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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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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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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005년 6월 3일
해남군의 어제와 오늘
about 전라남도 해남군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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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3. 01:02) 
◈ 해남군의 어제와 오늘
1. 내 고장의 어제와 오늘
 
 
 
해남군은 한반도의 서남쪽 모서리에 자리잡은 전남 최대의 군역으로 동쪽과 동북쪽만 강진·영암과 연결된 육지이고 3면이 모두 바다에 둘러싸인 반도로 되어 있다. 옛날부터 이곳은 영산강 유역의 문화요소들이 파급되거나 형성되는, 혹은 반도의 중심세력이 전파되는 막다른 골목으로서, 더욱 크게는 이곳의 서남부를 경유하는 해로가 중국∼한국∼일본을 연결하는 문화 이동로였다는 점에서 다양한 문화적 성격으로 주목되는 고장이다. 해남은 해남반도와 화원반도, 그리고 산이반도 등 3개의 반도를 군역으로 하고 있는 관계로 많은 유·무인도에 긴 리아스식 해안선을 안고 있기 때문에 이 해안선의 굴곡마다에 간척지와 염전, 김 양식장 등이 발달하고 화원반도와 영암군을 연결하는 영산강종합개발계획에서 보듯이 아직도 농경지를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곳이다. 그러나 지역발전 면에서 볼 때 지리적으로 국가경제 및 지역경제의 중심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불이익이 있고, 군역이 분지형반도(分枝形半島)로 되어 있어서 생활권 형성과 사회통합 기능면에서 어려움 있다. 또 지역의 면적이 너무 크기 때문에 행정 서비스 면에서 소외된 지역이 있고, 지역 특성상 농업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재정자립도가 아주 낮아서 지방자치시대가 열렸다고는 하지만 지역발전계획의 자주성 확보에 큰 어려움을 안고 있다.
 
<해남군 연표>
시 대
연 대
주 요 사 항
 
고대
신석기 후기
두모리에 해남 최초의 인류 등장
 
청동기 시대
해남지역 전역(90여 처)에 걸쳐 강성한 청동기문화인(고조선인)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음
 
삼한 시대
최소한 3개의 마한제 소국 세력이 성립(소위건국/신미국/선성국)
 
삼국
백제
성왕 16년에 백제의 군현에 편제되어 백포만 연안에 쇠금현, 오호만 연안에 고서이현, 화원반도에 황술현이 설치됨
 
통일신라
757
경덕왕 16년에 해남3현의 이름이 침명(쇠금), 고안(고서이), 화원(황술)으로 개칭되고 특수행정구역으로 사라향 송지향 냉천부곡이 설치됨
 
고려
 
고안을 죽산으로 침명을 해남으로 개칭하고 황원을 군으로 승격시켜 나주목 영암군 임내로 하였으며 옥산현(사라향), 송량현(송지향), 옥천현(낸천부곡)을 신설하고 신갈부곡, 팔마부곡, 북평향 좌곡부곡, 마봉소 등을 신설
 
조선
1409
진도와 해남을 합하여 해진군으로 하고 치읍을 녹산역지로 옮김
 
1437
진도와 해남을 나누어 해남현을 복설하고 현감을 두었으며 치읍을 현 해남읍으로 옮김
 
1895
전국적인 행정개편에 따라 해남군으로 승격
 
근·현대
1906
진도군의 삼촌면 영암군의 옥천시면 옥천종면 북평시면 북평종면 송지시면 송지종면이 해남군에 들어옴
 
1914
군면 폐합과 함께 완도 영암 강진의 해남에 인접한 지역을 병합 13개면으로 폐합 개편
 
1956
해남면을 읍으로 승격
 
1983
북평면을 나누어 북일면을 신설 1읍 13면으로 재편
 
1992
해남군역을 1읍 13면 513리로 편제하여 현재에 이름
 
 
 
 
 
 
땅끝 해돋이 광경
 
 
 
 
2. 역사문화자원
 
역사적 사건과 현장
◈장보고 해상왕국과 해남청자 해남에는 산이면 진산지역과 그 대안인 화원면 뱀사골 일원에 각각 1백여기를 헤아리는 신라청자 요지가 있다. 진산요지는 그 생성연대를 고려청자 후기 또는 민수용 녹청자로 평가되어왔다. 그러나 근래 재지연구가 변남주가 뱀사골요지를 발견하고 그 조사보고서를 통해서 이 요지의 생산품이 장보고 해상왕국의 무역품으로 제작되었음을 안압지, 미륵사지, 황룡사, 일본 후쿠오카지역 출토품과 비교하여 검증함으로써 장보고 해상왕국의 경제적 배후세력으로 이들 장인들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왕건과 화원반도 장인세력 별로 이름이 없던 화원반도 세력이 고려 태조에 의하여 갑자기 군격(郡格-黃原郡)을 얻게되는 이유도 이 무렵에 생산된 3만 6백여 점의 진산청자가 완도 약산면 어두리 앞 바다에서 인양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화원반도의 장인세력의 청자생산 능력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후삼국시대에 남해안세력을 업고 왕건이 금성(지금 나주)의 신검(神劍)을 칠 때 그 경제력의 배후에 또한 이들이 있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다.
 
◈명주항로와 최초의 향교 해남에는 고려와 송나라를 잇는 명주항로와 함께 최초의 향교에 관한 구전과 그 유적지가 전한다. 구전은 고려의 사신이 송나라에 갔을 때 그쪽에서 고려에도 공자를 모신 문묘가 있는가 라고 물었는데 고려 사신이 얼떨결에 있다고 대답하고는 돌아오는 길에 송나라 사신들이 지나는 지금 향교동에 문묘와 향교를 세웠다는 것이다. 옛 송지부곡이던 이곳이 고려 때에 갑자기 송양현(松陽縣)으로 지위가 격상되는 것과 아울러 그 유지로 향교지와 옥터와 활터가 전하며, 일대에서 고려기와편이 많이 수습되고 있어 구전 사실을 방증하여 준다.
 
◈삼별초와 삼지원 삼지원은 황산면 삼호리로 진도 벽파진과 마주보는 해남 쪽 나루터를 말한다. 삼별초군이 진도에 입성한 것은 원종 11년(1270) 8월 19일의 일이며, 9월에는 그 일부가 유존섭(劉存燮)의 인솔아래 해남현에 주둔하니 장선·거제·제주 등이 그 세력권에 들어가고 육지로는 장흥·강진·합포·전주·동래 등지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삼별초군을 치기 위해서 여·몽 연합군이 해남 삼지원에 진을 친 것은 같은 해 11월의 일이며, 그들의 총공격으로 삼별초군이 승화후(承化候) 온(溫)과 아들 환(桓), 그리고 배중손(裵仲孫) 등 주류세력을 잃고 제주로 패퇴한 것은 원종 12년(1271) 5월 15일의 일이다.
 
◈북변의 여진과 해남 만주의 여진족은 후에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는 세력이다. 국초에 북변에 6진 4군을 설치하였으나 세조 초에 4군을 폐지하자 이곳을 통해서 그들의 침구가 빈번하였다. 그리하여 선조 16년(1583)에는 여진의 대대적인 침구가 있었다. 이 때에 추파(秋坡)만호 김인수(金仁秀)와 녹둔도농보(鹿屯島農堡)의 무장 임경번(林景藩)은 국가 북변의 그와 같은 정황하에서 나라의 간성으로써 그 방수의 책임을 다하였던 사람들이다.
·임경번 :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에 있었던 녹둔도싸움에서 임경번은 전사하고 이순신은 패전의 허물로 생애 최초의 백의종군을 체험하게된다. 조정에서는 임경번에게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증직하고 시신을 엄숙히 운구하여 옥천면 가작동에 안장하고 강성사(江城祠)에 배향했다.
·김인수 : 추파보는 강계도호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선조실록 19 경진(1580)에 보면 추파만호 김인수는 적이 드나드는 길을 스스로 탐색하여 하막 진보에 각별히 조심하도록 해달라고 조정에 건의하는 등 방수자로서의 철저한 책임감과 용기와 기민성을 발휘하였다. 정해년에 귀향하자 곧 고향인 삼산면 감당리에 훈련장을 개설하고 젊은이들을 교육하였는데 이들 중 1백1명이 백의로 정유년 명량해전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충절을 기려 마을 앞에 1백 1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는데 지금도 그 중 몇 그루가 전한다.
 
◈왜란의 전초전 달량진 사변 명종 10년(1555) 달량진의 왜변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7년 전의 사건으로서 달량진은 현재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있었던 수군진으로 해남과 완도의 달도를 연결하는 곳이다. 이곳 역시 해로상의 요충지 일뿐 아니라 그 길목을 장악하면 강진 영암 등지로의 상륙이 가능해 바다로 쳐들어오는 왜구들로서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당시 왜구는 60여척의 배로 달량진에 침입하여 병사 원적(元績) 등을 살해하고 이어 어란포진(현재 송지면 어란리), 마도진(현재 강진군 대구면 마량), 가리포진(현재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등의 여러 진과 장흥·병형 등을 함락하고 나주까지 쳐들어갔다. 이때 해남현감 변협(邊協) 만이 성을 굳게 지켰다. 나중에 변협이 장흥도호부사로 승진하여 해남을 떠나면서 그 기념으로 심었다는 소나무가 지금도 해남군청 전정에 수성송(守城松)이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우수영 지금 문내면에 우수영의 이름이 전하는 것은 세종 22년(1440)에 당시까지 무안 대굴포에 있었던 수군 처치사영이 이곳 황원곶(荒原串)으로 옮겨오면서부터의 일이다. 그후 세조 10년(1464)에 절도사 영으로 되고 성종 10년에 순천(지금 여수)에 또 하나의 수영이 생기면서 우수영(全羅右道 水軍節度使營)이 되었다. 관원은 전라수군절도사(정3품)와 중군(虞侯·정4품을 겸함) 이 각각 1명씩이며 속읍이 나주·영암·진도·영광·해남·무안·함평 7읍이고 속진이 법성포·군산·고군산·위도·임치도·고금도·가리포·남도포·금갑도·어란포·이진·신지도·마도·목포·다경포·지도·임자도·검모포 19진이며, 본영 및 속읍진의 배는 130척(진홍 24척) 이었다.
 
◈정유재란과 명량대첩 임진왜란 전 기간 중 한번도 진적이 없는 조선수군 최초의 패전이 칠천량(漆川梁) 바다에서 진행되고 있을 무렵 백의 종군 중이던 이순신은 초계(草溪)의 권율 전막에 머물고 있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재임(再任)의 특명을 받은 것은 원균이 칠천량에서 전사한 뒤 일주일이 지난 7월 22일이었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괴멸시킨 왜 수군은 한산도에 기지를 두고 본격적인 서공(西攻)을 준비했으며, 이윽고 300여 척의 선단을 편성하고 다도해 해역에 진출하여 55척의 전위함대가 먼저 앞장서 명량을 향했다. 이때 이순신은 백파진에 머물고 있었는데 병력은 칠천량해전에서 도망쳐 백파진에 숨어 있던 경상수사 배설의 배 12척과 송여종(녹도만호)의 1척이 전부였다. 9월 7일 밤 어란포 해상에서 55대 13의 접전이 벌어졌다. 이 접전에서 왜 수군은 13척의 군선을 잃고 패주했다. 9월 14일 왜 수군의 주력함대 330척이 어란포 해상에 나타났다. 9월 15일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결전의 날을 16일 이른 아침으로 정하고 적을 서서히 명량으로 끌어들였다. 순조(順潮)를 타고 명량 어귀에 다다른 왜수군은 그곳에서 200여척의 조선수군을 보고 황망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그것은 피난선과 어선으로 꾸민 위장함대였다. 왜수군은 전력으로 이 위장선대를 쫓아 명량수로에 달려들었다. 명량을 통과하면 바로 목포이며 거기서부터 조선반도의 서해안이 된다. 왜 수군은 이 명량을 단숨에 뚫고 나가 서해로 진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왜 수군이 명량에 들어섰을 때 마침 조류의 흐름이 멈췄다. 그리고 물 흐름이 갑자기 순조에서 역조로 바뀌면서 왜 수군의 발목을 잡았다. 그 사이에 위장선들은 멀리 달아나고 조선수군의 함포가 터지면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 12척이 아수라 같이 왜 수군을 덮쳤다. 이 싸움에서 모두 33척의 군선을 잃고 동으로 퇴각한 왜 수군은 다시 싸울 전의를 상실하고 한산도에 유진하며, 오직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하던 중 서해를 초계하고 돌아온 이순신과 이때에 조선수군에 합류한 진린(명나라 수군)에 의해서 한산도 앞 바다에서 한바탕 경을 치고 허겁지겁 자기 나라로 도망치고 만다.
 
◈정유재란 해남의막 정유재란 관련 해남의막에 노송모의청, 감당모의청, 병치의막이 있다.
·노송모의청 : 정유년 6일 원균이 임진 7년 해전사에 최초의 패전기록을 남기고 조선 수군은 완전히 괴멸되고 말았다. 이러한 전황 속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된 이순신이 순천에 이른 것은 정유년 8월 3일이었다. 당시 김안방(金安邦)은 종제 안우(安宇)와 함께 서호(西湖-지금 산이면 노송리)에 모의청을 설치하고 진사 백진남(白振南), 장흥 마하수(馬河秀), 인근의 친구 김성원(金聲遠), 정명열(丁鳴悅), 문영개(文英凱), 정홍원(丁弘遠), 백선명(白善鳴), 김택남(金澤南), 임영개(任英凱)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김안우는 먼저 자신의 가산을 털어 모범을 보여 이로써 군량·군기·의복을 모취하여 이순신에게 공급했으며, 명량해전에는 피난선과 어선 수백 척을 이끌고 울돌목을 가로막아 적을 유인하는데 공헌했다.
·감당모의청과 101인 의사송 : 전술한 북변의 여진과 해남의 김인수조와 가전문서 참조.
·병치산의막과 만의총 : 명량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이순신이 서해를 초계(哨戒)하는 동안에 해남에 대한 보복전을 단행하여 우수영을 초토화하고 해남읍을 점거하여 대흥사에 진을 쳤다. 서해의 잠적을 쫓아 북상했던 이순신이 다시 우수영을 향해서 회진하고 있는 10월 10일, 지금 옥천면 대교들에서는 윤륜(尹綸), 윤신(鈗神) 형제와 그 조카들이 이끄는 병치산의막의 의병들이 순천에 본진을 둔 소서행장(小西行長) 막하의 왜군을 맞아 중과부적의 일대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때에 달마산에서 출발하여 적과 싸우면서 북상 중이던 윤현(尹峴) 윤검(尹儉) 형제의 의병들이 적시에 대교들에 이르러 여기에 합류하였으나 분전 반나절에 끝내 이기지 못하고 모두 전사했다. 전후에 인근 촌민들이 급한대로 대교들 넓은 들역에 흩어져 죽은 1만여 구의 시신을 모아 6개의 합장묘를 만든 것이 지금에 전하는 만의총이다. 지금 옥천 대교 저쪽에 전하는 만의총은 경지정리로 3개를 잃은 후에 가까스로 화를 면한 만의총 중의 하나이다.
 
◈해남의 동학군 해남의 동학도들은 동학혁명 초기인 1984년 5월의 장성 월평 전투와 전주성 점령 당시부터 혁명군에 참가하고 있는데 『천도교총서』에 보면 9월 기포 후 해남에서 김도일(金道一), 김봉두(金奉斗)가 기포했다고 했으며, 『순무선봉진등록』 갑오 12월조에 보면 남리역(지금의 황산면 남리)에는 대접주 김신영(金信榮)이 있고 해남에는 비괴(匪魁) 백장안(白長安)이 있으며, 이도면(지금 산이면)에는 접주 김순오(金順五)가 있다고 했다. 『천도교창건사』에는 해남에서 김도일, 김의태, 김춘도, 주정호, 이갑흠, 마성팔, 김봉두 등 접주들이 기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994년 12월 17일(양력 1995년 1월 12일)은 전라도 동학군 통한의 날이었다. 자흥 고읍(관산)전투에서 패배한 동학군은 일본군과 경병 및 민병의 추격을 받아 강진, 대구, 칠량을 거쳐 해남으로 후퇴했다. 해남의 동학군도 무수히 체포되거나 전사했으며, 12월 25일(음력)에는 백장안이 체포되고 이보다 3일 앞서는 이도면 접주 김순오, 교장 박익현(朴益賢), 집강 이은좌(李銀佐), 별장 박사인(朴士仁), 교수 김하진(金夏振) 등 5명이 체포되었다.
 
◈한말 해남의 의병 대흥사 심적암전투는 일본의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으로 괴멸된 전남의병의 마지막 전투를 말하며, 이로써 가면을 벗은 일본은 1910년 8월에 우리 나라에 대한 강제 합병조치를 취하게 된다. 『비록 한말의병전투사』에 보면 영인본인 「전남폭도사(일본쪽 문헌)」가 실려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일본 수비대의 심적암 습격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동일(1909년 7월 8일) 밤, 해남수비대장 요시하라(吉原) 대위 이하 22명과 경찰관 3명, 헌병 4명이 토벌을 목적으로 대흥사로 향했다. 9일 오전 4시 이 절(深寂庵)을 공격했는데 적도는 깊이 잠들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전멸했다. 적 22명을 죽이고 8명을 잡았으며 화승총 47, 군도 5병을 노획했다’. 관련 기사에는 ‘9월 18일, 수괴 황두일(黃斗一)의 부하 21명, 19일, 4명이 해남수비대에 투항했다’고 나온다. 이에 따르면 황두일 부대의 총원은 전사자 22명, 포로된 자 8명, 투항자 23명으로 황두일을 포함하여 모두 54명이 되는데 관련 재판기록에는 황준성(黃俊聖), 추기엽(秋琪燁), 강성택(姜成宅), 김성택(金聖澤), 이병현(李炳鉉)이 더 보여 기록상 심적암안전투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59명이 된다. 황준성은 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탈출하여 강성택과 손을 잡고 고금, 여호, 청산 등 섬지역과 해남지역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 사람으로 7월 7일 대흥사에 들어와서 황두일과 연합하여 전투를 벌이다가 일단 후퇴하여 대오를 수습하던 중에 체포되었다.
 
◈3·1독립운동과 양한묵 양한묵(梁漢默)은 철종 13년(1862) 해남군 옥천면 영안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길중(吉仲), 호는 지강(芝江)으로 고종 31년(1894) 31세 때에 탁지부주사가 되어 능주의 세무관리가 되었으나 광무 1년(1897) 개화사상에 눈을 뜨면서 관직을 그만 두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자 곧 중국으로 건너가서 국제외교무대인 북경에서 견문을 넓히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세계의 대세를 살피는 한편 나라(奈良)에서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교하고 진보회를 조직하여 구국민중운동을 전개했다. 1905년 7월의 포츠머즈조약으로 미국, 영국, 러시아의 승인을 얻은 일본이 송병준, 이용구 등의 일진회를 내세워 보호조약의 필요성을 선전하니 국민의 맹렬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에 양한묵은 이준(李儁)을 도와 헌정연구회를 조직하고 또 공진회를 조직하여 일진회를 쳐부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일본은 끝내 1905년 10월 17일 강제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고 말았다. 그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까지 천도교를 통해서 항일전선을 형성하는데 총력을 경주하게 되거니와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1919년 5월 26일 새벽 향년 56세를 일기로 예심과정에서 옥중에서 순국하니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순절자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최부(崔溥, 1454∼1504) 금남(최부의 호)은 호남사림의 사종으로 불려지는 사람으로 24세에 진사시에, 29세에 알성시에 합격하여 관로에 나가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으며, 홍문관 부교리(34세) 때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윤정월에 부친의 부음을 듣고 귀향선을 탔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 끝에 중국 절강성에 닿아 이곳 저곳 옮겨다닌 6개월 후에 귀국하게 되는데 성종의 명에 따라 표류에서 귀국하기까지의 과정을 『금남 표해록』이라는 3권의 책으로 만들어 바치고 돌아와서 3년상을 치렀다. 이 책에는 중국의 해로·기후·조류 등 지리와 연로(沿路)의 풍토·산천·관아·민속·의식·제도 등 당시 명나라의 모든 것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는 중국 수차(水車)의 제작법과 이용법도 기술되어 있는데 이러한 연고로 금남을 우리 나라 실학사상의 선구자로 일컫기도 한다. 연산군 3년(1497)에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서 예빈사정(禮賓寺正)에 승진되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에는 단천에 유배되고,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 후 51세의 한창 나이에 참수당했다.
 
◈석천 임억령(林億齡, 1496∼1568) 석천은 해남읍 해리에서 태어났고, 광산의 대학자 눌제 박상에게 글을 배웠으며, 중종 11년 21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0세에 대과에 합격하여 옥당, 의정부 사인을 거쳐 44세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을사사화가 나자 동생 백령을 설득하려 했으나 듣지 않자 동생에게 시를 지어 남기고 낙향했다. 뒤에 백령이 공신녹권을 보냈으나 태워버렸다. 7년 뒤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담양부사를 역임했으나 62세 때 벼슬을 버리고 담양의 서하당과 식영정에서 노후를 보내며 고경명, 정철, 백광훈, 최경창, 임제, 양응현 등 제자들과 호남가단을 일으켜 성산동계 풍류의 시종(始宗)으로 일컬어진다. 1568년 해남 자택에서 별세했는데 근래 마산면 남계동 서당골에서 그의 별서유지가 발견되었다.
 
◈귤정(橘亭) 윤구(尹衢, 1495∼1542) 해남읍 해리에서 태어나 연동에서 자랐다. 19세에 사마시 22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승정원 주서, 예조좌랑,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는데 최산두·유성춘과 더불어 호남 3걸이라 불렸다. 그는 청백한 관리였다. 승정원 주서로 있을 때 임금에게서 안당, 김전, 이계명 중에서 정승을 추천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정승들(영의정 정광필, 우의정 신용개)의 자문을 구하고 돌아오는 박세희가 안당을 추천하자 그도 따랐다. 그 뒤 기묘사화 때 지난날 추천을 잘못했다 하여 문책을 당하고, 조광조의 당이라 하여 삭직을 당하여 해남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박세의에게 책임을 넘기지 않고 자담하여 선비의 품도를 지켰으며, 뒤에 복관 되었지만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금남·석천과 종유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해촌사에 배향되었다.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1537∼1582) 장흥군 안량면 기사리에서 출생. 5세에 해남 옥천 대산리 옥산서당에서 정응서의 제자로 글공부를 시작, 6세에 시를 지었고, 글씨에 특출했다. 13세에 한양으로 유학하여 노수신, 박순 등에게 사사했다. 27세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미시에 응시 급제했으나 문과 응시는 하지 않고 당시의 혼탁한 사회상을 비판하며 고향에 돌아와 재야 학자로, 시인으로 남았다. 선조 5년(1572) 그의 나이 36세 때 명나라 사신이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이들의 접반을 맡은 노수신이 그들과 응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백광훈을 추천했는데 사신들은 물론 조정에서도 그의 글씨와 시문의 탁월함에 놀라게 되었다. 광훈은 당시 박순의 문하에서 자웅을 겨루던 최경창, 이달과 함께 성당(盛唐)의 시풍에 들었다 하여 삼당시인으로 일컬어졌으며, 최경창·양사언·송익필·이신해·이순인·윤탁연·하응림 등과 더불어 4절 8문장으로 손꼽혔다. 또 글씨도 명필로 알려졌는데 특히 영화체는 독보적 경지에 이르러 해동필가의 한사람이 되었다. 46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590년에 강진 서봉서원에 이후백, 최경창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옥천면 송산리에 있는 옥봉사당에서는 매년 봄·가을에 추모제를 올린다.
 
◈정운(鄭運, 1543∼1592) 자는 창진(昌辰)이며, 본관은 하동이다. 중종 38년(1543)에 해남 옥천면에서 훈련원 참군 응정(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0년에 무과에 급제, 북방의 오랑캐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웅천현감, 삭녕군수를 지내고 임진년에 녹도만호로 있다가 경상도 수군이 원병을 청하는데 이순신이 주저하자 나라를 구하고 왜적을 무찌르는데 경상도 전라도가 어디 있느냐고 강력히 주장하여 이순신으로 하여금 즉각 출병의 결심을 하게 했으며 임진왜란 제해전의 대첩을 이끌어내는데 언제나 앞장서 싸우다가 동래 몰운대해전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전몰하니 50세였다. 선무원종 1등훈에 오르고 증병조판서에 충장(忠壯)이라 시호했다. 임금이 녹도에 사우를 세우도록 명하니 지금에 전한다. 효종 임진(1652)에 본군 경호에 사우를 세웠는데 숙종이 충절사라 사액했다. 지금은 옥천 대산리에 옮겨 모시고 있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 해남읍 해리에서 태어났다. 16세에 부친이 별세하자 김안국 최산두에게 사사했다. 김안국은 그가 너무 영리하고 도리에 밝아 제자로만 대하지 않고 동등하게 토론했다 한다. 중종 32년 24세에 사마시에 합격 이듬해 별시에 병과로 등과, 춘추관 기서관을 거쳐 세자 시강원 설서를 지냈다. 그는 소탈하고 학문과 정론 토론에 열심이었다. 동궁의 호학 습관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선조의 학문성취에도 영향을 주었다. 어머니 봉양을 위해 무장현감을 맡았다가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 일파가 을사사화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미암은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양재벽서 사건이 나자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19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호남의 도학정신 신장에 앞장섰고 국가 변란 때는 충절에 몸바쳤으며, 또 기록문학의 대가이기도 했는데 『미암일기』는 선조 즉위년부터 선조 10년 그가 죽기 이틀 전까지의 개인기록이지만 당시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임진왜란으로 선조 25년 이전의 승정일기(承政日記)가 모두 불타버린 상황에서 선조실록을 만들 때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經延日記)와 함께 참고가 되었다 한다. 그 외에도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 『역대요록 2편』, 『득몽구』 등 저술이 남아 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 〈행적〉 선조 20년(1587)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현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유심과 어머니 순흥 안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고산 또는 해옹(海翁), 자는 약이(約而)인데 해남종가에 아들이 없어서 8세 때 종가에 입양하여 해남 윤씨의 대종을 이었다. 강직하고 곧은 성질에 남인의 한 사람이었던 고산의 일생은 정치적으로 늘 불행하여 생애의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고산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은 광해군 치하의 26세 때였다. 이때 고산은 광해군에게 간신들을 탄핵하는 병진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에서 생애 최초의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다음해에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되어 6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성공함으로써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고산은 이를 사양하고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서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후 42세에 별시 초시에 장원급제하고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맡고 7년간 중앙정계에 머물면서 정치적 경륜을 쌓았다. 그러나 48세 때 성산현감으로 좌천되자 이듬해 현감직을 내놓고 다시 해남으로 돌아왔다. 인조 14년(1636) 고산의 나이 50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고산은 향리 자제와 가동 수백을 이끌고 배를 저어 강화에 이르렀는데 그 때는 이미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화의를 맺은 뒤였다. 고산은 배를 돌려 제주도를 향해서 떠났다. 세상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보길도(甫吉島)에 이르러 그 아름다운 경관에 반하여 이곳을 기세(棄世)의 땅으로 정하고 머물게 되니 이곳이 바로 이른바 「어부사시사」의 생향(生鄕)이다. 그러나 고산의 시련은 이로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74세 때에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산능문제와 조대비의 복제문제로 서인과 대립하게 되어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었다. 다시 광양으로 이배되어 7년 4개월이라는 긴 유배생활 끝에 81세에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으며, 1671년 6월 11일 보길도 낙서제에서 향년 85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유택은 생전의 유언에 따라 현산면 금쇄동에 마련되었다.
〈문학〉 고산의 생애는 정치적으로 불운하였지만 문학적으로는 국문학의 비조라 이를 만큼 매우 뜻깊은 생애였다고 말할 수 있다. 고산의 문학적 현장은 해남의 현산면과 완도의 보길도였다. 현산은 첩첩 산중으로 육로를 거쳐 찾아야할 산수자연이요, 보길도는 배를 타고 찾아야할 해중자연이라는 서로 대조되는 삶의 공간이었다. 해남에서 문학생활의 주무대는 현산면 만안리에 있는 근쇄동과 문소동, 수정동이었다. 여기서 10년을 머물면서 「산중신곡」, 「금쇄동기」 등을 생산했고 보길도 부용동에서는 일곱 차례에 걸쳐 12년간을 살았다. 고산은 금쇄동에서 「오우가(五友歌)」를 지었다. 금쇄동은 현산면 만안리에 위치한다. 고산이 53세에 경상도 영덕 귀양에서 풀리어 돌아온 뒤에 「금쇄동기」, 「산중신곡」 등의 명작을 낳았는데 금쇄동과 문소동, 그리고 수정동은 그 주무대가 된다. 고산의 시가로 현전하는 것이 대략 75수라고 한다. 어려운 것을 걸러낸 쉬움과 복잡한 것을 씻어낸 간소함, 이것이 바로 고산문학의 남다른 특성이라고 한다. 현재 해남읍 연동에는 고산이 살았던 녹우당과 그의 유물이 전시된 유물관이 있다.
 
 
 
윤선도가 기거하던 녹우당의 사랑채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 공재 윤두서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 3재의 한 사람으로 예리한 눈으로 사물을 관찰하여 전통적인 회화세계를 바탕으로 자신의 화풍을 이루어낸 선비화가였다. 현종 9년(1668)에 해남 연동리에서 윤이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윤선도의 종손 윤이석에게 입양.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 또는 종애(鍾涯)라 했다. 어릴 때부터 문예에 뛰어났으며, 특히 필법에 고명했다. 25세인 숙종 15년(1689)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남인인 처지를 경계하여 스스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친구들과 교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특히 성호 이익의 둘째 형 이서, 그리고 심경득과 절친했는데 그들과의 교류는 그의 학문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조선 후기 실학을 대성한 성호집안과 공재와의 교우는 후기 실학의 대표적 학자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 공재는 제가의 서적을 연구하되 다만 문자만 강구하여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것을 학문의 자료로 삼지 않았다. 반드시 정확하게 조사 연구하여 옛사람의 말의 뜻을 파악하여 스스로 체득하고 사실에 비추어 실제로 경험하였다. 공재는 서화에도 모두 능했다. 그는 중국의 명가와 우리나라의 제가의 서법을 배워 그 장단점을 연구하여 옛법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일가의 서체를 완성했다. 특히 그림에 있어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회정치 상황의 변화에 따라 실사구시의 새로운 조짐이 싹트기 시작하여 진경산수화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정서를 반영하는 풍속화가 그려지기 시작한 시기에 활동했으므로 그는 사람이나 동물을 그릴 때 종일 관찰한 뒤에야 비로소 그렸다. 그래서 외형묘사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표현하기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공재 윤두서 자화상
◈해금(海錦) 오달운(吳達運, 1700∼1747) 해남군 청계면 흑석산 밑 용지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떤 일이나 그 근원을 파는 성격이 있었다. 30세 무렵 나주로 이거해서 서당을 열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당시 그에게서 수학했던 이행유는 해금이 나주에 끼친 교화 성취의 공이 크다고 말했다. 40세에 부친 봉양을 위해 과거에 응시하여 1년 5장원으로 주위를 놀라게하여 많은 유혹과 권유를 물리치고 하관말직으로 1년 가까이 재직 중 47세의 나이에 돌연 사몰했다. 저서에는 17세기 초의 국가 제도와 여러 가지 폐단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지적한 『왕패략(王覇略)』 10여책, 호남지방의 갖가지 행정·군사·휼민 등에 대한 시정책을 적은 『호남책(湖南策)』 8책,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이 배워야할 도리와 방법을 밝힌 『종학도설(從學圖說)』과 동양철학의 진수를 독창적으로 확충정립한 『이기론(理氣論)』 등이 있다.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 속성이 장씨이며 법명은 의순, 전남 무안 삼향 출생이다. 어려서 냇가에서 목욕을 하다 스님에게 구출을 받고 15세에 남평 운흥사 벽봉스님에 의해 스님이 되고 대흥사(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완호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고 초의라는 당호를 받았는데 공부에 정진하여 불경과 율·론에 통달했다. 20대 중반에 대흥사에 있으며 강진에 귀양와있는 25세 연상의 다산과 교유하며 유학과 시문을 논하고 또 배웠다. 30세에 한성(서울)에서 추사를 만나 교유하고 홍석주와 다산의 자제들과 사귀면서 시서를 나누었다. 또한 낭암스님에게 불화를 배워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소치를 길러 남종화의 맥을 세웠다. 대흥사 주지로 대둔사지 집필과 여러 일들을 하고 일지암을 지어 놓고 차를 재배하여 음다하며 동다송과 다신전을 펴냈다. 이와같이 초의는 시서화 3절에 다(茶)의 중흥조로 불리며, 유학자 특히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근대 개화사상을 섭렵했다. 한편 불학에도 두각을 나타내 백파선사의 선문수경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변만어」를 지어 백파의 선론을 비판했다. 초의는 추사와 동갑으로 막역한 사이였으며 그의 귀양지인 제주에 찾아가기도 했고 추사도 귀양이 풀리자 귀경하는 길에 초의를 찾았을 정도였다. 초의로부터 사미계를 받은 이가 400명, 보살계를 받은 이가 70명이다. 초의는 불교문화의 파수꾼이며, 불교 근대화의 초석을 놓았으며 다문화의 중흥조요 시와 글·그림에 한 경지를 이룬 예술가였다.
 
 
 
초의선사 유적지
◈ 최부(崔傅, 본관:나주, 아호:금남, 생존시대:1454 ∼ 1504, 출생지:나주 동강면 성지촌, 유적지:해촌사(海村祠, 또는 六賢祠)) [상세보기]
◈ 임억령(林億齡, 본관:선산, 아호:석천(石川), 생존시대:1496 ∼ 1568, 출생지:해남읍 해리, 유적지:석천사(石川祠, 후에 해촌사로 개칭)) [상세보기]
◈ 유희춘(柳希春, 본관:선산, 아호:미암(眉巖), 생존시대:1513 ∼ 1577, 출생지:해남읍 해리, 유적지:해남 해촌사, 담양 모현관) [상세보기]
◈ 윤구(尹衢, 본관:해남, 아호:귤정(橘亭), 생존시대:1495 ∼ 1542, 출생지:해남읍 해리, 유적지:해촌사) [상세보기]
◈ 백광훈(白光勳, 본관:수원, 아호:옥봉(玉峯), 생존시대:1537 ∼ 1582, 출생지:장흥군 안량면 기산리, 유적지:옥봉사당, 옥봉유물관) [상세보기]
◈ 정운(鄭運, 본관:하동, 생존시대:1548 ∼ 1598, 출생지: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유적지:충절사) [상세보기]
◈ 백진남(白振南, 본관:수원, 아호:송호(松湖), 생존시대:1564 ∼ 1618, 출생지:해남군 옥천면 대산, 유적지:송호정) [상세보기]
◈ 오달운(吳達運, 본관:동복, 아호:해금(海錦), 생존시대:1700 ∼ 1747, 출생지:해남군 청계면 용지리, 유적지:용지사) [상세보기]
◈ 윤선도(尹善道, 본관:해남, 아호:고산(孤山), 생존시대:1587 ∼ 1671, 출생지:서울, 유적지:녹우당, 유물관) [상세보기]
◈ 윤두서(尹斗緖, 본관:해남, 아호:공재(恭齋), 생존시대:1668 ∼ 1715, 유적지:공제 윤두서의 생가) [상세보기]
◈ 윤덕희(尹德熙, 본관:해남, 아호:낙서(駱西), 생존시대:1685 ∼ 1756, 출생지:해남) [상세보기]
◈ 윤용(尹溶, 본관:해남, 아호:청고(靑皐), 생존시대:1708 ∼ 1771) [상세보기]
◈ 이유길(생존시대:1576 ∼ 1619, 출생지:서울) [상세보기]
◈ 초의선사(草衣禪師, 생존시대:1786 ∼ 1866, 출생지:무안군 삼향면, 유적지:대흥사 일지암) [상세보기]
◈ 이진원(李振源, 본관:원주, 생존시대:1845 ∼ 1915, 출생지:마산 맹진, 유적지:맹진리 생가) [상세보기]
◈ 박백응(朴伯凝, 본관:무안, 아호:취죽헌, 생존시대:1525 ∼ 1587, 출생지:해남읍 해리, 유적지:해촌사, 부춘정사) [상세보기]
내 고장의 문화유산
■ 국보
◈윤두서 자화상 제240호, 해남읍 연동리 82
 
■ 보물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제48호, 삼산면 구림리 799
 
◈탑산사 동종 제88호, 삼산면 구림리 799
 
◈대흥사 북미륵암 3층석탑 제301호, 삼산면 구림리 799
 
◈대흥사 응진전앞 3층석탑 제320호, 삼산면 구림리 799
 
◈해남윤씨가전고화첩 제481호, 해남읍 연동리 82
 
◈윤고산수적 및 관련문서 제482호, 해남읍 연동리 82
 
◈지정십사년노비문서 제483호, 해남읍 연동리 82
 
◈명량대첩비 제503호, 문내면 동외리 1186-7
 
◈미황사 응진당 제1183호, 송지면 서정리 산247
 
■ 사적
◈해남윤씨 녹우당 제167호, 해남읍 연동리 82
 
◈진산리 청자요지 제310호, 산이면 진산리130일원
 
■ 사적 및 명승
◈대둔산 일원 제9호, 삼산면 구림리 산8-1일원
 
■ 천연기념물
◈대둔산 왕벚나무 자생지 제173호, 삼산면 구림리 산24-4
 
◈연동리 비자나무 숲 제173호, 해남읍 연동리 산27-1
 
◈우항리 공룡화석지 및 퇴적층군 제394호, 황산면 우항리 일원
 
■ 중요무형문화재
◈강강술래 제8호, 문내면 동외리 919
 
■ 중요민속자료
◈윤탁 가옥 제153호, 현산면 초호리 276
 
◈윤두서 고택 제232호, 현산면 백포리 372
 
■ 유형문화재(이하 도지정)
◈대흥사 천불전 제48호, 삼산면 구림리 799
 
◈대흥사 천불상 제52호, 삼산면 구림리 799
 
◈대흥사 서산대사부도 제57호, 삼산면 구림리 799
 
◈은적사 철조비로사나불 제86호, 마산면 장촌리 산44-3
 
◈대흥사 용화당 제93호, 삼산면 구림리 799
 
◈대흥사 대광명전 제94호, 삼산면 구림리799
 
◈대흥사 서산대사유물 제166호, 삼산면 구림리 799
 
◈대흥사 정조친필 서산대사화상당명 제167호, 삼산면 구림리 799
 
◈대흥사 관음보살도 제179호, 삼산면 구림리 799
 
◈옥산서실 소장품일괄 제181호, 옥천면 송산리 129
 
■ 무형문화재
◈우수영부녀농요 제20호, 문내면 동외리 1102
 
◈진양주 제25호, 계곡면 덕정리 439
 
◈탱화장 제31호, 삼산면 구림리 799
 
■ 기념물
◈표충사 제19호, 삼산면 구림리 산16
 
◈정운 충신각 제76호, 옥천면 대산리 산54
 
◈방산리 장고봉고분 제85호, 북일면 방산리 산1008-1
 
◈월송리 조산고분 제86호, 현산면 월송리 378-1
 
◈수성송 제94호, 해남읍 성내리 4
 
◈신월리 방대형고분 제102호, 북일면 신월리 29 5-1
 
◈방축리 지석묘군 제115호, 화산면 방축리 702
 
◈이진성지 제120호, 북평면 이진리 1227외
 
◈용두리 고분 제121호, 삼산면 창리 578
 
◈군곡리 패총 제129호, 송지면 군곡리 940
 
◈맹진리 암각매향비 제137호, 마산면 맹진리 산96일원
 
◈전라우수영성지 제139호, 문내면 선두리 1661일원
송호리 해송림 제142호, 송지면 송호리 산9
 
◈연정리 지석묘군 제65호, 화산면 연정리 73-1일원
 
■ 민속자료
◈정명식가옥 제77호, 황산면 우항리 291
 
◈영산사 소장문서 일괄 제159호, 마산면 화내리 산81
 
■ 문화재자료
◈해남향교 대성전 제77호, 해남읍 수성리 105
 
◈서동사 대웅전 제174호, 화원면 금평리 571
 
◈민정기가옥 제186호, 해남읍 백야리 537
 
 
◈ 공재 자화상(恭齋 自畵像) [상세보기]
◈ 해남윤씨 가전 고화첩(海南尹氏 家傳 古畵帖) [상세보기]
◈ 윤고산 수적 및 관계문서(尹孤山 手蹟 關係文書) [상세보기]
◈ 지정 14년 노비문서(至正 14年 奴婢文書) [상세보기]
◈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大興寺 北彌勒庵 磨崖如來坐像) [상세보기]
◈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大興寺 北彌勒庵 三層石塔) [상세보기]
◈ 대흥사 응진전 앞 삼층석탑(大興寺 應眞殿 앞 三層石塔) [상세보기]
◈ 미황사 대웅전(美黃寺 大雄殿) [상세보기]
◈ 미황사 응진당(美黃寺 應眞堂) [상세보기]
◈ 탑산사 동종(塔山寺 銅鍾) [상세보기]
◈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상세보기]
◈ 해남윤씨 녹우당(海南尹氏 綠雨堂) [상세보기]
◈ 해남 진산리 청자요지(海南 珍山里 靑磁窯址) [상세보기]
◈ 해남 대둔산 일원(海南 大屯山 一圓) [상세보기]
◈ 대둔산 왕벗나무 자생지(大屯山 왕벗나무 自生地) [상세보기]
◈ 해남 연동리 비자나무 숲(海南 蓮洞里 榧子나무 숲) [상세보기]
◈ 우항리 고생물 화석지 및 퇴적층군 [상세보기]
◈ 강강술래 [상세보기]
◈ 해남 윤탁 가옥(海南 尹鐸 家屋) [상세보기]
◈ 해남 윤두서 고택(海南 尹斗緖 古宅) [상세보기]
◈ 대흥사 천불전(大興寺 千佛殿) [상세보기]
◈ 대흥사 천불상(大興寺 千佛像) [상세보기]
◈ 대흥사 서산대사부도(大興寺 西山大師浮屠) [상세보기]
◈ 은적사 철조비로사나불좌상(隱蹟寺 鐵造毘盧舍那佛坐像) [상세보기]
◈ 대흥사 용화당(大興寺 龍華堂) [상세보기]
◈ 대흥사 대광명전(大興寺 大光明殿) [상세보기]
◈ 대흥사 정조친필 서산대사화상당명(大興寺 正祖親筆 西山大師畵像堂銘) [상세보기]
◈ 대흥사 서산대사 유물(大興寺 西山大師 遺物) [상세보기]
◈ 대흥사 관음보살도(大興寺 觀音菩薩圖) [상세보기]
◈ 옥산서실 소장품 일괄(玉山書室 所藏品 一括) [상세보기]
◈ 우수영 부녀농요(右水營 婦女農謠) [상세보기]
◈ 해남 진양주(海南 眞釀酒) [상세보기]
◈ 탱화장(幀畵匠) [상세보기]
◈ 표충사(表忠祠) [상세보기]
◈ 정운 충신각(鄭運 忠臣閣) [상세보기]
◈ 해남 방산리 장고봉고분(海南 方山里 長鼓峰古墳) [상세보기]
◈ 해남 월송리 조산고분(海南 月松里 造山古墳) [상세보기]
◈ 해남 수성송(海南 守城松) [상세보기]
◈ 해남 신월리 방대형고분(海南 新月里 方臺形古墳) [상세보기]
◈ 해남 방축리 지석묘군(海南 方丑里 支石墓群) [상세보기]
◈ 이진성지(梨津城址) [상세보기]
◈ 해남 용두리고분(海南 龍頭里古墳) [상세보기]
◈ 해남 군곡리 패총(海南 郡谷里 貝塚) [상세보기]
◈ 해남 맹진리 암각매향비(海南 孟津里 巖刻埋香碑) [상세보기]
◈ 전라우수영 성지(全羅右水營 城址) [상세보기]
◈ 해남 송호리 해송림(海南 松湖里 海松林) [상세보기]
◈ 해남 연정리 지석묘군(海南 蓮井里 支石墓群) [상세보기]
◈ 해남 정명식 가옥(海南 鄭明植 家屋) [상세보기]
◈ 해남향교 대성전(海南鄕校 大成殿) [상세보기]
◈ 대흥사(大興寺) [상세보기]
◈ 영산사 소장문서 일괄(英山祠 所藏文書 一括) [상세보기]
◈ 서동사 대웅전(瑞洞寺 大雄殿) [상세보기]
◈ 해남 민정기 가옥(海南 閔正基 家屋) [상세보기]
 
 
 
 
3. 생활문화자원
 
전통생활민속
◈우수영 강강술래 구 마한권 또는 백제권이 공유하는 부녀 중심의 민속놀이로 주로 추석날 밝은 달 아래서 원무하되 사이사이에 연희로 숨을 돌린다. 일제의 조선 민속문화 말살정책에 따라 대체로 그 모습을 감추게 되던 중 명량대첩의 현장인 해남 우수영에서 이순신장군 연기설과 함께 줄기차게 살아남아 오늘에 전한다.(재현자 지춘상 : 대통령상 수상)
 
◈우수영 부녀농요 우수영 부녀들 사이에 전하는 부녀농요로 동당애타령이라 하는데 4계절의 농사거리와 함께 농사거리 따라 각각의 연희와 사설이 어우러져 흥을 돋군다.(재현자 김정업 : 국무총리상 수상)
 
◈산정서산대사진법군고 서산대사에 연기하는 궁구놀이로 일반농악과 달리 군령에 따라 각 항의 연희가 연출되고 쇄가락이 신체와 달라 흘려치지 않고 마디 마디가 분명하여 격동적인 것이 특이하다. 산정출신 유공준(작고)에 의해서 구체 12가락이, 박경규(현존)에 의해서 군령이, 전승되었다.(재현자 황도훈 : 남도문화제 농악부문 우수상, 지도자상 수상)
 
◈ 세시풍속(歲時風俗, 분류:민간신앙/무속) [상세보기]
◈ 평동마을 도제(坪洞마을 都祭, 분류:민간신앙/공동체신앙, 행사시기:정월 초하룻날, 전승장소:해남읍 평동마을, 개최빈도:년 1회) [상세보기]
◈ 용정마을 산제(龍井마을 山祭, 분류:민간신앙/공동체신앙, 행사시기:정월 초하루, 전승장소:해남읍 용정마을, 개최빈도:년 1회) [상세보기]
◈ 당개마을 짐대제(분류:민간신앙/공동체신앙, 행사시기:음력 2월 초하루, 전승장소:황산면 당개마을, 개최빈도:년 1회) [상세보기]
◈ 외암마을 당제(外岩마을 堂祭, 분류:민간신앙/공동체신앙, 행사시기:정월 초하루, 전승장소:문내면 외암마을, 개최빈도:년 1회) [상세보기]
◈ 감당마을 목신제(甘棠마을 木神祭, 분류:민간신앙/공동체신앙, 행사시기:정월 초하룻날∼초열흘 사이, 전승장소:삼산면 감당마을, 개최빈도:년 1회) [상세보기]
◈ 상공마을 기우제(분류:민간신앙/공동체신앙, 행사시기:음력 대보름, 하지가 지나도록 비가 오지 않을 때, 전승장소:산이면 상공마을) [상세보기]
◈ 어란마을 풍어제(분류:민간신앙/공동체신앙, 행사시기:정월 초하루, 전승장소:송지면 어란마을, 개최빈도:년 1회) [상세보기]
◈ 소죽마을 중구제(소죽마을 中九祭, 분류:민간신앙/공동체신앙, 행사시기:음력 9월 9일, 전승장소:송지면 소죽마을, 개최빈도:년 1회) [상세보기]
◈ 수성1구 산신제(수성1구 山神祭, 분류:민간신앙/공동체신앙, 행사시기:정월 보름, 전승장소:해남읍 수성1구, 개최빈도:매년 1회) [상세보기]
◈ 징의마을 거릿제(澄衣마을 거릿제, 분류:민간신앙/공동체신앙, 행사시기:음력 2월 1일, 전승장소:황산면 징의마을, 개최빈도:년 1회) [상세보기]
◈ 서상마을 산신제(西上마을 山神祭, 분류:민간신앙/공동체신앙, 행사시기:정월 초하루, 전승장소:문내면 서상마을, 개최빈도:년 1회) [상세보기]
◈ 금부마을 도제(금부마을 都祭, 분류:민간신앙/공동체신앙, 행사시기:정월 보름, 전승장소:북평면 금부마을, 개최빈도:년 1회) [상세보기]
◈ 신풍마을 거릿제(분류:민간신앙/공동체신앙, 행사시기:정월 보름, 전승장소:화산면 신풍마을, 개최빈도:년 1회) [상세보기]
◈ 동현마을 당산제(동현마을 堂山祭, 분류:민간신앙/공동체신앙, 행사시기:정월 초이튿날, 전승장소:송지면 동현마을, 개최빈도:년 1회) [상세보기]
구전설화
◈대흥사 천불상에 얽힌 전설 6년에 걸쳐 경주옥석으로 완성한 천불을 싣고 울산을 출발한 배 한척이 풍랑을 만나 일본 나가사키 현에 표류했는데, 일본사람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조선국 대흥사로 모셔라 하여 대흥사에 돌려왔다고 전해진다.
 
◈천상의 공주가 조각한 북암석불 죄를 짓고 두륜산에 내려온 천제의 남매가 죄닦음으로 누나는 북암에서 양각으로, 남동생은 혈망봉 및 남암에서 음각으로 부처를 조각하는데 만일암에 해를 잡아 매두고 일을 했다 전한다.
 
◈열녀 임씨를 도운 호랑이 현산면 두모포에 정려가 있는 열녀 임씨에 얽힌 전설이다. 진도 원포에서 해남 현산면 두모포로 시집온 임씨가 일찍 미망인이 되었다. 친정에서 아버지 병이 위급하다는 거짓말로 불러들여 개가시키려하자 도망쳐 나오는데 바다에 이르렀으나 배가 없었다. 그러자 큰 호랑이가 임씨를 업고 바다를 건넜다. 뒷날 함정에 빠진 호랑이가 임씨에게 현몽하여 그곳에 가보니 사람들이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때려잡으려 하고 있었다. 임씨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모든 사람이 열녀 임씨를 구해준 호랑이에 감사하며 정성으로 호랑이를 구해내서 살려보냈다.
 
◈백년묵은 여우와 지관 이야기 인조시대 사람 이의신은 명나라 주부벼슬을 한 사람이다. 마산면 맹진리 출신인데 그의 세보에 보면 짧게 ‘공은 지리에 정통하여 명나라 주부가 되었으며 지리로써 후세의 사범이 되었다’라고 했다. 어려서 서당에 다니는데 둠벙 샘거리를 지나다가 아름다운 처녀를 만나 처녀의 입에 품은 구슬을 입으로 주고받으며 사랑에 빠졌다. 서당 훈장이 이 일을 알고 백년여우가 확실하니 구슬을 머금고 도망쳐 자기에게 오라고 했다. 의신이 그 구슬을 머금고 도망치다가 땅을 보고 넘어졌다. 서당 훈장이 그것을 보고 “하늘을 보고 넘어졌으면 천기를 아울러 보았을 것을... 안타까운 일이다 ”라고 했다.
 
◈ 대흥사 천불상에 얽힌 전설(분류:구비문학/설화) [상세보기]
◈ 천상의 공주가 조각한 북암석불(분류:구비문학/설화) [상세보기]
◈ 열녀 임씨를 도운 호랑이(분류:구비문학/설화) [상세보기]
주민의 종교생활
◈도제(島祭) 해남읍 평동마을, 황산면 연당마을, 현산면 분토마을, 현산면 고담마을, 북평면 금부마을, 북평면 영전마을, 옥천면 호산마을, 송지면 산정마을, 송지면 금강마을, 송지면 미야마을
 
◈동제 해남읍 송용마을, 화산면 대지마을
 
◈당제 해남읍 부호마을, 문내면 증도마을, 문내면 외암마을, 문내면 궁항마을, 화원면 마천마을, 화원면 부동마을, 화원면 척북마을, 화원면 억수마을, 화원면 구림마을, 산이면 구성마을, 계곡면 성진마을, 화산면 연정마을, 화산면 관동마을, 송지면 마봉마을, 송지면 동현마을, 송지면 원서정마을
 
◈목신제 삼산면 감당마을
 
◈짐대제 황산면 당개마을
 
◈거릿제 황산면 증의마을, 화산면 신풍마을
 
◈산신제 해남읍 용정마을, 문내면 용암마을, 문내면 서상마을, 현산면 신방마을, 화산면 하마마을, 화산면 해창마을
 
◈기우제 산이면 상공마을
 
◈풍어제 송지면 어란마을
 
◈중구제 송지면 소죽마을
 
■ 종교단체 현황
◈개신교 196개소
 
◈천주교 8개소
 
◈불교 33개소
 
◈원불교 1개소
 
주민의 생활권역
◈해남 매일시장 상권 해남읍 8리를 중심으로 해남읍, 삼산면, 화산면, 옥천면, 마산면이 여기서 일상생활용품을 조달한다.
 
◈해남장 5일장 상권 시장날 1, 6일 해남군내 모든 생산자가 생산품을 돈으로 바꾸고 또 사간다. 권역 밖의 이동상인들도 와서 흥황을 이룬다.
 
◈기타시장 화산 방축리(시장날 5·10), 현산 일평리(3·10), 현산 시등리(4·9), 송지 산정리(2·7), 북평 남창리(2·7), 북일 흥촌리(3·8), 황산 남리(3·8), 문내 동외리(4·9), 화원 청룡리(5·10).
 
지역의 별미음식
◈천일식당 떡갈비, 해남읍 읍내리 ☎ (061)535-1001
 
◈국일관 한정식, 해남읍 읍내리 ☎ (061)535-1133
 
◈장수통닭 토종닭요리, 삼산면 돌고개 ☎ (061) 536-8764
 
◈토담 낙지비빔밥, 삼계탕, 해남읍 읍내리 ☎ (061) 536-2996
 
◈전주식당 산채정식, 삼산면 대둔사 시설지구 내 ☎ (061)532-7696
 
◈호남식당 표고전골, 삼산면 대둔사 시설지구 내 ☎ (061)534-5500
 
지역의 토산품과 특산품
◈옥석공예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가내 수공업으로 향로 등 30여 종의 생활필수품을 생산하고 있다. 황산면 옥동리 8-35번지 ☎ (061)534-9060
 
◈철기 불밑 통과 찍어만들기 수법으로 구리, 스테인리스, 흑철을 재료로 건축용 전통 장식구를 만들고 있다. 해남읍 조막리 57번지 유석종(62세).
 
◈도자기 산이면 녹청자를 재현 공급하고 있다. 황산면 연호리 정기봉. ☎ (061)532-3594
 
◈초경 진병춘(71세). 미투리와 짚신을 만든다. 산이면 덕송리 402번지
 
◈해남 월동배추 우리 나라 유일의 생산지이다. 문내면 석교리 1528-7 해남녹색유통.
 
◈전통가공식품 정부지정 전통식품 개발시범업체이다. 옥천면 신계리 79번지 ☎ (061)536-1790
 
◈궁중술 진양주 기능보유자 최옥림 계곡면 덕정리 439 ☎ (061)532-5745
 
 
 
 
 
 
4. 예술문화자원
 
지역문화예술행사
◈강강술래향토축제 [상세정보] 추석전후 2일간, 주최 해남문화원, 장소 : 해남 서림공원
 
◈고산문화제 [상세정보] 한글날 전후 2일간, 주최 해남문화원, 장소 : 해남군민회관
 
◈초의문화제 [상세정보] 10월 말경, 주최 초의문화제추진위원회, 장소 : 대둔사, ☎ (061)535-0986
 
◈땅끝해맞이축제 [상세정보] 1월 1일, 주최 현지주민들, 땅끝마을 일원 ☎ (061)533-9524
 
◈흑석산철쭉제 [상세정보] 5월경, 주최 계곡면 청년회, 장소 : 계곡면 흑선산 일원
 
지역문화예술단체
◈해남문화원 전남 해남군 해남읍 성내리 4번지 ☎ (061)533-5345
 
◈예총 해남지부 전남 해남군 해남읍 고도리 읍사무소 2층 ☎ (061)536-5200
 
지역언론기관
◈해남신문 해남군을 대표하는 주간지로 창간 10주년을 맞고 있다. ☎ (061)534-9171
 
◈해진신문 해남진도를 대표하는 신문, 창간 4주년을 맞고 있다. ☎ (061)534-0234
 
지역문화예술 시상제도
◈고산문학상 고산문화제와 연계하여 10회에 걸쳐 시행했는데 목하 고산문학상 위상정립 준비위원회가 전국단위의 고산문학상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다. 그 동안에는 재지 시인 정용체가 주관해 왔다.
 
지역출신 예술인
◈박성룡 시인. 서울거주
 
◈윤금초 시인. 서울거주
 
◈정철호 국악인. 광주거주
 
◈박방금 국악인. 해남, 서울 거주
 
◈이난초 국악인. 남원거주
 
지역소재 예술작품
◈영화 「서편제」 대흥사 일원
 
◈드라마 「허준」 해남 땅끝 일원
 
 
 
 
 
 
5. 관광, 여가문화자원
 
관광자원
◈달마산 두륜산의 맥을 이어 산세가 매우 수려하다. 해발 489m이며 남도의 소금강이라 불린다. 국내 최대의 부도전과 미황사가 있다.
 
 
 
달마산 미황사 대웅전
◈땅끝 한반도 최남단 송지면 갈두마을에 위치한다. 땅끝탑과 땅끝비가 있다.
 
◈명량대첩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일본과 싸워 승리를 거둔 곳으로 충무공과 지역 의병들의 충혼을 기리는 명량대첩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대둔사 통일신라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로 두륜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오면서 그 문도로 13대종사와 13대강사가 배출되었다. 부도전,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 서산대사유물관, 일지암, 천불전 등이 있다.
 
◈공룡화석지 우항리 공룡화석지는 지금으로부터 약 8천만∼9천만년 전의 중생대 백악기 후기에 해당하는 공룡유적지로 다양한 공룡들이 서식했음을 보여주는 공룡발자국 화석과 가장 오래된 새 발자국 화석이 잘 보존되어 있어 자연사 박물관과 공룡테마공원 등의 개발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공룡발자국
관광시설
◈해남 관광호텔 객실 41개, 스카이라운지, 일식, 한식, 대·소연회장, 남녀사우나, 미용실, 커피숍, 오락실, 룸싸롱. 해남읍 읍내리 ☎ (061)533-9002
 
◈금호장 객실 28개. 해남읍 터미널 입구 ☎ (061) 534-6700
 
◈보은장 객실 30개. 해남읍 터미널 입구 ☎ (061) 533-5500
 
◈전원장 객실 34개. 해남읍 고도리 ☎ (061)534-2700
 
◈유스호스텔 객 실 19개.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 시설지구 내 ☎ (061)533-0170
 
◈대흥각 객실 30개.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 시설지구내 ☎ (061)535-1551
 
◈영빈장 객실 27개. 자체식당을 겸영하고 있다.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 시설지구내 ☎ (061)534-0775
 
◈푸른모텔 객실22개.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 땅끝마을 ☎ (061)534-4985
 
◈송호리 해수욕장 민박
·용공배 : 방 수 7개, 샤워장, ☎ (061)533-2128
·박양율 : 방 수 10개, 샤워장, ☎ (061)533-2374
·김민호 : 방 수 7개, 샤워장, ☎ (061)533-2364
·김승학 : 방 수 8개, 샤워장, ☎ (061)533-6487
 
◈사구미 해수욕장 민박
·조광영(돌고래 회집 민박) : 방 수 8개, 샤워장, ☎ (061)533-2619
 
◈땅끝마을 민박
·박태석 : 방 수 8개, 샤워장, ☎ (061)533-4271
·김환용 : 방 수 8개, 샤워장, ☎ (061)533-6389
 
관광코스
◈제1코스 해남 → 녹우당 → 두륜산 대흥사 → 북일 고분지역(신방고분) → 달량진성 → 이진성 → 사구미 해수욕장 → 땅끝 → 송호 해수욕장
 
 
 
두륜산의 운교(구름다리)
◈제2코스 해남 → 화산 석정지석묘 → 달마산 마황사 → 군곡패총 → 송호 해수욕장 → 땅끝 → 사구미 해수욕장 → 이진성 → 달량진성 → 북일 고분지역 → 녹우당 → 대흥사
 
◈제3코스 해남읍성 → 우항리공룡화석지 → 우수영성 → 명량대첩지 → 해남
 
관광안내소
◈해남군청 성내리 해남군청 문화관광과 ☎ (061)530-5224
 
여가시설
◈해남공설운동장 운동장 20,400㎡, 실내체육관 6,138㎡, 테니스장 1,984㎡, 우슬재 소재
 
◈다목적 실내 체육관 해리 소재
 
◈자연휴양림 계곡면 흑석산
 
 
 
 
 
 
6. 문화시설자원
 
전수회관
◈여성회관, 장애인복지회관, 유도회관
 
◈우수영 강강술래 전수회관 우수영 면사무소, ☎ (061)532-13521
 
문화원
◈해남문화원 1965년에 설립하고 1984년에 재건, 1994년에 지방문화원진흥법에 의한 창립총회를개최. 부대시설로는 향토문화자료실·작은도서실·향토문화연구소·지역문화학교·영상음향실이 있으며 해남문화원 청소년국악단을 운영하고 있다. 해남읍 성내리 4번지 ☎ (061)533-5345. FAX 535-5556, 지역문화학교 ☎ (061)536-4002
원장 황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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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