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오산시 경기도 오산시 정보
경기도 오산시 정보
(보기 : 목록별구성)
2005년 6월
2005년 6월 13일
2005년 6월 3일
오산시의 어제와 오늘
about 경기도 오산시 정보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내서재
추천 : 0
(2005.06.03. 01:02) 
◈ 오산시의 어제와 오늘
1. 어제와 오늘
 
 
 
오산은 경기도 서남부에 위치하며 북쪽은 화성군 태안읍과, 남쪽은 평택시 진위면 서탄면과, 서쪽은 화성군 정남면과, 동쪽은 동탄면과 접하고 있다. 따라서 화성군이 오산시의 3면을 삼태기 모양으로 북쪽에서 감싸고 있다. 바다와의 접경지역은 없으며 4면이 육지와 접한다.
오산 연혁의 시원은 삼한시대의 모수국으로부터 시작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 장수왕 때 매홀군으로,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부터는 수성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수주, 후기에는 수원부가 되었으며, 고종 이후 수원군의 일부가 되었다.
1949년 이후부터는 화성군에 속해 있었으며 1960년 오산읍으로 승격, 1989년 오산시로 승격되기에 이르렀으며 1995년에는 평택군의 일부를 편입시켰다.
현재 총면적은 42.76㎢로 이 가운데 임야 14.73㎢(34%), 전답 17.91㎢(42%), 대지 2.97㎢(7%)이며 인구는 8만5천 여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마대
 
<오산시 연표>
시 대
연 대
주 요 사 항
 
고대
선사시대
구석기시대의 타제석기와 청동기시대 고인돌 발견
 
삼한시대
마한 보수곡이었음
 
백제
B.C 6
온조왕 13년 백제 영역
 
고구려
475
개로왕 21년 고구려 지배
 
신라
757
경덕왕 16년 한산주 후에 수성군으로 개칭
 
고려
934
고려 태조 왕건이 수주로 승격
 
1260
고려 원종 오산이라는 지명이 보임
 
1310
충선왕 2년 수원부로 고침
 
조선
1481
성종시 『동국여지승람』에 수원부 오산원천이라는 설명이 보임
 
1611
광해군 3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오산원천이란 내용이 있음
 
1753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오산이란 지명이 보이고 3일과 8일 오산장이 선다는 기록이 있음
 
1863
철종 14년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 오산천이라는 기록이 보임
 
1896
수원군 성호면
 
근대
1914
수원군 청호면
 
현대
1941
수원군 오산면
 
1949
화성군 오산면
 
1960
화성군 오산읍으로 승격
 
1989
오산시로 승격(6개동)
 
 
 
 
 
 
 
 
2. 역사문화자원
 
역사적 사건과 현장
◈백제왕조와 독산성 오산은 백제 온조왕 때부터 백제의 영역이었다. 『삼국사기』 온조왕 13년조에 영역이 북으로는 예성강이고 남으로는 공주에 이르렀다고 기술된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다. 그 후 개로왕 21년(475)에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삼국시대에 오산지역을 최후로 지배한 나라는 신라이다.
백제시대에 유일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독산성이다.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11년조에 ‘독산과 구천에 책을 세웠다’는 기록과 근초고왕 28년에 ‘독산 성주가 3백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도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독산성
◈권율 장군과 세마병법 1592년 12월 전라도 관찰사겸 순찰사 권율이 지휘하는 4천여명의 조선군이 다시 북상해 현재의 오산시 독산성에 주둔하여 명군과 호응, 서울 수복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가 3만여명의 병력으로 오산지방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독산성에 이르러 “저 산성은 사방 바위뿐이니 산성에는 분명 물이 없을 것이다. 군사를 뒤로 물리고 조선군의 물과 양식이 떨어질 때를 기다리자. 며칠만 포위하고 있으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했다. 이에 권율 장군의 계책으로 독산성 정상에 “말을 매어 놓고 말 등에 쌀을 끼얹어 멀리서 보면 마치 말을 목욕시키는 것 같이 보이게 하였다. 왜병들은 말을 목욕시킬 정도로 물이 많다면 저 바위 꼭대기 어딘가에 샘이 있는 모양이다” 하고 모두 퇴각하였다. 그리하여 훗날 권율 장군이 말을 목욕시켰다고 하여 세마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엔군 초전 기념비 1950년 6월 25일 한국동란이 일어난 지 10일만인 7월 5일 유엔군 선봉대 미 제 24사단 소속 스미스부대 장병 540명이 이곳 죽미령에 도착, 물밀듯이 쳐 내려오는 공산침략군과의 최초 전투지로 자유를 수호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산화한 장병들의 넋을 기리고자 기념비를 세웠으며 매년 7월 5일 추도식을 갖는다.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해동공자 최충 선생과 문헌서원 고려시대의 유학자 문헌공 최충 선생을 모시는 최초의 서원으로 1543년 해주에 세워졌다. 남북이 분단되면서 남한에 거주하는 해주 최씨 대종회에서 탄신 1천년을 기리고자 1985년에 오산시 내삼미동 753-2에 영정각과 문헌서원을 준공하였다.
최충 선생의 탄생년도에 대해서는 <고려사>와 <해주최씨대동보>간의 차이가 있다. 고려사에서는 984년~1068년, 해주최씨대동보에서는 986년~1068년으로 보고 있다. - 운영자 -
 
◈문헌 공서린 선생과 궐리사 공서린 선생(1483∼1541)은 자는 희성, 호는 휴암으로 성종 14년 수원 문산에서 태어나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조광조와 교류하였다. 좌승지로 있을 때 기묘사화가 발생하여 낙향한 후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후에 공서린 선생은 영조 22년(1746)에 광국원종훈 이등공신과 청백리에 선발되었으며 영조 35년(1759) 이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을 추증받았다. 정조 16년(1792)에는 문헌의 시호를 받았으며 선생이 강학하던 집터에 궐리사가 세워져 공부자의 성상을 봉안하고 성묘라는 어필 현판을 걸게 되었다.
 
 
 
궐리사 전경
◈충신 이상재 정려각 이상재 선생은 부평 이씨로 자는 문거이며 광해군과 동서지간인 이덕일의 아드님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사관으로 남한산성을 향해 진군도중 광주에서 적과 치열한 전투 끝에 용감하게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홍문관 교리 겸 경연시독관으로 증직했다.
후에 통정대부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증직하고 특명으로 충신정려하였다. 정려각은 순조 15년(1815) 오산시 서동에 세워졌다.
 
◈문인화가 홍수주(1642∼1704) 본관은 남양, 자는 구신, 호는 호은으로 예조좌랑, 교리, 동부승지, 충청도 관찰사, 우부승지를 거쳐 예조참의, 1702년에 경기관찰사가 되었다. 공은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는데 그림은 매화, 대나무, 포도를 잘 그려 흑포도화와 흑매화도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산시 세교동에 그의 유택이 마련되었다.
 
내 고장의 문화유산
■ 사적
◈독산성 및 세마대지 제140호 오산시 지곶동 155
 
■ 전통사찰(도지정)
◈보적사 제34호 오산시 지곶동 150
 
■ 유형문화재(도지정)
◈궐리사 성적도 제62호 오산시 궐동 152
 
■ 기념물(도지정)
◈금암동 지석묘군 제112호 오산시 금암동 일원(지석묘 9기)
 
◈궐리사 제147호 오산시 궐동 147
 
■ 전적비
◈유엔군 초전비 오산시 내삼미동 산 70-3
 
 
 
 
 
 
3. 생활문화자원
 
전통생활민속
◈야광귀 쫓기 설날 밤에 야광이라는 귀신이 집에 들어와 사람들의 신을 보아서 자기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을 모두 방 안에 들여놓는데 만일에 신을 신고 가면 신 임자는 그해 운수가 나쁘다고 한다. 그래서 이날 밤에는 불을 끄고 일찍 자는데 이때 대문 위에 체를 걸어 놓는다. 이것은 ‘야괭이’가 와서 체뿔 구멍을 하나하나 세어보다가 잘못 세어 또다시 세고 하는 바람에 신 신는 것도 잊고 어느새 닭이 울면 물러가게 함이었다.
 
◈삼재 막는 법 설날에 집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벽사진경의 행사들과 함께 개인 중심으로 행해지는 벽사진경들을 한데 묶을 수 있겠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남녀의 나이가 삼재를 당한 자는 세 마리의 매를 그려 문설주에 붙인다고 하였다. 삼재란 수재, 화재, 풍재 또는 병난·질병·기근을 가리킨다. 삼재법이란 것은 십이지의 뱀·닭·소해에 난 사람은 돼지·쥐·소해에, 원숭이·쥐·용해에 난 사람은 호랑이·토끼·용해에, 호랑이·말·개에 태어난 사람은 원숭이·닭·개해에 각각 삼재가 든다는 것이다. 난 해로부터 9년만에 삼재가 들기 때문에 이 삼재의 해에 해당하는 3년간은 모든 일에 꺼리고 삼간다고 하였다.
 
◈원일 소발 일년간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빗상자 속에 넣었다가 반드시 설날 황혼에 문밖에서 태움으로써 나쁜 병을 물리친다고 한다. 오늘까지 전하는 민속에서 보면 냄새가 강한 것을 태우거나 먹거나 혹은 몸에 지님으로써 악귀가 그 냄새에 쫓겨간다는 것이다. 나쁜 병이라 함은 염병(장티푸스)을 말하는 것인데, 머리카락이 빠지는 염병을 막기 위하여 미리 머리카락을 태우는 것이다. 또 다른 민속으로 섣달 그믐날 저녁에 머리카락을 태워 악귀를 쫓는 것이다. 이것은 신체의 일부로 생각된 두발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는 유교적 사상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구전설화
◈꽃가마 전설 아득한 옛날 가마뫼(현 부산동)마을에 지체가 높은 대가집이 있었다. 인심이 후덕해서 백 리 안에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는 집안이었다. 그 집에는 마음씨가 착한 예쁜 무남독녀 외동딸이 있었는데 병이 깊이 들었다. 용하다는 의원들이 드나들고 좋은 약을 썼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대가집 대감님 내외는 물론 온 집안이 슬픔으로 가득차 있었다. 연분홍 진달래가 수줍게 타오르고 윤사월 해는 길어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대감댁 아가씨는 차도가 없었다. 대감댁 마님이 무봉산 만의사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리고 돌아온 날 밤 꿈에 부처님이 현몽하였다. 부처님 말씀인 즉 산 너머 마을 뒷산 중턱에 신비한 샘이 있으니 그 샘물을 마시고 그 물로 몸을 씻으면 병이 낫는다고 했다.
그 다음 날 꽃가마를 타고 대감댁 아가씨는 몸종을 거느리고 그 옹달샘터를 찾아갔다. 그리고 물을 마시고 그 물로 몸을 씻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던 아가씨는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초여름이 오기 전 아가씨는 깨끗이 병이 나아 완쾌되었다.
그 후론 그 옹달샘은 효험이 있는 약수로 인근 마을에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샘터를 찾게 되었다. 대가댁 아가씨가 꽃가마를 타고 그 샘터를 오갔다고 해서 지금까지 그 샘터를 꽃가마 약수터라고 부른다.
 
◈선바위 당말(원동)뒷산에는 선바위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소금장수가 살았는데 인천에 가서 소금을 떼어오곤 하였다. 옛날에 소금장수는 꽤 인기가 있었고 장사도 잘 되어서 돈도 잘 벌었다고 한다.
이 소금장수가 어느 날 인천으로 소금을 떼러 갔다. 인천 짠물인 구두쇠 상인 영감이 이 소금장수에게 아주 짜게 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골탕을 먹이기로 작정을 하고 이 소금장수는 외상으로 소금 세 배를 가져왔다고 한다. 갚을 날짜를 기다려도 이 소금장수가 나타나지 않아서 드디어 이 인천상인 영감이 오산 원동에 사는 선바위를 찾아갔다고 한다.
원동에 도착한 인천 상인 염감은 선바위라는 사람을 찾는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얘기했다.
그랬더니 마을 사람들이 선바위는 뒷산 정상에 있는 바위 이름이라고 대답했다. 인천에서 돈을 받으러 온 상인영감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산에 솟아있는 선바위를 바라보다가 돌아갔다고 한다. 이 선바위는 소금 세 배를 집어삼킨 바위로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허총 세교동에 이괄의 허총(시신이 없는 빈무덤)이 있었다. 이곳에서 이괄이 인조반정을 꿈꾸며 말을 달려 무예를 닦았다. 인조반정에 성공한 이괄은 높은 벼슬을 기대했으나 논공에서 우대받지 못하고 평안병사로 좌천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인조 2년(1624)에 난을 일으켜 한 때 서울을 점령하였으나 장만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이괄의 난이다. 이괄이 처형되자 이괄이 젊은 날 청운의 뜻을 품고 열심히 말을 달리던 그 터에 마을사람들이 이괄의 허총을 만들어 춘추로 제사하며 그의 영혼을 달래었다고 한다.
 
◈장자못 아득한 옛날 외삼미동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 부자집 앞에 깊은 연못이 있었는데 명주실이 한 타래나 들어가는 깊이였다고 한다.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 이 부자는 금은보화 패물을 그 연못에 숨기고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청명한 날이면 그 연못에서 보석들의 서기로 해서 반짝반짝 빛났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 연못을 부자 연못, 즉 장자못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그 연못은 흙으로 메워져 찾아볼 수가 없다.
 
◈어수천 가장동 한밝산 기슭 배문이 골짜기에 이름 난 샘물이 있다. 이 샘물은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샘물을 마시고 이 샘터로부터 백 보 이내에 천하 명당자리가 있다고 얘기를 하고 비기를 묻었다는 말이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온다.
그리고 조선 7대 임금 세조가 몸에 부스럼 병을 고치고자 온양 온천으로 납시던 길에 이곳에서 왕의 행차가 잠시 멈추었다. 이때에 이 샘물로 세조대왕이 목마름을 달랬다고 한다. 하여튼 이 샘터를 중심으로 해서 묘지가 여러 개 있었으나 지금은 이장을 해서 묘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곳에 절이 있었는지 이 근처에 밭을 일구면 옛날 기왓장이 많이 발견되곤 한다.
일제시대에도 이 샘터의 논은 세금을 면제받았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임금님이 이 샘물을 마셨다고 해서 어수천으로 불리우고 있다. 오늘날까지 약수터로 이름이 높다.
 
◈여계산 여계바위 금암동에서 서랑동으로 가는 길에 여계산이 있다.
여계산은 경치가 아름다워 봄이면 고을 원님이 이곳에서 주연을 베풀고 지방의 유지들을 불러 시문을 화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을 원님이 총애하던 여계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너무도 원님을 사랑하던 여계는 어느 날 주흥이 도도히 무르익어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와락 고을 원님을 끌어안고 높은 바위에 올라가 바위 밑 낭떠러지 늪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 바위를 여계바위라고 하고 그 기녀의 이름을 따서 그 산도 여계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금암동 애기바위 옛부터 바위가 많아 ‘검바위’ ‘금바위’라 불리던 금암동에 큰 바위에 얼킨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금암동은 논을 사이에 두고 큰 동네와 작은 마을로 나뉘어져 있는데 논 밑으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윗쪽으로는 산이 맞닿아 있고 서북쪽 산 정상에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칼로 잘려진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런 모양새를 갖게 된 슬픈 사연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선조 25년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은 임진왜란의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어느 날 일단의 왜군들이 금바위골(금암동)에 들어오게 되었다. 금바위골에 들이닥친 왜군은 노략질을 자행했다.
왜군을 이끄는 장수는 풍수지리에 밝은 자로 금바위골의 지세를 보고 감탄했다. ‘지력이 승한 것을 보니 필시 뛰어난 인물이 태어날 고장이구나’ 이렇게 생각한 왜장은 부하들을 시켜 금바위골에서 조곶이(지곶동)로 넘어가는 고개에 길을 내어 산의 기운을 끊어 놓았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왜장은 마을의 모든 젊은 남자와 아이들까지 몰살시키고 말았다.
한편, 남편을 왜군의 손에 잃은 젊은 아낙이 아기를 낳았다. 아기는 이상하게 양쪽 어깨죽지 밑에 새의 깃과 같은 작은 날개가 달려 있었다. 이것을 본 젊은 아낙은 아기가 커서 백성들의 장수가 될 것이라 믿고 아기의 출생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마침 아기의 집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밑에 자리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도 아기가 태어난 것을 알지 못했다.
젊은 아낙은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바가지를 옷 속에 넣어 만삭의 배를 만들고 아기를 뒷산 꼭대기에 있는 큰 바위 틈에 몰래 갖다 놓았다. 그리고 매일 밤 몰래 산에 올라가 아기에게 젖을 주었다.
아기를 피신시킨 것을 안 왜장은 몹시 화를 내며 젊은 아낙에게 아기를 숨긴 곳을 대라고 고문을 했다. 그러나 아기엄마는 끝내 말하지 않고 고문을 못 이겨 숨을 거두고 말았다. 왜군은 마을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기는 발견할 수 없었다.
아기 엄마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난 새벽, 마을 뒷산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왜장은 부하들을 이끌고 아기 울음소리를 따라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울음소리가 나는 곳엔 큰 바위가 있어 바위 주변을 뒤져보았지만 아기를 찾을 수 없었다. 왜장은 직접 큰톱으로 바위를 자르기 시작했다. 바위가 잘려질수록 아기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바위가 다 잘려져 나가자 바위 밑에서 허리 잘린 아기가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금바위골에 태어날 아기장수는 왜군의 손에 죽고 말았다. 왜장의 손에 잘려진 바위를 이때부터 애기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주민의 종교생활
전통적인 마을신앙이 현대에 이르는 동안 많이 쇠퇴했으나 동제, 성황제, 산신제, 당산제등이 남아 있으며 오산문화원의 독산성 고유제, 오산시 내삼미동 필봉산 산신제는 유명하다.
현재 불교 사찰9개소, 개신교 교회 56개소, 천주교 성당 1개소 등이 있고 천도교, 원불교도 이곳에 지회를 두고 있다.
 
주민의 생활권역
◈중앙동 상가지역 5일장 중앙동 사무소 좌측 시도 8호선의 성호초등학교 4거리에서부터 오산시민회관 앞까지 1.5㎞ 지점을 중심으로 한 상가 및 노점으로 약 200년 전부터 있어 온 장으로 농산물, 일용잡화 등 옛날과 현재가 공존하는 3일과 8일 장이 크게 선다.
 
◈차 없는 문화의 거리 오산 버스 터미널 앞 세칭 명동 골목을 쾌적한 문화의 거리로 만들어 수시로 시화전, 사진전시회, 미술전시회, 음악회, 연극공연, 농악, 풍물놀이, 보디빌딩 쇼, 에어로빅 쇼, 퍼포먼스 등의 거리축제를 개최한다.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건전한 문화 놀이 마당으로 인기가 높다.
 
 
 
차 없는 문화의 거리
지역의 별미음식
◈설렁탕의 명가 같은 장소에서 60여 년에 걸쳐 4대째 전통의 맛을 이어온 ‘오산할머니집’은 설렁탕전문의 향토 음식점이다. 한우 사골을 깨끗이 닦아 8시간 이상 정성들여 푹 고아낸 진한 국맛이 일품이다. 순수한 한우맛을 내기 위해 일체 양념을 쓰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옛날 손자장면 맛 그대로 오산 투마트 2층 스낵코너 김종한씨는 여름이면 반죽이 늘어져 같은 양의 반죽으로 다른 계절의 ⅓의 면밖에 만들지 못하는데 그 해결 비법을 발견하여 쫄깃한 면발을 전천후로 생산하여 ‘경기으뜸이’로 선발되었다. 맛있는 자장면은 쫄깃하고 적당히 잘 익은 면발과 장맛이다. 기계면이 아닌 수타자장을 만드는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장면의 일인자이다.
 
지역의 토산품과 특산품
◈오산 수라청 쌀 오산 수라청 쌀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지하수와 농업용수로 찰흙이 많고 땅심이 좋은 논에서 환경 농업으로 재배한 청정쌀이다. 마그네슘과 칼리 성분이 다른 지역보다 3배가 많고 규산도 풍부한 논에서 생산된 특상미로 밥을 지으면 윤기가 나고 부드러우며 밥맛이 좋아 특산품으로 꼽힌다. 오산농협에서 구입할 수 있다.
 
◈갈곶동 애호박, 초평동 오이 일조량이 풍부하고 서해안의 온난다습한 해풍을 받아 잘 성숙한 애호박과 오이는 때깔이 곱고 크며 맛이 있어 좋은 품질로 칭송이 자자하다. 갈곶동 애호박과 초평동 오이 모두 오산농협에서 구입할 수 있다.
 
 
 
 
 
 
4. 예술문화자원
 
지역문화예술행사
◈독산성 문화예술제 [상세정보] △주최·주관 : 오산문화원 ☎ (031)375-7755 △개최시기·매년 9월 14일(1일간) △행사종목 : 독산성고유제, 한글 백일장, 시화전, 향토작가전시회, 잔디가요제
 
 
 
독산성고유제
◈환경문화 한마당 큰잔치 △주최·주관 : 오산문화원 ☎ (031)375-7755 △개최시기 : 매년 5월 하순 △행사종목 : 환경백일장, 환경그림그리기, 환경제기차기, 환경서예전, 환경사진전, 환경노래 공연, 환경퍼포먼스. 오산 샛강 수질오염 측정 잔디가요제
 
◈문화의 거리 축제 △주최·주관 : 오산 문화상가 연합회 ☎ (031)374-3157 △개최시기 : 매년 4월 하순 △행사종목 : 음악회, 연주공연 농악, 풍물놀이, 에어로빅 쇼, 보디빌딩 쇼
 
 
 
문화의 거리 축제
지역문화 예술단체
◈한국 문인협회 오산지부 오산시 오산동 488 새물터 ☎ (031)374-6671 회원수 : 43명
 
◈오산사진인 모임 '결정적 순간' 오산시 오산동 840-8 ☎ (031)374-2339 회원수 : 15명
 
◈오산시 여성합창단 오산시 원동 551 태영A 101 -2003 ☎ (031)376-2078 회원수 : 28명
 
지역 언론기관
◈오산 화성신문 지역 언론으로 자세히 지역 정보를 알려주고 특히 지역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기보다 밝은 면, 평범한 우리 고장사람들의 살아가는 아름다운 미담 사례를 중점으로 보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장짐리 273-2 ☎ (031) 353-5116
 
문화예술교육·연구기관
◈오산대학 오산시 청학동 산17 ☎ (031)370-2500 △산업디자인과 : 교수 6명 학생 80명 △의상디자인과 : 교수 4명, 학생 100명 △매년 12월 졸업작품전을 오산대학 학생회관에서 거행한다.
 
지역문화예술시상제도
◈오산시민대상 지역사회 발전과 향토문화발전에 공이 있는 지역 주민에게 매년 9월 15일 오산시민의 날에 시상된다. 애향운동, 문화예술, 사회복지, 체육진흥, 효행 선행, 지역개발 등 6개 부문으로 단체장의 추천을 받아 엄격한 심사를 거쳐 시장이 수여한다. 주관 : 오산시청 총무과
 
◈오산 문학상 오산문학 발전에 기여한 문인으로 작품성이 뛰어나고 문단 데뷔 10년이 경과되어야 한다. 심사위원회가 구성되어 만장일치로 가결되어야 한다. 한국문인협회 오산지부장이 수여한다. 주관 한국문인협회 오산지부
 
지역출신 예술인
◈김국태 오산출신 소설가로 작품집 『각서풍년』, 『황홀한 침몰』, 『귀는 왜 줄창 열려 있나』. 현대문학상, 월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추계 예술대 교수로 재직. 새천년 민주당 국회의원 김근태씨는 그의 동생이다. 누구보다도 오산을 끔찍이 사랑하는 작가다.
 
◈유민영 희곡평론가. 진위초등학교와 오산중학교를 졸업. 현재 단국대학교 교수. 저서로 『한국 현대희곡사』, 『한국연극의 미학』, 『한국극장사』, 『한국희곡론』, 『한국현대희곡사』등 다수.
예술의 전당 이사장 역임. 오산문화원 주최 제2회 청소년연극제 심사위원장.
 
 
 
 
 
 
5. 관광, 여가문화자원
 
관광자원
◈독산성 세마대 독산은 해발 208m이고 백제 고성으로 성의 길이는 1,100m이며 권율장군이 임진왜란 때 근왕병 2만명을 이끌고 이곳에 주둔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경진년에는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일박하고 경술년에는 정조대왕이 거동하신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다.(수원군읍지)
세마대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휘호이고 성내에는 백제의 고찰 보적사가 있다. 독산은 평야에 홀로 우뚝 솟아 정상에 오르면 경관이 뛰어나 3년 묵은 체증이 떨어진다. 삼림욕장이 함께 있어 시민휴식 공간으로 안성맞춤이다.
 
◈유엔군 초전기념비 오산시 내삼미동 산 70-6에 위치하고 있으며 죽미령의 숲이 아름답다. 주차장이 완비되어 있고 커피숍이 있어 쉬어 갈 수 있다. 근처에 음식점이 많아 식도락가를 즐겁게 하고 있다.
 
 
 
유엔군 초전기념비
◈금암동 지석묘군 오산시 금암동에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9기가 산재되어 있고 화강암 계통의 돌로 만들어져 있으며 남방식 구조인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다.
 
◈빗재가마 오산의 막사발 장막가마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유일한 가마터이며 매년 국제 막사발페스티벌을 개최한다.
 
◈궐리사 공자의 행적을 글과 그림으로 새겨 놓은 성적도가 보관되어 있으며 중국 산동성이 기증한 공자 석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사당은 논산의 노성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2대 궐리사의 하나다.
 
관광코스
빗재가마 → (1.5㎞) → 궐리사 → (2㎞) → 금암동지석묘 → (2.5㎞) → 문헌서원 → 유엔군초전기념비 → (1㎞) → 외삼미동 지석묘 → (2㎞) → 독산성 세마대지(보적사)
 
관광안내소
◈오산시청 문화공보실 오산시 오산시청내 ☎ (031)373-6203
 
여가시설
◈잔디공원 오산 샛강 좌우 4만 평의 잔디공원. 각종체육시설, 주차장 등 시민들의 휴식과 건강증진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잔디공원
◈금오산 등산로 금오산과 필봉산을 잇는 약 2㎞의 등산로를 따라 각종 체력단련기구 등 휴식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시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독산성 삼림욕장 독산성에 인접되어 있으며 총 면적이 20.7㏊로써 체육단련 시설, 임간교실, 산책로등이 잘 갖추어져 있어 시민들의 휴식공간 및 자연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종합운동장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각종 체육경기를 개최할 수 있으며 시민들의 체력증진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종합운동장
 
 
 
 
6. 문화시설자원
 
도서관
◈시립도서관 부지 4,005㎡,건물 1,637㎡로 총 640석의 좌석과 5만여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시민들의 평생교육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오산시 청학동 16-13 ☎ (031)372-4196
 
문화의 집
◈오산시 문화의 집 건물면적 137평으로 1층은 만남의 장, 2층 영화감상실 및 취미교실, 3층 독서실, 지하 헬스장 및 회의실로 시민들이 활용하고 있다. 오산시 오산동 870-1 ☎ (031)370-3601
 
문화원
◈오산문화원 오산시 오산동 49(오산 종합운동장 내) ☎ (031)375-7755 원장 이기룡
경기도 오산시 정보
• 구리시의 역사문화자원
• 오산시의 어제와 오늘
【작성】 null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로그인 후 구독 가능
구독자수 : 0
▣ 정보 :
미정의 (보통)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 참조정보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