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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봉화군 경상북도 봉화군 정보
경상북도 봉화군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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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봉화군의 마을 소개
봉화군의 어제와 오늘
about 경상북도 봉화군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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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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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3. 01:02) 
◈ 봉화군의 어제와 오늘
1. 내 고장의 어제와 오늘
 
 
 
본군은 경상북도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백산을 주산으로 하여 여러 낙맥과 험난한 고개마루로 이루어진 산골자기 군이다.
동으로는 울진군과 영양군에 접하여 있으면서 낙동강 상류가 동점에서 발원하여 소천면을 거쳐 명호면 소재지를 휘감아 석천이 가파르게 흘러 청량산을 안고 돌아 안동시로 이어져 가고, 남으로는 안동시에 면하여 있고 태백산을 경계로 강원도 삼척과 영월군이, 서쪽에 영주가 있다. 계곡은 가파르며 그윽히 깊고 험난하며 85%가 산이다. 전답은 띄엄띄엄 평지로 내려오면서 다소의 평야가 형성되어 비교적 비옥한 편이다. 기후조건은 편차가 심하여 군내의 읍면들 사이에서도 같은날 15℃의 기온차가 생기며 우량은 더더욱 심하다.
산은 많으나 지질이 좋아 옛부터 나무가 많았고 본군의 자생 춘양목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이 소나무는 곧고 굵고 크게 자라며 옹이가 없고 송진이 잘 스며들어 썩지 않는 좋은 나무이다. 본군은 조선 초엽까지도 거의가 부곡이었고 주로 화전민이 여기 저기서 3~4년간 살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 사는 사람뿐인 고장이었다. 그후 다른 곳에서 정착민이 들어와 토지를 개간하고 집을 지으면서 마을이 점진적으로 발전하였다.
 
 
 
열목어
 
 
 
열목어 서식지
 
<봉화군 연표>
시 대
연 대
주 요 사 항
 
고대
760
경덕왕 전까지는 고구려 영토로 고사마현이라 하였다.
경덕왕때부터 옥마현이라고 개칭하였다.
 
고려
940
태조 23년 봉성현이라고 또 개칭하였다.
 
1389
공양왕 1년 봉화현이라고 또 개칭하였다.
 
1361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봉화 청량산까지 왔다.
 
근대·
현대
1908
일본군이 태백산사고에 불을 질렀다.
 
1913
군청사를 내성면 포저리 285번지 현 청사로 ?ケ芽?
 
1967
군청사를 콘크리트로 신축
 
1979
봉화면이 봉화읍으로 승격
 
1983
석포 출장소가 면으로 승격
 
1986
군민회관 건립
 
1993
문화원 신축
 
 
 
 
 
 
 
 
2. 역사문화자원
 
역사적 사건과 현장
◈공민왕의 피난지 고려말 공민왕 8년(1359)에 4만의 홍건적이 추운 겨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 왔으나 실패하고 2년 후인 동왕 10년(1361) 10월에 10여만의 홍건적이 다시 쳐들어와 개성을 점령하고 남으로 내려오게 되자 왕은 피난을 떠나 이곳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까지 오게 되었다. 청량산으로 들어가려면 낙동강을 건너야 했고 이 강을 공주가 건너기 위하여 지방의 부인과 처녀들을 동원시켜 등을 굽혀 일렬로 강물에 서게하고 그 등을 공주가 버선발로 밟아 걸어 강을 건넜다. 이것이 전하여 ‘놋다리 밟기’로 이름하여 지금도 군민 청량문화축제때 고등학교 여학생들을 통하여 놀이화 하고 있다. 또한 공민왕이 신하들과 강을 건너는데 말 다섯 마리가 나란히 서서 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았다 하여 ‘오마교’라 하였다.
청량산에 들어오면서 만약 홍건적이 이곳까지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하여 산에 성을 쌓는데 역시 말 다섯 마리가 나란히 갈 수 있게 높고, 넓고, 튼튼했다 하여 ‘오마도성’이라고 하였다. 그외 공민왕(우리나라 4대 명필의 한사람)이 친필로 청량사에 ‘유리보전(琉璃寶殿 : 가로 260㎝, 세로 60㎝)’이라고 쓴 액판이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파리장서 기미년 3·1운동때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연이어 한국유림단에서도 전국을 대표한 곽종석(본군 춘양인), 김복한(본군 해저인) 등 137명의 대표들이 작성 서명한 ‘한국독립청원서’가 바로 본군 봉화읍 해저리에 있는 만회고택의 수명루에서 작성되었다. 본군 해저 사람 김창숙이 상해임시정부에 가져가 한문으로 3,000부, 영문으로 2,000부 번역 인쇄하여 김규식 박사로 하여금 프랑스 수도인 파리에서 열리게 되는 세계평화회의에 제출하였다. 파리까지 간 많은 글이라 하여 ‘파리장서’라 불리워졌다.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유숭조(1452∼1512) 유숭조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로 성종 20년(1489)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직을 거쳐 장령의 자리에 있을 때, 연산군의 잘못된 점을 규탄하다가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원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판결사의 관직에 올랐다. 경연에 나아가 폐왕이 된 연산군의 나쁜 점은 버리고 좋은 점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언을 하여 반정 공신들의 따가운 질책으로 파면에까지 이를 뻔 하였으나 다행히도 성희단이 선비를 아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으로 전직을 당한 바 있는 선비로 직간에 용서가 없는 지조 높은 유학자이다.
도학정치를 실현하려고 주관을 크게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로 경사에 능통하여 조광조, 김인후, 이이 등 기호학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우리나라 한문에 토를 처음 붙인 학자이다. 『대학강목잠(大學綱目箴),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 『경서언해(經書諺解,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해석한 것임)』 등 저서와 진일제 문집이 간행되었다.
 
◈권벌(1478∼1548) 권벌은 조선조 중기 학자이며 정치가이다.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이때에 사림파 조광조가 왕도정치를 시행하려던 중에 훈구파들과 알력이 생겨 양파로 갈라지자 지난날의 무오, 갑자 양사화의 처참함을 생각하여 양쪽을 조정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가 다시 일어나자 공직을 등지고 고향에 돌아와 15년간 많은 제자를 길렀다. 중종 28년(1533) 한성부윤이 되었다. 다시 한성판윤으로 승진 또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개종계주청사(改宗系奏請使)로 조선왕조의 혈통이 명나라에 잘못 기재된 것을 고치려 북경에 가서 능숙한 정치수단으로 뒷날 다시 편찬할 때 바르게 고쳐주겠다는 언질을 받아왔다. 이 공으로 우찬성에 승진되었다. 이때 마침 대·소윤파의 싸움으로 을사사화가 일어나 무고한 관직자들의 큰 피해를 막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다시 벽제역 벽보사건으로 삭주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종개(1558∼1592) 유종개는 임진왜란때의 충신이다. 선조 18년(1585)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에 돌아와 있을 때 일본에서 대병을 이끌고 고니시 등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왔다. 의병 600여명의 대장이 되어 소천면 화장산 전피현에서 싸우다가 의병이 전멸되었는데 금산의 700의총 다음 가는 큰 전쟁터였다. 불행하게도 대장 유종개는 왜군에게 사로 잡혔고, 간악한 병사들은 칼날을 세워 머리끝 정수리에서부터 하나하나 살가죽을 벗기니 피는 온몸을 감싸다 못해 땅바닥에 떨어져 고였고 지조 높은 선비라 왜군에게 도리어 소리치며 항의를 하였다. 하나 조금도 관계치 않고 얼굴 전체가 벗겨지고 몸통으로 칼이 내려올 때 쓰러졌다. 왜군들은 더 간악을 쓰면서 무참히 쓰러진 피투성이를 발끝까지 살갗을 벗겨 자기들의 가방에 넣어 가져갔다. 임진왜란 전투 사상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한 사람이다.
 
내 고장의 문화유산
■국보
◈마애여래좌상 제201호, 북지리 357-1
 
■보물
◈3층석탑 제52호, 서동리 104
 
◈충제일기 제261호, 유곡리 963
 
◈근사록 제262호, 유곡리 963
 
◈충제권벌종손가 소장전적 제896호, 유곡리 963
 
◈충제권벌종손가 소장고문서 제901호, 유곡리 963
 
◈충제권벌종손가 소장유묵 제902호, 유곡리 963
 
◈축서사 석불좌상부 광배 제995호, 개단1리
 
■사적
◈태백산 사고지 제348호, 석현리 산 126
 
■사적 및 명승
◈권충제관계유적 제3호, 유곡리 산 131
 
■천연기념물
◈열목어서식지 제74호, 대현리 226
 
■중요민속자료
◈만해고택 제169호, 해저리 485
 
◈쌍벽당 제170호, 거촌리 148
 
◈계서당 제171호, 가평리 301
 
 
 
계서당
■전통건조물
◈남호고택 제18호 , 해저리 723
 
◈만산고택 제19호, 의양리 388
 
◈뇌풍정 제21호, 법전리 168
 
■유형문화재(이하 도지정)
◈청량사 유리보전 제47호, 북곡리 247
 
◈석조여래입상 제131호, 의양리 153-1
 
◈석조여래입상 제132호, 봉성리 산 13-1
 
◈천성사 석조여래입상 제133호, 금봉리 262-2
 
◈천성사 3층석탑 제134호, 금봉리 263
 
◈한수정 제147호, 의양리 134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제154호, 오전리 1144-1
 
◈각화사 귀질 제189호, 석현리 산 126-1
 
◈감고당문적 제190호, 풍호리 680
 
◈봉화향교 제253호, 봉성리 267
 
◈종선정 제264호, 문촌리 772
 
◈비로사나불 입상 제273호, 동면리 산 268
 
◈구가암 제283호, 눌산리 579
 
■무형문화재
◈초고장 제21호, 오전리 255
 
◈유기장 제22호, 삼계리 285
 
■민속자료
◈강씨 종택 제40호, 척곡리 1165
 
◈오고당 구택 제52호, 봉양리 598
 
◈경암헌 고택 제53호, 황전리 698
 
◈도암정 제54호, 황전리 502
 
◈송석현 제96호, 석평리 302
 
◈보동재사 제97호, 문단리 962
 
◈서설당 제104호, 유곡리 554
 
◈도토마리집 제107호, 분천리 1455
 
◈까치구멍집 제108호, 분천리 1466
 
■문화재자료
◈겸집 제109호, 설매리 519
 
◈삼결까치구멍집 제110호, 설매리 503
 
◈봉산이사 제149호, 황전리 706
 
◈장암정 제150호, 오록리 628
 
◈청간당 제151호, 오록리 1154
 
◈무진장재 제152호, 문촌리 505
 
◈야옹정 제153호, 구천리 348
 
◈구만서원 제154호, 화천리 436
 
◈몽화각 제155호, 화천리 363
 
◈이오당 제156호, 법전리 252-1
 
◈축서사 3층석탑 제157호, 개단1리
 
◈축서사석등 제158호, 개단1리
 
◈권진사댁 제190호, 의양리 235
 
◈풍산류씨제사 제219호, 삼동리 314
 
◈창애정 제237호, 소천리 285
 
◈청량정사 제244호, 북곡리 245
 
◈사덕정 제249호, 풍정리 671
 
◈두릉서당 제253호, 적덕리 748
 
◈사미정 제276호, 소천리 554
 
◈폐탑 제283호, 운계리 140-1
 
◈구산사당주사 제297호, 구천리 324-6
 
◈경서정 제298호, 법전리 137
 
◈동암서당 제299호, 석평리 332
 
◈백암재사 제303호, 운계리 635
 
 
 
 
 
 
3. 생활문화자원
 
전통생활민속
◈신흥유기 신흥유기는 150여 년 전 곽씨와 맹씨 두 사람의 시작으로 기술이 발전하여 안성 유기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 1920년경에는 20여 개의 공장이 있어 주로 두들겨서 만드는 소위 ‘방짜’로서 식기류와 꽹과리, 징 등 농악기류를 위주로 하는 유기로 그 질이 우수하여 영남북부지방은 물론 서울 영동과 호남지방까지 이름을 떨쳐 그 수요와 공급이 미처 따르지 못하였다고 하니 그 전성시대의 유기생산 규모는 짐작할만하다.
일제시대의 유기징발로 명맥이 끊어지다 해방과 더불어 새로이 활기를 되찾아 지금도 무형문화재인 고해룡, 김선익 등 몇 집만이 재떨이, 촛대, 향로, 잔대, 징, 괭과리, 칠첩반상기 등 여러 가지를 주문에 의해 생산하고 있다.
 
 
 
유기전시
 
 
 
유기제작모습
◈안동권씨 집성촌 봉화읍 유곡리는 안동권씨의 집성촌으로 500여 년 전부터 형성되어 왔다. 풍수지리설에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많은 과거급제자와 선비가 나서 솟대가 집집마다 높이 솟아 있어 그 그늘로 인하여 세탁물이 잘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마을 땅 밑에 금닭 알이 있다고 믿고 있어 수도나 우물을 파지 못한다. 언제나 앞 냇물을 새벽에 길러다 먹는다. 이 마을은 안동하회, 안동내 앞, 경주양동과 함께 영남 4대 길지(吉地) 중 제일의 길지로 지금까지도 불천위 제사 때 또는 그외 행사때는 외지에 나가 있는 후손들이 와서 옛날 전통제례에 따라 참여하여 다른 마을에 귀감이 되고 있다.
 
구전설화
◈방울당과 소야 여씨부인이 마을 앞 개천에서 빨래를 하는데 물에 떠내려오는 방울을 주워다가 장롱속에 넣었다. 그날밤 이웃에 사는 남씨 부인에게 신선이 나타나 여씨부인의 방울을 찾아다가 당을 짓고 마을의 수호방울로 모시면 마을 전체가 안락하고 부자마을로 잘 살것이라 하였다. 그 후 꿈에서 깨어난 남씨 부인은 동네에 알려서 그대로 시행하여 잘 살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새로이 안동권씨가 들어오면서 그 정성이 해이해지자 그만 가뭄이 심하게 들어 마을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방울당에다 기우제를 지냈더니 금세 비가 많이 내려 말라가던 들의 곡식이 생기를 띠며 다시 깨어났다 하여 깨어날 소(蘇)자와 들 야(野)자를 써서 마을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
 
◈삼우신암(三友神巖) 태백산 바로 밑 깊고 깊은 골짜기에 넓다란 암반석이 하나있다. 단종은 그의 삼촌인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청령포로 쫓겨와서 사약을 받고 물에 던저져 수중 고혼이 되어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마침 신선이 된 신라때 문장가인 최치원이 안타까이 여겨 단종신을 태백산 마루 만경대로 인도하니 서울을 향하여 절을 세 번하고 숙부인 세조가 성군이 되기를 빌었다.
그 옆에 자리하고 있는 단군에게 인도시켜 인사하고 셋이서 그 밑 넓은 바위에 앉아 얘기하고 그윽한 숲속을 거닐면서 지내 왔기에 그 바위를 이름하여 ‘삼우신암’이라고 하게 되었다.
 
◈효구총(개무덤이야기) 변석의 집에 개가 새끼를 낳았다. 주인은 곧 어미개를 팔았고 개장수는 그 부근에서 어미개를 잡았다. 그후부터 새끼가 굶어 죽었고 주인은 모두 들에다 버렸다. 몇 달이 지나도 여름철인데 썩지 않아 관아에 보고하니 이는 변석의 효성이 지극하여 기르던 짐승도 주인에게 교화되어 그렇다고 하면서 그 죽은 개를 묻고 효구총(孝拘塚)이라고 써서 비석을 세웠다. 어느날 보부상들이 이 앞을 지나다 “사람도 비가 없는데 무슨 개무덤에 비”냐며 비를 파괴하자 그 즉석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신비한 이야기가 지금도 전하고 있다.
 
◈사투리 이 지방의 억양이 세서 부드럽지 못하다.
소꿀뺑이:솔방울, 오방지다:여러개가 어울려 있는 것, 아뱀:아버님, 어맴:어머님, 오라배:오빠, 액씨:아가씨, 돼림: 도련님, 할배:할아버지, 할매: 할머니, 아재: 아저씨, 새아재:고모부, 머슴아:남자아이, 바땡이:다님, 지지바: 여자아이, 후루매기:두루막, 가니껴:가느냐, 중우:바지, 속꼿:속옷, 치매:치마, 서숙:조 등
 
주민의 종교생활
토속신앙은 그리 많지 않다. 불교는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확실히 모르나 전성기때는 대단했을 것이 분명하다. 어느 마을 할 것 없이 ‘절골’이란 이름이 다 있듯 전군에 현존해 있는 사찰수는 약 18개소이다. 개신교는 약 90여 년 전 김진명이란 사람이 영주에서 세례를 받은 후 전파시켜서 현재 교회의 수는 48개소나 있다.
<봉화군 종교현황>
 
명칭
소재지
 
천주교
봉화천주교교회
봉화읍 포저리 192-1
 
석포교회
석포면 석포리
 
불교
각화사
춘양면 석현리 599
 
축서사
물야면 개단리 1리
 
청량사
명호면 북곡리 247
 
천성사
봉성면 금봉리 261
 
홍제사
소천면 고선리 127-6
 
현불사
석포면 대현리 327
 
개신교
봉화제일 교회
봉화읍 포저리 302
 
화천교회
봉화읍 화천리 380
 
물야교회
물야면 오록1리
 
봉성교회
봉성면 봉성1리
 
춘양교회
춘양면 의양리 364
 
소천교회
소천면 현동4리
 
재산교회
재산면 현동1리
 
명호교회
명호면 도천리 225
 
상운교회
상운면 가곡리 395
 
 
 
 
지역의 별미음식
◈유곡한과 유곡의 한과는 이 마을의 5~60대 주부들이 오랜 경험을 살려 재래식 방법으로 정성과 열의를 다해 만든 것이다. 찹쌀, 콩, 밀가루 약간, 들기름, 깨, 식물성 색소 등의 재료로 열을 가하여 만든 것으로 그 맛이 뛰어나고 색상 등 영양이 좋아 품질이 우수하여 전국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있어 물건이 모자라는 형편이다.
 
◈봉성의 돼지 숯불갈비 봉성의 돼지 숯불갈비는 약 10년 전부터 개발한 서민의 값싼 영양식품으로 봉성 5일 장날이면 각 식당에서 특별한 요리 기술로 구워 상추 등 산나물과 같이 먹게 하여 그 인기가 점차 상승하였다. 이제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대중화 되어 원근을 막론하고 선전이 잘 되어 많은 매상을 올려 수입을 크게 보고 있다.
 
지역의 토산품과 특산물
◈송이 봉화는 산이 많은 군으로 소나무가 무성한데 거기서 자생하는 버섯을 ‘송이’라고 한다. 이는 맛이 여느 버섯과는 달리 식욕을 일으켜 신체의 균형을 잡아주면서 모든 병에 예방도 되어 경향 각지는 물론 일본 사람들이 직접 매입해가 물론 주문이 한없이 많다. 매년 9월에는 송이축제 또한 성대히 한다.
 
◈대추 봉화군은 90%가 산악지대이다. 산비탈은 자갈이 많아 대추나무를 심으면 배수가 잘되어 대추나무 전문병인 ‘오갈살이’가 덤벼 들지 못한다. 또한 고랭지대라 그 열매 또한 단단하고 토실토실하여 잘 썩지 않으며 약효는 개량종에 비하여 훨씬 뛰어나 주문이 많다. 옛날에 양반들은 대추 세 개면 점심 한끼라 하였듯 그처럼 몸을 온화하게 하면서 일시 영양섭취도 된다.
 
 
 
 
 
 
4. 예술문화자원
 
지역문화예술행사
◈청량문화제 [상세정보] 청량문화제란 도립공원인 청량산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이 산은 신라 명필 김생이 공부하였고 신라 화가 솔거도 여기서 공부했으며 조선조 퇴계 이황도 이곳에서 공부하여 대학자가 되었다. △주최 : 봉화문화원 ☎ (054)673-2350 △시기 : 매년 9월 20일∼25일 사이
 
 
 
청량문화제
◈송이축제 임시시장을 개설하여 요리의 전문점이 점포를 설치하고 각종 요리를 하여 시식을 한다. 본군은 물론 전국의 관광객과 일본인이 많이 온다.
△주최 : 봉화군청 ☎ (054)673-5800, 679-6094 △일시 : 매년 8월 하순경
 
 
 
송이축제
◈눈꽃환상열차 석포면 승부리는 오지중 오지이다. 산은 물론이며 또한 낙동강 상류라 흐르는 물이 맑기로 유명하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눈이 오래도록 남아 눈꽃(雪花)이 높고 큰산과 깊은 계곡 소나무에 생긴 꽃이다. 이 소나무에 눈이 내려 얼어서 된, 흰눈과 파란 솔잎이 어울려서 핀 것이다. 이 모습은 봄철의 금강산보다 더 경치가 눈부시다. 또한 승부역이 있어 이때는 특별열차를 운행하며, 10주년이 지난 오늘날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다. △주최 : 봉화군청 ☎ (054)673-5800, 679-6094 △일시 : 11월∼명년 2월
 
 
 
눈꽃을 보러가는 행렬
◈ 산나물축제 태백산 지맥이 세차게 뻗어내려 고랭지 산나물이 자생한다. 그 자연미에 의한 향취를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각지에서 나는 산나물은 집에서 기른 것이기 때문에 나물 원래의 맛은 떨어진다. △주최 : 봉화군청 ☎ (054)673-5800, 679-6094 △시기 : 6월 하순경
 
 
 
산나물축제
지역언론기관
◈유선방송사 ☎ (054)673-0223, 봉화군 봉화읍 포저리 236-5
 
 
 
 
 
 
5. 관광, 여가문화자원
 
관광자원
◈석천 봉화군청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400m 지점에 있는 계곡이다. 냇가의 물은 맑고 깨끗하며 암반석이 넓고 좁고 또 여러 가지로 어울려 펼쳐져 있고 양쪽 산에는 큰 소나무가 내를 향하여 굽어져 흡사 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골짜기 안의 넓고 넓은 반석 위에는 20간의 정자가 있다. 일컬어 영남의 무릉도원이라 할 정도로 경치가 좋은 유원지다. 여기 옛날에 학생들이 정자에서 자고 공부하는데 도깨비가 난무해 자꾸만 학생들이 줄어 천하명필이 될 학생이 도깨비가 있는 바위에 ‘천하동천(天下洞天)’이라고 초서로 쓰니 그 필력에 눌려 도깨비는 물 따라 내려갔다고 한다.
 
 
 
석천 유원지
◈청량산 도립공원으로 기암괴석의 절묘함과 그에 뒷받침하는 숲의 어울림과 또한 각기 다른 66봉(12봉)에 그 모두를 휘감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등 하늘이 내려준 아름다운 산이다.
 
◈열목어 서식지 울창한 수목과 깊은 계곡이 있는 관계로 한여름 수온이 10℃를 밑돌아 열목어(熱目魚)가 서식할 수 있는 곳으로 계곡 일대가 천연기념물 제74호 열목어 서식지로 되어 있다. 열목어는 옛날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는 진상품이었다고 한다.
 
관광코스
◈제1코스 석천 → 다덕약수터 → 전피현전투지 → 청옥산
 
◈제2코스 석천유원지 → 봉화향교 → 명호래프팅장 → 청량산
 
관광안내소
◈봉화군청 문화관광과(군청내) ☎ (054)679-6094
 
여가시설
◈군민체육관 군민들의 각종 체력단련시설이 되어 있고 매년 10월에는 봉화군민 체육대회가 인근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되고 있다.
 
◈청옥산 산림욕 휴양소 석포면에 소재하고 있으면서 청옥산은 계곡이 넓고 또한 물이 맑아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우거져 한여름에도 그 곳에 들어서면 서늘해진다. 여기는 300명의 인원이 잘 수 있는 합숙소이자 또한 개인이 생활할 수 있는 작은 콘도 및 자연 급수 시설이 잘되어 있어 많은 학생 및 사회단체들이 찾아 여름을 산림욕으로 즐겨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가곤 한다.
 
 
 
 
 
 
6. 문화시설자원
 
도서관
◈도서관 봉화군 봉화읍 포저리 231-48 ☎ (054) 672-4381, 도서수 : 32,540권, 독서 및 대여도 가능함.
 
문화원
◈봉화문화원 봉화읍 포저리 216 ☎ (054)673-2350 원장 김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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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