북 영주군 애석면 서남대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13년 동안의 옥살이를 견디었다. 그 후 석방되었으나 곧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보물
◈ 수마노탑 - 제410호, 고한읍 산 214
 
 
■ 천연기념물
◈ 열목어 서식지 - 제 73호, 고한읍 산 213
 
◈ 철쭉나무 및 분취류 자생 - 제348호, 북면 여량리 산 12
 
 
■ 중요민속자료
◈ 외재 이단하 내외분 대례복 - 제4호. 임계면 봉산리 산 216
 
 
■ 무형문화재(이하 도지정 문화재)
◈ 정선아리랑 - 제1호 정선군 일원
 
 
■ 유형문화재
◈ 이종후 가옥 - 제88호, 임계면 봉산2리
 
◈ 고학규 가옥 - 제89호, 정선읍 봉양리 217
 
◈ 삼산봉표비(蔘山封標碑) - 제113호, 정선읍 회동리 산 1
 
 
■ 문화재자료
◈ 정암사 적멸보궁 - 제32호, 고한읍 고한15리
 
◈ 정선향교 - 제101호, 정선읍 봉양7리 1반
 
 
■ 기념물
◈ 봉양리 뽕나무 - 제7호, 정선읍 봉양리 217
 
◈ 화암동굴 - 33호, 동 면 화암2리
 
◈ 정선 비룡동굴 - 제34호, 정선읍 용탄리
 
◈ 화암리 소나무 - 제66호, 동 면 화암리 산 244
 
◈ 고성산성 - 제68호, 신동읍 고성리 산319
 
◈ 송계산성 - 고분 제70호, 임계면 송계리 산 80
 
 
■ 지방 민속자료
◈ 백전 물레방아 - 제6호, 동 면 백전리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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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