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영천시 경상북도 영천시 정보
경상북도 영천시 정보
(보기 : 일자별구성)
(A) 영천시의 마을 소개
영천시의 어제와 오늘
about 경상북도 영천시 정보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내서재
추천 : 0
(2005.06.03. 01:02) 
◈ 영천시의 어제와 오늘
1. 내 고장의 어제와 오늘
 
 
 
영천시는 경상북도의 동남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은 경주시와 포항시, 서쪽은 경산시와 대구광역시, 남쪽은 청도군 그리고 북쪽은 청송군과 군위군에 접하고 있다. 영천시는 북쪽에 태백산맥의 줄기인 보현산(1,124m)을 진산으로 하여 서쪽에 팔공산(1,193m), 동쪽에 운주산(806m), 남쪽에 사룡산(685m)으로 둘러싸인 둥근 형태의 분지에 동서로 나뉘어 흐르는 금호강의 남·북천이 이루어낸 넓은 평야로 일찌기 인심이 후하고 땅이 기름지고 수리시설이 잘되어 있어 풍요로운 고장이어서 오늘날도 도·농복합형 전원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영천은 예로부터 충의(忠義)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어 나라가 위태로울 때 이를 슬기롭게 극복한 위인들의 얼이 담긴 유서깊은 고장이며, 명현(名賢)과 석학(碩學)들이 학문을 연마한 문화유적지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역사의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영천은 지리적으로 경상북도의 동남부 중심에 위치하며 경부 고속도로를 비롯한 국도 3개 노선과 대구선과 중앙선의 철도가 통과하여 전국 어느 지역이나 편리하게 오갈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최근에는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천시 연표>
시 대
연 대
주 요 사 항
 
고대
삼한
진한의 호로국(戶路國), 골벌국(骨伐國, 영천)
 
236
신라 조분이사금 7년, 호로국, 골벌국 신라에 병합
영천 → 절야화군(切也火郡), 신녕 → 사정화현(史丁火縣)
 
757
신라 경덕왕 16년, 임고군(臨睾郡)으로 개편
 
신라말
고울부라 칭함
 
고려
초기
영주(永州)라 개칭
 
995
성종 14년, 영주자사 임명
 
1172
명종 2년, 영주감무 임명
 
1382
우왕 8년, 영천읍성 축조
 
조선
1413
태종 13년, 영천군으로 개칭
 
1591
선조 24년, 영천읍성 개축
 
1592
선조 25년, 임진왜란시 의병이 영천성 수복
 
1895
대구부 영천군
 
1896
경상북도 영천군
 
근·현대
1914
신령군이 영천군에 병합
 
1919
4월 8∼12일 영천만세 시위운동
 
1937
영천면이 읍으로 승격
 
1980
영천읍이 시로 승격
 
1995
영천시·군이 통합되어 오늘에 이름
 
 
 
 
 
 
 
 
2. 역사문화자원
 
역사적 사건과 현장
◈후삼국의 각축장 후삼국의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시기에 이 지역은 서라벌(경주)과 인접해 있어서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925년(신라 경애왕 2년) 이곳의 장군 능문(能文, 皇甫能長)이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그 지리적 중요성이 돋보이게 되자 왕건에 의하여 큰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능문의 부하였던 배근·명재·상술·중식 등은 끝까지 고려에 남아 중용되었다. 927년 견훤이 경주를 공략할 때 이곳을 전진기지화하려고 크게 노략질하였다.
1202년(고려 신종 5년) 경주에서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와 대립했었으나 1233년(고려 고종 20년)에는 경주와 함께 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의병의 영천성 수복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에 의하여 영천성이 함락되자 이곳 출신의 정세아, 조희익, 곽회근 등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어서 신녕현의 권응수, 하양의 신해 등 의병들과 연합하여 영천성을 수복하고, 경주로 퇴각한 왜적의 섬멸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 때에 손씨 일가 사형제(孫氏 一家四兄弟)가 모두 참전하여 영천복성(永川復城)에 혁혁한 공을 세운 복성공신 충의의 집이 영천시 고경면 상리동에 있다. 당시 미혼이었던 막내 덕순(德純)은 “형들은 가솔이 있으니 내가 나가야한다”고 하며 큰형 덕침(德沈)의 임무를 대신 맡아 의병활동을 하여 영천성 수복에 큰 공을 세우고, 다시 경주전투에 참전하여 용전분투하다 전사하였다.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당시의 사림(士林)과 문중의 뜻에 따라 미혼이었기 때문에 묘는 쓰지 못하고 살아서 공이 많으니 죽어서라도 반 어른이 되라는 뜻에서 아버지의 묘소 밑에 탕건(宕巾)모양의 무덤을 만들고 좌판에 「순절공밀양손덕순지총(殉節公蜜陽孫德純之塚)-임란전사이의관장(壬亂戰死以衣冠葬)」이라고 적고 있다.
 
 
 
탕건묘
◈1919년 4월 12일의 만세시위 1919년 3·1운동때에는 인근지역의 시위운동에 발맞추어 4월 8일 완전동의 기독교신자를 중심으로 시위가 있었고, 4월 12일 영천읍 장날을 맞이하여 1,000여명이 모여 만세시위 운동을 벌였으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6·25와 영천지구 공방전 1950년 북한군의 침입으로 인하여 전개된 9월 5∼13일 사이의 영천지구 공방전은 우리의 전쟁사에 길이 남을 항전사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국군은 대구와 경주의 방어에 크게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때부터 6·25의 전세가 역전되어 일대 반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을 굳히게 된 것이다.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어릴때 이름은 몽란(夢蘭), 몽룡(夢龍)이었다가 몽주라고 하였다.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 시호은 문충(文忠)이고,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고려 충숙왕(복위 6년) 12월에 영천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나 조선 태조 1년(공양왕 4년) 4월 6일에 개성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조선 태종)의 심복 조영규의 철퇴에 격살당하였다.
고려말의 충신이요 대학자이며 정치가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성리학(性理學)과 유학에 뿌리를 다지는 업적을 남겼다. 고려 팔은(八隱)의 한사람으로서 이방원과 주고 받았다는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는 너무도 유명하다. 사후 태종 원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경기도 기념물 제1호)에 있고, 봉향소(奉享所)는 개성의 숭양서원(崇陽書院)과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등 전국 10여개 서원이다.
 
 
 
임고서원
◈화약을 만든 최무선(崔茂宣, 1326∼1395) 우리나라에 최초로 화약을 만든 최무선 장군은 고려 충숙왕 13년에 경북 영주(永州, 지금의 영천)에서 출생했다. 최무선이 화약을 만들어 내기 전(1350년대)에는 중국으로부터 화약을 비싼 값에 수입해 썼었다. 고려말엽인 1373년 공민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서 초석 50만근과 유황 10만근을 원조 받아와서 최무선 등으로 하여금 화약제조방법을 연구하게 하였다. 마침내 최무선은 1377년(우왕 3년)에 화약제조에 성공하여 화통도감(火筒都鑒)을 설치하고 20여가지의 화약무기를 제조하였다.
1380년(우왕 6년) 왜구가 전라도 진포구(鎭浦口)에 침입하여 약탈했을때 최무선과 나세(羅世)가 이끄는 고려 해군은 전함에 각종 화포를 장착하고 왜선 500여척을 격파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최무선은 1395년(조선 태조 4년)에 아들 해산(海山)에게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을 전수하고 세상을 떴다. 이 「화약수련법」은 손자인 공손(功孫)에게 까지 전수되어 3대에 걸쳐 연구하게 된다.
사후에 조선 조정에서는 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을 추증하였다.
 
 
 
최무선 영정
◈임란의 의병장 권응수(權應銖, 1546∼1608) 조선 선조때 무신, 호는 백운제(白雲齊), 시호는 충의(忠毅), 본관은 안동이다. 신녕현 추곡리(현 화산면 가상리)에서 태어났다. 선조 17년(1584)에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때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켜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연승하여 영천성 수복에 수훈을 세웠고, 경주성 탈환전, 문경, 안동, 밀양 등의 전투에서도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정유재란때는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를 도와 울산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뒤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으며 선조 41년(1608)에 서거하였다. 인조 2년(1624)에 의정부 좌천성겸 판의금부사에 추증, 숙종 17년(1691)에 충의의 시호가 내려졌다. 1979년 호국위인 유적정화사업으로 유물전시관이 신녕면 화남리에 건립되었다.
 
◈이순몽(李順蒙, 1386∼1449) 조선조 초기의 호국 용장, 시호는 위양(威襄), 본관은 영천이다. 영양군(永陽君) 정경공(貞景公) 이응(李應)의 장남으로 영천 성내동 숭렬당(崇烈堂)에서 태어났다. 1417년(31세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1419년(세종1년)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하는 대마도(對馬島)원정군의 우군(右軍) 절제사로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대승하여 이후 임진왜란 때까지 남해안 일대가 조용할 수 있었다.
1433년(세종 15년) 압록강 주변에 침범하는 여진족 두목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할 때에는 최윤덕(崔潤德) 장군 휘하에서 중군(中軍) 절제사로 참전하여 이만주의 본거지를 점령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리고 변경의 경비를 강화한 후 개선하였다. 세종대왕은 승전보를 듣고 크게 기뻐하여 무관인 최윤덕 장군을 우의정에, 이순몽장군을 영중추원사로 봉하는 등 여러 장수에게 후한 작위를 내렸다. 이와 같이 이순몽장군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무찔러 백전백승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불러 복장군(福將軍)이라 하였다 한다.
 
 
 
숭렬당
◈매산 정중기(梅山 鄭重器, 1685∼1767) 자는 도옹(道翁), 호는 매산, 본관은 연일이다. 임고면 선원동에서 출생하였다. 조선조 영조때의 학자요, 문관으로 벼슬은 정언(正言), 지평(持平), 형조참의를 거쳤다. 도학(道學)과 예도(禮度)에 밝아 한치의 그릇됨이 없음을 보고 영조대왕도 깊이 탄복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고 훌륭한 저술을 남겼다. 그가 운명하기 직전에 퇴계문집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한 다음 옷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자리를 바로 정한 다음 고요히 눈을 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영천시 입고면 삼매2동에는 그가 선원동에서 옮겨오면서 지은 매산고택(梅山古宅)이 중요민속자료(제24호)로 지정되어 내려오고 있다.
 
 
 
산수정
내 고장의 문화유산
■ 국가지정문화재
◈은해사 거조암(居祖庵) 영산전(靈山殿) 고려시대, 청통면 신원동 622 (국보 제14호)
 
◈신월동 3층석탑 통일신라시대, 금호읍 신월동 205-1 (보물 제465호)
 
◈숭렬당(崇烈堂) 조선세종때, 영천시 성내동 9-2 (보물 제521호)
 
◈영천 향교대성전(鄕校大成殿) 세종17년, 여천시 교촌동 46-1 (보물 제616호)
 
◈화남동 3층석탑(華南洞三層石塔) 통일신라시대, 신녕면 화남동 (보물 제675호)
 
◈화남동 석불좌상(華南洞石佛坐像) 통일신라시대, 신녕면 화남동 (보물 제676호)
 
◈백흥암극락전(百興庵極樂殿) 조선인조21년, 청통면 치일동 (보물 제790호)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極樂殿 須彌壇) 조선시대, 청통면 치일동 549 (보물 제486호)
 
◈선원동철불좌상(仙源洞鐵佛坐像) 고려시대, 임고면 선원동 (보물 제513호)
 
◈운부암청동보살좌상(雲浮庵靑銅菩薩坐像) 조선시대, 치일동 (보물 제514호)
 
◈청제비(菁堤碑) 신라시대, 영천시 도남동 산7-1 (보물 제517호)
 
◈병와유고(甁窩遺稿) 조선숙종~영조시대, 영천시 성내동 97-1 (보물 제652호)
 
◈권응수장군유물(權應銖將軍遺物) 조선시대, 신녕면 화남동 (보물 제668호)
 
◈임고서원소장전적(臨皐書院所藏典籍) 조선시대, 임고 양항동 (보물 제1109호)
 
◈정몽주영정(鄭夢周影幀) 조선시대, 임고면 양항동 161 (보물 제1110호)
 
◈은해사괘불탱화(銀海寺掛佛幀畵) 영조 26년, 청통면 치일동 (보물 제1270호)
 
◈수도사(修道寺盧舍佛掛佛幀) 조선 숙종30년, 신녕면 치산동 (보물 제1271호)
 
◈정재영씨가옥(鄭在永氏家屋) 조선시대, 임고면 삼매동 (중요민속자료 제24호)
 
◈정용준씨가옥(鄭容俊氏家屋) 조선 영조, 임고면 선원동 (중요민속자료 제107호)
 
◈만취당(滿醉堂) 조선시대, 금호읍 오계동 271 (중요민속자료 제175호)
 
◈자천오리장림(慈川五里長林) 282주, (천연기념물 제404호)
 
◈양항은행(良港銀杏) 나무 수령-500년, 임고서원 (천연기념물 제63호)
 
■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이경은 부조묘(李耕隱不廟) 자양면 용산동, (유형문화재 제53호)
 
◈이경은선생제단(李耕隱先生祭壇) 숙종조, 자양면 용산동 (유형문화재 제54호)
 
◈용계서원(龍溪書院) 조선 정조6년, 자양면 용산동 (유형문화재 제55호)
 
◈강호정(江湖亭) 조선 선조32년, 자양면 성곡동 (유형문화재 제71호)
 
◈오회공종택(五懷公宗宅) 인조2년, 자양면-성곡동 (유형문화재 제72호)
 
◈오회당(五懷堂) 조선 영조3년, 자양면 성곡동 (유형문화재 제76호)
 
◈하천재(夏泉齋) 조선 인조 15년, 자양면 성곡동 (유형문화재 제73호)
 
◈사의당(四宜堂) 조선 영조 2년, 자양면 성곡동 (유형문화재 제74호)
 
◈삼휴정(三休亭) 조선 인조 13년, 자양면 성곡동 (유형문화재 제75호)
 
◈동인각(東麟閣) 조선후기, 임고면-삼매동 (유형문화재 제77호)
 
◈자양서당(紫陽書堂) 조선 명종 5년, 임고면 삼매동 (유형문화재 제78호)
 
◈호수종택(湖宗宅) 조선 광해 5년, 영천시 대전동 (유형문화재 제90호)
 
◈거동사대웅전(巨洞寺大雄殿) 조선초, 자양면 보현동 (유형문화재 제78호)
 
◈조양각(朝陽閣) 고려 공민왕 17년, 영천시 창구동1 (유형문화재 제144호)
 
◈신녕향교명륜당(新寧鄕校明倫堂) 선조 25년, 신녕 화성동 (유형문화재 제168호)
 
◈정각리3층석탑(正覺里三層石塔) 고려시대, 화북면 정각 (유형문화재 제269호)
 
◈옥간정(玉磵亭) 조선시대, 화북면 횡계동 (유형문화재 제270호)
 
◈모고헌(慕古軒) 조선시대, 화북면 횡계동 (유형문화재 제271호)
 
◈포은선생유허비(圃隱先生遺墟碑) 고려시대, 임고면우향동 (유형문화재 제272호)
 
◈보성암각화(甫城岩刻畵) 선사시대, 청통면 보성동 (유형문화재 제286호)
 
◈노계집판목(蘆溪集板木) 조선시대, 북안면 도천동 (유형문화재 제68호)
 
◈명고영정(鳴皐影幀) 조선시대, 영천시 녹전동 (유형문화재 제179호)
 
◈은해사금고(銀海寺金鼓) 조선시대, 청통면 치일동 (유형문화재 제307호)
 
◈황보능장묘(皇甫能長墓) 고려시대, 고경면 창하동 (기념물 제51호)
 
◈임고서원(臨皐書院) 조선 명종 6년, 임고면 양항동 (기념물 제62호)
 
◈서원은행(書院銀杏) 나무 약500년, 임고면 양항동 (기념물 제63호)
 
◈충효재(忠孝齋) 1923년, 자양면 충효동 (기념물 제81호)
 
◈약남(藥南) 회화나무 수령 400년, 금호읍 약남동 (기념물 제118호)
 
◈완귀정(玩龜亭) 조선 명종원년, 영천시 도남동 (민속자료 제20호)
 
◈환구세덕사(環丘世德祠) 조선시대, 임고면 선원동 (민속자료 제87호)
 
◈양계정사(暘溪精舍) 조선시대 1770년, 영천시 대전동 (민속자료 제88호)
 
◈이대전유허비(李大田遺墟碑) 인조7년, 영천시 대전동 (문화재자료 제24호)
 
◈지산고택(芝山古宅) 조선중기, 대창면 신광동 (문화재자료 제99호)
 
◈도잠서원(道岑書院) 조선 광해군5년, 대창면 용호동 (문화재자료 제100호)
 
◈신녕향교 대성전(大成殿) 명종3년, 신녕면 화성동 (문화재자료 제102호)
 
◈공덕3층석탑(公德三層石塔) 고려시대, 화북면 공덕동 (문화재자료 제103호)
 
◈거조암3층석탑(居祖庵三層石塔) 통일신라, 청통면 신원동 (문화재자료 제104호)
 
◈영지사대웅전(靈芝寺大雄殿) 조선시대, 대창면 용호동 (문화재자료 제207호)
 
◈함계정사(涵溪精舍) 조선시대, 임고면 선원동 (문화재자료 제230호)
 
◈귀애정(龜厓亭) 조선시대 화남면 귀호동 (문화재자료 제339호)
 
◈은해사대웅전(銀海寺大雄殿) 조선시대, 청통면 치일동 (문화재자료 제367호)
 
◈경주김씨 지사공 종택 조선시대, 임고면 황강동 (문화재자료 제373호)
 
◈유후재옥비(遺厚齋玉碑) 조선시대, 대창면 대재동 (문화재자료 제101호)
 
 
 
 
 
 
3. 생활문화자원
 
전통생활민속
◈줄다리기와 곳나무 싸움 영천지방의 정월 민속놀이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줄다리기가 끝난 다음에 곧 이어서 ‘곳나무싸움’이라는 것이 이어지는 것이다. 곳나무는 줄다리기에서 양편의 줄을 연결시킬때 쓰이는 나무(길이 1m, 직경 15cm내외의 참나무와 소나무 등)인데 이 곳나무를 양편이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치열하다. 놀이의 승패는 일정시간 동안 곳나무를 차지한 편에서 상대편에게 발견되지 않게 잘 숨기는 것으로 판가름난다. 이 과정에서 양편의 몸싸움은 매우 치열하고 놀이의 공간도 아주 넓게 활용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 까지만 해도 영천읍, 신녕면, 임고면 선원리 등지에서 성행했었다.
 
◈씨름 전통사회의 씨름은 새해맞이 축제, 단오와 백중, 추석 등 생업과 연관된 축제에서 공동체적 관심 속에서 행해진 대동놀이로서의 성격을 찾을 수 있다. 영천지역의 씨름은 추석 씨름이 주류를 이루었고, 단오때에도 행해졌다. 주로 영천시내 주남다리 밑의 백사장에서 치루어졌다.
 
구전설화
◈이 지방에서는 산, 연못, 바위 등의 유래에 얽힌 전설이 많이 전해오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용마바위 전설」, 「노름꾼과 옥피리」, 「요도와 무리미산의 전설」, 「사모산 전설」, 「청못전설」, 「원한새 이야기」, 「탕건바위 전설」 등이 전해오고 있다.
 
주민의 생활권역
◈영천 5일장 교통의 요충지라는 이점으로 오늘날까지 그 규모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영천 5일장은 경상도 일대의 최대의 농산물 교역시장이다. 대구 약령시장, 안동시장과 함께 경상도 3대시장으로 꼽혔으며, 영천 쇠전(우시장)은 수원쇠전 다음으로 알아주었다.
 
지역의 토산품과 특산품
◈농산물 영천포도, 영천사과, 영천배, 영천복숭아, 영천양파 등이 이 지역의 특산품이다. 영천포도는 연간 4만3천톤의 생산량으로 전국 1위의 점유율(12%)을 차지하고 있으며, 연간소득은 700억원에 달하고 있다. 주산지는 금호읍이다.
 
 
 
영천포도
◈가공식품 영천포도를 가공한 포도식초, 마늘식초, 누에가루뽕잎차가 생산되고 있다.
 
◈공예품 다양한 종류의 전통목공예품과 신라토기를 생산하고 있다.
 
◈먹거리 닭계장, 닭백숙, 잉어찜, 한우숯불갈비, 산채비빔밥, 도토리묵 등이 이 지방의 이름난 먹거리이다.
 
지역의 별미음식
◈도동(道洞)국수 경주에서 영천으로 들어오다 보면 호계변에 광주 안씨가 400여년을 세거해온 도동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별미 국수를 대접한다(밀을 맷돌에 갈아서 벽에 날려 쌓인 밀가루로 만든다).
 
◈가야 미나리 금호읍 양남동 채약산 기슭의 습지에서 재배한 미나리로 그 향내가 십리까지 풍겼다고 한다(약간 삶아서 양념에 무쳐 먹는다).
 
◈청못의 말 청못의 맑은 물에서 자란 말을 야채가 없는 겨울철에 뜯어 먹으면 천하일미였다고 한다.
 
 
 
 
 
 
4. 예술문화자원
 
지역문화예술행사
◈영천문화예술제 [상세정보] 매년 10월(10일간), 문학·음악·미술·연극 등 문예장르와 민속놀이 행사가 곁들인다. 영천문화원 주최. 노계백일장, 한시백일장, 백신애백일장, 골별국악제, 왕평가요제 등도 함께 열린다.
 
◈최무선장군추모제 [상세정보] 매년 4월 중(하루), 선구적 과학자 최무선 장군을 기리는 추모제가 최무선장군추모비 앞에서 열린다. 최무선장군기념사업회 주최, 세미나, 과학경연, 과학백일장 등
 
◈포도축제 매년 8월(3일간), 지역특산물의 부가가치를 증대시키고 판로개척을 위함. 영천시청 주최
 
◈영천시민축제 [상세정보] 영천시민의 날(10월 5일)에 전후하여 영천주민을 하나로 묶는 시민화합축제, 영천시청 주최.
 
◈영천민속축제 매년 9월중 하루, 조양각 일대의 둔치에서 거행, 향토사 연구회 주최.
 
지역연고 예술인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 1561∼1642) 조선시대 가사시인으로 유명한 박인로는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때에는 수군으로 종군하였고, 도학과 애국, 자연을 사랑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특히 가사문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지금도 그의 출생지에는 그의 위패를 모신 도계서원이 있고, 이곳에는 노계집판본(板本)이 있어, 「태평사」, 「사제곡」, 「누항사」, 「선상탄」, 「독락당」, 「영남가」, 「노계가」등 7편의 가사와 「오륜가」, 「조홍시가」(早紅枾歌)등 68수의 시조가 전해지고 있다.
 
◈백신애(白信愛, 1908∼1939) 신춘문예로 등단한 최초의 여류작가 백신애(본명은 무잠 武岑)도 이곳 출신이다. 계몽운동에도 투신했던 그녀는 1929년 조선일보에 ‘박계화’라는 필명으로 「나의 어머니」를 발표하여 등단했다. 그뒤 「꺼래이」, 「적빈」 등을 발표하였으나 일찍이 병사하였다. 이 지방 문인들이 조양각 안뜰 남쪽담장에 「작가 백신애의 고향」이라는 문학비를 세웠다.
 
◈왕평(1904∼1943) 본명은 이두희, 배재중학을 졸업(1920)하고 연예계에 투신, 유명한 가요 「황성옛터」(1927)를 작사함. 영천문화원 뜰에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하근찬(수난이대, 흰종이수염 등), 김제철(청산별곡) 소설가
◈백무산, 송재학, 이상규, 이종기, 이한호 등 시인
◈안심환, 하동훈 등 평론가들이 있다.
 
 
 
 
 
 
 
5. 관광, 여가문화자원
 
관광자원
◈은해사(銀海寺) 은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의 본사로서 영천시내에서 서쪽으로 19㎞떨어진 팔공산(八公山) 동쪽기슭(청통면)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헌덕왕 원년(809)에 왕의 기원으로 혜철국사가 이 곳 해안평에 창건하여 해안사(海眼寺)라 불렀다. 조선조 인종의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이었으나 1545년(인종 원년)에 화재로 전소되었다. 명종 원년(1546)에 왕의 하사금으로 천교화상(天敎和賞)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 복원 중창하여 은해사(銀海寺)라 하였다.
이 사찰에는 거조암을 비롯하여 백흥암, 운부암, 중앙암, 기기암 등 8개의 암자가 속해 있으며 거조암 영산전은 국보 제14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은 보물 제514호, 백흥암 수미단과 극락전은 보물 제486호와 790호, 은해사 괘불탱화는 보물 제1270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명필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친필 현판이 많이 남아 있어 추사체의 보고이기도 하다. 근처에 은해사관광농원이 있다.
 
 
 
은해사
◈공산(치산)폭포 팔공산 북쪽 기슭의 치산계곡에 자리한 치산폭포는 한 여름에는 녹음과 차가운 폭포수로 유명하며, 겨울에는 산악인들의 빙벽타기 연습장으로 각광을 받는 곳이다. 이곳 일대를 치산관광지로 조성할 계획이다.
 
◈임고서원 고려말의 충신이자 대 유학자인 포은 정몽주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조 명종8년(1553)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고 선조36년(1603)에 중건되었다. 고종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5년 복원, 1990년부터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현재는 옛 서원과 새로지은 서원이 공존하고 있다(임고면 양현리). 이곳에는 보물 1109호로 지정된 전적과 보물 제1110호로 지정된 정몽주 영정, 경상북도 지정 기념물 제63호인 은행나무 등의 볼거리가 많다.
 
◈지산고택과 도잠서원 영천시 대창면에 지산고택(芝山故宅, 신광리 소재)과 도잠서원(道岑書院, 용호리 소재)이 있다. 이 두곳은 모두 조선 선조시대의 문신이며 성리학의 대통을 이은 학자이며, 임진왜란때는 귀양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충절을 다한 지산 조호익(芝山 曺好益, 1545∼1609)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지산고택은 지산의 종택이고, 도잠서원은 지산을 제향하기 위해 1613년에 모사리에 건립하였다가 1678년에 현재의 용호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1914년에 복원, 1981년에 보수정화되었다. 경내에 신도비가 있다. 지산 조호익은 학문적으로 낙후한 관서지방에 학풍을 진작시켜 관서부자(關西夫子)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도잠서원
◈조양각(朝陽閣) 영천시 창구동에 소재하는 지방유형문화재 제144호이다. 이 누각은 고려 공민왕 때 부사 이용(李容)이 창건하여 명원루(明遠樓)라고 불렀던 영남 8루의 하나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8년(1742)에 군수 한덕급(韓德及)이 중창하여 조양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누각은 서세루(瑞世樓)라고도 부른다.
금호강의 지류인 남천(南川) 하류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누각을 세워 그 밑으로 푸른 강물이 흘렀으나 지금은 옛날의 경관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원래 누각에는 120여개의 판각(板刻)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관리소홀로 현재 정몽주, 서거정, 김종직, 이이, 이현보 부자, 박인로 등의 시액 70여판만이 남아있어 아쉽다.
 
 
 
조양각
◈보현산(寶賢山)과 천문대 영천의 진산인 보현산(1,124m)은 영천시와 포항시, 청송군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우뚝 서있다. 산세는 땅 표면으로 솟아 올라 끝이 뾰족하고 전체 모습이 방패 모양을 하고 있으며, 억새풀과 참나무 군락을 이루는 주능선은 고산다운 산세를 지니고 있다.
산 정상에는 1996년 4월에 준공된 보현산 천문대가 있다. 이곳에 서면 운주산과 기룡산의 스카이라인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서쪽에는 팔공산이 눈에 들어온다.
 
 
 
천문대
관광코스
◈1코스 영천역 → 조양각 → 은해사 → 거조암 → 오리장림 → 옥간정 → 보현산천문대 → 영천댐 → 임고서원 → 영천역
 
◈2코스 영천역 → 돌할매 → 만불산 → 도계서원 → 도잠서원 → 청제비 → 조양각 → 영천역
 
◈향토유적순례 ① 문화원 → 완귀정 → 청제비 → 도계서원 → 영지사 → 도잠서원 → 최무선장군 유허비 → 만취당 → 숭렬당
 
◈향토유적순례 ② 문화원 → 영산전 → 권장군유물관 → 횡계서당 → 옥간정 → 용계서원 → 매산고택 → 임고서원
 
 
 
영산전
◈드라이브코스 영천역 → 은해사 → 치산계곡 → 제2석굴암 → 팔공산순환도로
 
◈팔공산 등산코스 은해사 → 백흥암 → 중앙암·묘봉암 → 인봉 → 노적봉 → 관봉
 
◈보현산 등산코스 화북면 정각리 → 절골 → 보현산 → 부악산 → 법용사 → 용소리
 
관광안내소
◈영천시 문화공보담당관실 ☎ (054)330-6063, 335-6068
 
◈영천시 숙박협회 ☎ (054)337-4507(숙박안내)
 
◈음식업협회 ☎ (054)332-3393(음식점 안내)
 
관광쇼핑
◈신라토기 신라토기모형, 북안면 유상리 ☎ (054) 336-0867
 
◈영천목공예사 목탁·염주 등, 언하동 ☎ (054) 334-9757
 
◈참선목공예사 목탁·제기 등, 괴연동 ☎ (054) 337-3672
 
◈금호포도 채약산영농조합 포도즙, 금호읍 교대리 ☎ (054)337-0037
 
◈북안식품 참기름·메주 등, 북안면 고지리 ☎ (054)332-7260
 
◈생초록 마늘식초, 청통면 대평리 ☎ (054)334-7171
 
◈원당농장 포도식초·동충하초, 대창면 어방리 ☎ (054)338-2328
 
◈영천양협 누에촌·동충하초, 고경면 가수리 ☎ (054)334-2971
 
◈청호협업 한방차, 청통면 호당리 ☎ (054)334-2115
 
◈토종밀 토종밀가루·밀국수 등, 대창면 병암리 ☎ (054)336-3381
 
 
 
 
 
 
6. 문화시설자원
 
박물관
◈영천민속박물관 영천시 교촌동 288-4, 건평 896평 전시자료 825점
 
도서관
◈영천시립도서관 건평 561평(지하1층, 지상2층), 열람석 462석, 시청각실 120석, 장서수 22,738권
 
공연장
◈영천시민회관 건평 868평(지하1층, 지상2층), 객석 720석, 영화·연극·집회로 활용
 
체육관
◈영천체육관 경기장면적 418평, 객석 2,200∼3,000석, 핸드볼·배구·농구 등 실내경기에 활용
 
문화원
◈영천문화원 영천시 창구동 1-1, ☎ (054)337-3030, 334-4545, 대지 777평, 건평 338평, 원장 김태원
경상북도 영천시 정보
• 영천시의 어제와 오늘
• 영천시의 역사문화자원
【작성】 null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로그인 후 구독 가능
구독자수 : 0
▣ 정보 :
미정의 (보통)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 참조정보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