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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정읍시 전라북도 정읍시 정보
전라북도 정읍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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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023년 12월 1일
정읍시의 역사문화자원
2005년 6월
2005년 6월 3일
about 전라북도 정읍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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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01:00) 
◈ 정읍시의 역사문화자원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정읍사(井邑詞)와 망부석(望夫石), 상춘곡(賞春曲)과 정극인(丁克仁), 정순왕후(定順王后)와 시산리(詩山里), 고현동 향약(古縣洞鄕約), 호호정(浩浩亭)과 정여립(鄭汝立), 조선왕조실록과 손홍록(孫弘錄), 안의(安義), 송정(松亭)과 영모당(永慕堂)의 7광(七狂) 10현(十賢), 갑오동학혁명(甲午東學革命)과 그 유적지(遺蹟地), 무성서원(武城書院)의 호남유림대회(湖南儒林大會)와 서보단(誓報壇), 무성서원(武城書院)의 호남병오창의(湖南丙午倡義), 이승만(李承晩)의 정읍발언(井邑發言) / ◈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최치원(崔致遠), 김회련(金懷鍊), 정극인(丁克仁), 이항(李恒)
목   차
[숨기기]
 

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정읍사(井邑詞)와 망부석(望夫石)
정읍사는 지금부터 1300년전 백제시대의 것으로 가장 오래된 가요(歌謠)이다. 집을 떠나 장사하러 나간(行商) 지아비(男便)를 기다리다가 지쳐 돌(바위)이 되어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말았다는 백제여인의 애절한 정(情)과 의(義)가 그 속에 숨어 있다. 이 노래는 통일신라 이전인 백제 때부터 불러왔던 것이다. 1930년대에 수제천(壽齊天, 井邑)을 빗가락정읍(橫指井邑)이라고 하였으며 지금 국립국악원에서 ‘수제천’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정읍에서는 1990년부터 매년 정읍사문화제(井邑詞文化祭)를 거행하고 있으며 백제 여인의 부덕(婦德)을 기리는 부도상(婦道賞)을 제정하였다. 또한 정읍사공원(井邑詞公園)에는 정읍사문화회관, 정읍사국악원, 정읍사야외공연장, 정읍시립도서관 등 문화시설이 모여있다. 1994년에 망부석 서쪽에 정읍사사우(祠宇)를 짓고 백제여인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정읍사가무극단이 창설되었으며 정읍사공원은 1985년 아양산(阿洋山) 동쪽기슭 1만 1천평 위에 만들어 졌다.
 
◈ 상춘곡(賞春曲)과 정극인(丁克仁)
불우헌(不憂軒) 정극인은 경기도 광주군 두모리에서 1401년인 태종 때 태어났다. 그는 평소에 불교를 배척하였던바 태학관(太學館) 학생이면서 흥천사 사리전(舍利殿) 창건의 반대사건에 연루되어 왕명(王命)에 의하여 참형(斬刑)에 처할 것을 황희(黃喜)의 간(諫)으로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귀양살이에서 풀려 나와 처가(妻家)가 있는 태인으로 내려와 가호(家號)를 불우헌이라 하였으며, 자연속에서 정신을 수양하고 젊은이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키며 지도하였으니 이게 바로 고현동향약(古縣洞鄕約)의 시초이다.
 
그 뒤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관직에 나갔다. 학문은 깊으나 늙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덕망있는 선비로 추천받아 늦게 벼슬을 하게 되었으니 그것도 특례였다. 친구들의 권유로 51세인 1451년에 시험에 응하여 문과에 합격하여 열심히 봉직하다가 70세에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는 「불우헌가(不憂軒歌)」, 「불우헌곡(不憂軒曲)」과 같은 왕의 성은에 감격하는 노래를 읊었고 뒤에는 「상춘곡(賞春曲)」을 지어 후세에 남겼다, 1481년 81세로 서거하니 묘는 옛 태인골인 지금의 칠보 은석동(銀石洞)에 있다. 1984년에 송하철(宋河澈) 군수가 대표작인 ‘상춘곡 비’를 칠보 원촌에 세웠다.
 
◈ 정순왕후(定順王后)와 시산리(詩山里)
지금 칠보면(七寶面) 시산리는 조선조 6대왕 단종(재위 1452~1455)의 비(妃)인 정순왕후 여산송씨(礪山宋氏)가 탄생한 곳이다. 정순왕후는 세종 22년에 여랑부원군 현수(玹壽)의 딸로 태어나 단종 2년 1월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잃고 세조 2년에 노산군(魯山君)으로 되어 영월로 귀양을 가니 왕비도 부인(夫人)으로 강봉(降封)되었다. 단종이 돌아간 뒤에 동대문밖 연미정동(宴尾亭洞)의 청룡사에 초옥을 지어 정업원(淨業院)이라 하였다. 그가 중종 16년 6월 4일에 82세로 세상을 떠나니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지냈다.
 
숙종 24년에 단종이 복위되자 단종의 신위와 함께 창덕궁에 봉안하였다가 종묘 영녕전에 옮겨 모셨다. ‘정순왕후유허비각’이 시산리 동편마을에 세워졌다. 태인향교의 만화루(萬化樓)는 정순왕후로 인해서 건립된 것이다.
 
◈ 고현동 향약(古縣洞鄕約)
현아(縣衙)의 소재지였던 지금 칠보면(七寶面) 시산리(詩山里)는 옛날 태산현(太山縣)의 고을터이다. 고현동각(洞閣)은 태인 오학당(五學堂) 중 하나인 남학당(南學堂)에서 유래되고 이 학당은 성종때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의 향학당(鄕學堂)에서 비롯되니 고현동각은 이에서 시작된 것이다.
 
정극인은 벼슬을 버리고 성종 6년(1475)에 학당을 세워서 중국 남전(藍田)의 여씨(呂氏)향약과 같은 고현동향약을 만들어서 미풍양속의 근본으로 삼아 주민자치(住民自治)와 향풍(鄕風)을 바로하여 동민의 화합을 도모하고 향음예(鄕飮禮)를 실행했으니 우리나라 향약의 선구였다. 예산향약(禮山鄕約)보다 약 90년이나 앞서있다. 여기에는 ‘동각’이 있으며 보물(寶物)로 지정 되어있다.
 
◈ 호호정(浩浩亭)과 정여립(鄭汝立)
조선조에 월봉(月峯) 김대립(金大立)이 호호정을 세웠다. 역신 정여립이 근처에 정자를 세우자 연탁(連托)하려는 꾀인 것을 알고 이 호호정을 헐어버렸다.
 
그 뒤 정여립이 선조 22년(1589)에 반란을 일으켰다. 조선조 정조 6년(1782)에 김대립의 후손들이 이곳에 ‘毁亭見明 浩浩亭(정자를 허물어 후일에 광명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라 하였다. 김대립은 도강인(道康人)으로 일제(一齊)의 문인이다.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를 지냈으며 임진란의 창의(倡義)에 참가하였다. 송정(松亭) 7광(七狂)의 한 사람으로 송산사(松山祠)에서 제사 지내고 있다. ‘호호정유허비’가 있다.
 
◈ 조선왕조실록과 손홍록(孫弘錄), 안의(安義)
조선조 선조 25년(1592) 임진(壬辰)년 4월 16일에 동래(東萊)에 침입한 왜적이 전주(全州)로 육박해오자,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왕조실록을 보존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이때 전라감사 이광(李光)은 여러 사람과 숙의한 바, 정읍현(井邑縣)에 있는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기기로 하고, 이 일을 태인현(泰仁縣)의 손홍록(孫弘錄)과 안의(安義)로 하여금 하도록 하였다. 실록본기(實錄本記)가 90여 짐바리(馱)였고 고려사기문(高麗史記文) 등이 20여 짐바리나 되어 실로 큰 짐이었으나 두 사람은 무사히 옮기었다. 바로 이어 수용(樹容, 御容)은 7월 1일 내장산 용굴암에 봉안되었다.
 
경기전(慶基殿) 실록각(實錄閣) 소장의 이 실록은 조선조 태조 원년인 1392년부터 명종 22년인 1567년까지 176년간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하였으며 805권에 달하는 큰 분량이다. 손홍록과 안의는 같이 태인(泰仁) 사람으로, 일제(一齊) 이항(李恒)의 문하인이다. 임진전쟁 7년으로 춘추관(春秋館) 충주(忠州) 성주(星州) 사고의 실록은 전부 소실되었으나, 오직 경기전의 실록과 수용은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오늘날까지 보존되었으니 우리 사적문화(史籍文化)에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두 사람의 큰 뜻을 기리는 듯 숙종 2년(1676)에 지방 유림들의 발의로 ‘남천사(藍川祠)’에 배향하였다. 그뿐 아니라 내장사에 ‘조선왕조실록 내장산 이안사적비’가 있다.
 
◈ 송정(松亭)과 영모당(永慕堂)의 7광(七狂) 10현(十賢)
광해군(재위, 1608~1623) 때 왕권이 해이해지고 인권이 박탈되면서 장안에 변란이 극도에 이르니 명망 있는 사람과 충절하는 선비가 모두들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숨게 되었다. 태산(泰山, 현 七寶)에 있는 송정의 여러 선비들이 그러하다.
 
조선조 광해군(光海君)때 폐모사건에 항소한, 세상에서 말하는 7광(狂) 10현(賢)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 송정에 모여, ‘바람을 읊으고 달을 노래 하며’ 어지러운 세상에 벼슬을 버리고 세월을 보내던 곳이다. 이들 후손들이 영당(影堂)을 세우고 7광도(七狂圖)와 10현도(十賢圖)를 봉안하고, 조상의 높은 기상과 우국의 뜻을 기리며 춘, 추 중정(中丁)에 제사를 지냈다. 1898년에 영모당(永慕堂)을 만들었는데 송정영당(松亭影堂)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7광 10현도를 모시었다. 10현도의 영상을 송민고가 그렸는데 근세에 와서 채정산이 다시 모사한 것이다. 지금 칠보에는 ‘송정’과 ‘영모당’이 있다.
 
◈ 갑오동학혁명(甲午東學革命)과 그 유적지(遺蹟地)
1894년 갑오년 1월의 고부(古阜) 봉기(蜂起)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와 민족의 자주(自主)를 내세운 민중운동이다. 처음은 고부군수의 학정(虐政)에 못견디어 일어난 고부군민(郡民)의 민요(民擾)였다면 3월의 백산봉기(白山蜂起)는 민중(民衆, 농민을 포함한 모든 국민)과 동학교도(東學敎徒)가 어울려 ‘폭력을 제거하여(除暴) 백성을 구하자(救民)’는 깃발 아래 전봉준(全琫準) 손화중(孫華仲) 김개남(金開南) 등이 일어난 것이다. 9월의 삼례 봉기는 일본군의 침입으로 국권(國權)이 위기에 빠지자 ‘충성을 다 하여 나라를 도우며(輔國)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安民)’는 구호를 내세워 척왜(斥倭)를 부르짖고 일어난 것이다.
 
반봉건과 민족자주를 내 건 갑오동학 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 역사에 준 영향은 많다. 정읍에는 갑오동학혁명 유적지 기념관이 1983년 12월 31일에 세워졌다. 덕천면 상학리(德川面 上鶴里)에 있으며, 현재 약 5만평으로 10만평의 확장계획을 세웠다. 여기에는 유물기념관(遺物記念館), 전봉준 동상, 제민당(濟民堂), 구민사(救民祠, 祠堂), 보국문(輔國門), 제세문(濟世門) 등이 있다. 매년 5월에 갑오동학혁명기념문화제를 거행한다.
 
◈ 무성서원(武城書院)의 호남유림대회(湖南儒林大會)와 서보단(誓報壇)
을미(乙未)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의 흉계에 의하여 살해된 뒤, 1903년에 한양에서는 그 추모사업으로 명성황후 감모비(感慕碑) 건립사업이 추진되어 각 도별로 모금에 나섰다. 전북에서도 무성서원에 내려와 각 고을의 향교에 통문을 보내어 내장사에서 호남유림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도내 27개 향교에서 54명의 대표들이 모여 감모비 건립을 위한 성금 뿐 아니라, 우리 고을에 서보단을 세워 영원한 표적으로 삼고, 명성황후의 해원을 맹서하며 해마다 8월 20일에 추모제를 갖기로 하였다. 이 대회는 행동으로 어떤 결과를 얻지 못했으나 일본에 대한 복수를 맹서한 유림들의 집단 행동이라는 것에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지금 정읍시에는 내장사 앞에 ‘서보단사적비’와 ‘기념탑’이 있다.
 
◈ 무성서원(武城書院)의 호남병오창의(湖南丙午倡義)
을사 5적(乙巳五賊)에 의하여 일본과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우리 강토는 척왜(斥倭)의 절규로 뒤덮혔다. 이때 호남에서는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1906년 고종광무 10년에(丙午) 무성창의가 있었다. 주동 인물이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秉璨)으로 4월에 무성서원에 있었던 강회(講會)에 임병찬 등 인근의 선비들이 모였다.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급에 처하여 의거(義擧)할 것을 역설하니, 이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80여명에 달했다.
 
의거당시 인원을 점검하니 900명인데 서생(書生)이 반이고 총과 칼을 가진 사람은 300명에 불과하였다. 담양에서 전주진위대(鎭衛隊, 朝鮮軍)와 남원소대(小隊)의 공격을 받으니 최익현 등은 우리 군사끼리는 싸우지 말자고 하였으나 그들 관병(官兵)들이 아랑곳 하지않아 전투를 치루고 나니 일본군과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남아 있는 우리의 의병은 21명이었다. 원래 조련이 안된 민병인 탓으로 대부분의 의병들이 도망치고 말았으니 최익현도 대세를 보고 체념하였다. 4월 23일 최익현과 임병찬은 일본군 수비대(守備隊)에 잡혀 대마도(對馬島)로 끌려가게 되었다. 최익현은 일본이 준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단식(斷食)하여 그해 11월 17일 이역에서 74세로 운명하였다.
 
한편 임병찬은 다음 해 1월 황태자의 가례(嘉禮)로 특사되어 석방되고 고국으로 돌아 왔다. 지금 무성서원 옆에 ‘병오창의기적비’가 있다.
 
◈ 이승만(李承晩)의 정읍발언(井邑發言)
1945년 8월 15일 광복이후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당연히 남, 북을 합한 통일된 민주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은 국민의 열망이였다. 미군정청(美軍政廳)이 좌우합작(左右合作)을 통한 하나의 정부를 세우려 함으로 공산주의와는 타협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이승만은 미군정청 안을 반대 하였다.
 
전국을 순회하는 강연 중 정읍에서 “남쪽에서 임시 정부를 세우든지, 또는 정부를 세우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자”는 발언을 했다. 이를 가리켜 ‘정읍 발언’ 이라 칭하며 속칭 단독정부안(單獨政府案)이라고 말한다. 그때가 1946년 6월 3일이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최치원(崔致遠) (857헌강왕 1년 ∼ ?)
신라 말기의 학자, 자 고운, 시호는 문창후. 경주 태생이고 12세에 당(唐)에 유학,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변의 종사관으로 황소(黃巢)의 난에 도통순관(都統巡官)이 되어 격문을 써서 이름을 높인 바 있고, 885년인 28세때 국신사(國信使)로 귀국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제수받았으나 조정에서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 886년(정강왕 1년)에 정읍의 태산(泰山, 지금의 태인) 군수로 왔다. 군수 당시의 유적으로 유상대지(流觴臺址)와 피향정(披香亭) 등의 전설이 있고,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태산사(泰山祠)라 하여 내려오다가 지금의 무성서원이 되었다. 뒤에 그는 난세에 절망하여 각지를 유람다니다가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영정(影幀)은 1784년 쌍계사(雙溪寺)로부터 이곳 무성서원으로 모셔왔다.
 
◈ 김회련(金懷鍊)
도강인(道康人)이며 도강백(道康伯) 희조(希祖)의 후손이다. 조선 태조의 창업에 협찬한 개국 원종공신(原從功臣, 1395)이며 그 뒤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부임하여 도성을 쌓았다. 뒤에 이조판서에 증직 되었고, 그 시호(諡號)를 충민(忠敏)으로 받았다. 그 부인은 독자인 덕방(德芳)을 데리고 태인 고현내(古縣內, 현 七寶)로 내려왔다. 그의 개국원종공신록권(보물 제437호)은 연시각(延諡閣)에 있고, 한말에 세운 도봉사(道峯祠)에서 제사를 모신다.
 
◈ 정극인(丁克仁)
영광인(靈光人)이다. 호는 불우헌(不憂軒), 1401년(태종 1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 이항(李恒)
연산군 5년(1499)에 서울 신혼동(晨昏洞)에서 출생하였으며, 문열공(文烈公) 조년(兆年)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주부(主簿) 자영(自英)이다. 성주인(星州人)이고 항지(伉之)라 자 하며, 호를 일제(一齊)라 불렀다. 용력이 뛰어나 일찍이 뜻을 무과에 두었으나 나이 서른이 되어 큰 아버지의 훈계를 듣고, 박영(朴英)의 문하생이 되었다. 41세에 어머니와 태인 분동(粉洞)으로 와서 보림사(寶林寺)에 정사(精舍)를 짓고, 일제라 이름하여 학문을 연구하면서 많은 제자를 두었다.
 
1566년인 명종 21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를 모집할 때 수석으로 뽑혀 사축(司畜)에 임명되었고 의영고령(義盈庫令)과 임천(林川)군수를 역임하고, 선조때 의빈경력(儀賓經歷), 선공부정(繕工副正), 사옹정(司甕正)을 거쳐, 선조 7년인 1574년 장령(掌令)으로 불렀으나 사퇴하였다. 얼마후 장악정(掌樂正)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 다섯 차례나 다시 불렀으나 병으로 사퇴 하였다. 태인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때가 선조 9년(1576)이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性理學)의 비조(鼻祖)라 하였으며 이기(理氣)의 철학에도 독보적인 체계를 이루었고, 1577년 선조 10년부터 정읍의 남고서원(南皐書院)에서는 일제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가 살던 유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문중에서 만든 비각이 태인면 태서리(泰西里) 원분동(元粉洞)에 있다. 고종 2년인 1865년에 문경(文敬)의 시호를 받았다. 1803년인 순조 3년에 그의 본관(本貫)인 경상도 성주에 있는 안산서원(安山)에 배향하였다.
 
 
• 최치원(崔致遠) 본관:경주(慶州), 아호:고운(孤雲), 생존시대:857-?, 출생지:경주, 유적지:유상대(流觴臺)
• 정극인(丁克仁) 본관:영광(靈光), 아호:불우헌(不憂軒), 생존시대:1401-1481, 출생지:경기도 광주(現 서울 성동구 옥수동)
• 송세림(宋世琳) 본관:여산(礪山), 아호:눌암(訥庵), 생존시대:1479-1519, 출생지:정읍군 칠보면 시산리
• 정언충(鄭彦忠) 본관:경주(慶州), 아호:묵재(默齋), 생존시대:1491-1557, 출생지:태인 고현내(古縣內)
• 신잠(申潛) 본관:고령(高靈), 아호:영천(靈川), 생존시대:1491-1554, 출생지:서울, 유적지:신잠소상(申潛塑像)
• 이희맹(李希孟) 본관:고부(古阜), 아호:익재(益齋), 생존시대:1475-1516, 출생지:고부군 우덕면 동곡리
• 강일순(姜一淳) 본관:진주(晋州), 아호:증산(甑山), 생존시대:1871-1909, 출생지:정읍시 이평면 서산리
• 전봉준(全琫準) 본관:천안(天安), 아호:해몽(海夢), 생존시대:1855-1895, 출생지:고창읍 죽림리 당촌
• 손화중(孫華仲) 본관:밀양, 아호:초산(楚山), 생존시대:1861-1895, 출생지:정읍시 과교동
• 김개남(김영주)(金開南(金永疇)) 본관:도강(道康), 생존시대:1863-1894, 출생지:정읍시 산외리 동곡리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국보
 
◈ 의안백 이화 개국공신록권 제232호, 연지동 28-3
 
 
■ 보물
 
◈ 은선리 3층석탑 제167호, 영원면 은선리 43
 
◈ 피향정 제289호, 태인면 태서리 102-2
 
◈ 천곡사지 7층석탑 제309호, 망제동 산 10
 
◈ 김회련 공신록권 제437호, 칠보면 시산리 886
 
◈ 이태조 4년 및 6년 왕지 제438호, 칠보면 시산리 886.
 
◈ 창산군 장관의 원종공신록권 제726호, 소성면 화룡리 85
 
◈ 보화리 석불 입상 제914호, 소성면 보화리 110-6
 
◈ 태인 고현동 향약 제1181호, 칠보면 시산리 930-2
 
 
■ 사적
 
◈ 무성서원 제166호, 칠보면 무성리 500
 
◈ 전봉준선생 고택지 제293호, 이평면 장내리 458-1
 
◈ 황토현 전적지 제295호, 덕천면 하학리 산 2
 
 
■ 천연기념물
 
◈ 내장산 굴거리나무 군락 제91호, 내장동 23-3
 
 
■ 중요민속자료
 
◈ 김동수씨 가옥 제26호, 산외면 오공리 814
 
 
■ 유형문화재(이하 도지정)
 
◈ 장문리 5층 석탑 제13호, 고부면 장문리 산 12-2
 
◈ 내장사 조선조 동종 제49호, 내장동 588
 
◈ 송우암 수명 유허비 제50호, 수성동 671-2
 
◈ 태인동헌 제75호, 태인면 태성리 434-1
 
◈ 남복리 5층 석탑 제95호, 고부면 남복리 산 10
 
◈ 용흥리 해정사지 석탑 제96호, 고부면 용흥리 산 14
 
◈ 용흥리 석불 입상 제97호, 고부면 용흥리 산 10
 
◈ 후지리 탑동 석불 제98호, 영원면 신영리 52
 
◈ 남복리 미륵암 석불 제99호, 고부면 남복리
 
◈ 망제동 석불 입상 제118호, 망제동 15
 
◈ 태인향교 만화루 제121호, 태인면 태성리 182-1
 
◈ 군자정 제133호, 고부면 고부리 65
 
◈ 의금부도사 김도언 유물 제139호, 옹동면 산 8
 
◈ 무성리 석불입상 제157호, 칠보면 무성리 350
 
◈ 무성리 삼층석탑 제158호, 칠보면 무성리 350
 
 
■ 무형문화재
 
◈ 판소리 제2-11호, 연지동 338-26
 
◈ 정읍농악 제7-2호, 시기3동 66-1.
 
◈ 악기장 제12-2호, 시기3동 516-8.
 
◈ 시조창 제14-2호, 연지동 252-13
 
◈ 소고 제7-7호, 덕천면 달천리 산 27
 
 
■ 기념물
 
◈ 유애사 제18호, 상교동 344-1
 
◈ 만석보지 제33호, 이평면 하송리 17-1
 
◈ 서현사지 제48호, 태인면 태서리 909
 
◈ 우덕리산성 제51호, 덕천면 우덕리 산 6
 
◈ 고부 구읍성 제53호, 고부면 고부리 산 1-1
 
◈ 두승산성 제54호, 고부면 입석리 산 21
 
◈ 금사동산성 제55호, 영원면 은선리 산 26
 
◈ 은선리토성 제56호, 영원면 은선리 산 193
 
◈ 은석리 고분군 제57호, 영원면 은선리 산1-3
 
◈ 운학리 고분군 제58호, 영원면 운학리 54
 
◈ 지사리 고분군 제59호, 영원면 은선리 402-5
 
◈ 영은사 제63호, 내장동 590
 
◈ 내장사지(벽련사지) 제73호, 내장동 576외 5필지
 
◈ 정충사지 제74호, 정일동 흑암 마을 597
 
◈ 임병찬 창의유적지 제92호, 산외면 종송리 276-1
 
◈ 금동 느티나무 제93호, 소성면 화용리 744-1
 
 
■ 민속자료
 
◈ 신잠선생 영상 제4호, 태인면 태창리 429
 
◈ 남근석 제13호, 칠보면 백암리 1095외 9필지
 
 
■ 문화재자료
 
◈ 정읍향교 대성전 제73호, 장명동 39-2
 
◈ 고부향교 대성전 제74호, 고부면 고부리 166
 
◈ 태인향교 대성전 제75호, 태인면 태성리 182-1
 
◈ 남고서원 제76호, 북면 보림리 537
 
◈ 동죽서원 제77호, 덕천면 상학리 산 13-1
 
◈ 창동서원 제78호, 이평면 창동리 609
 
◈ 도계 서원 제79호, 덕천면 도계리 84-1
 
◈ 고암서원 묘정비 제81호, 상교동 모촌마을 378
 
◈ 신잠비 제105호, 태인면 태창리 산 4
 
◈ 송정 제133호, 칠보면 무성리 산 4
 
◈ 백운암 석불입상 제139호, 이평면 산매리 산 54
 
◈ 옥산서원 제141호, 소성면 예당리 344
 
 
• 태인향교 만화루(泰仁鄕校 萬化樓)
• 무성서원(武城書院)
• 유애사(遺愛詞)
• 고암서원(考巖書院)
• 피향정(披香亭)
• 김회련 공신녹권(金懷鍊 功臣錄券)
• 창성군 장관 원종공신녹권(昌成君 張寬 原從功臣錄券)
• 보화리 석불입상(普化里 石佛立像)
• 태인고현동 향약(泰仁古縣洞 鄕約)
• 전봉준선생 고택(全琫準先生 古宅)
• 황토현 전적지(黃土峴 戰蹟地)
• 김동수씨 가옥(金東洙氏 家屋)
• 태인동헌(泰仁東軒)
• 용흥리 해정사지석탑(龍興里 海鼎寺址石塔)
• 용흥리 석불입상(龍興里 石佛立像)
• 후지리 탑동석불(後池里 塔洞石佛)
• 남복리 미륵암 석불입상(南福里 彌勒庵 石佛立像)
• 군자정(君子亭)
• 의금부도사 김도언유물(義禁府都事 金道彦遺物)
• 만석보 유지비(萬石洑 遺址碑)
• 서현사지(西峴詞址)
• 우덕리 산성(優德里 山城)
• 고부 구읍성(古阜 舊邑城)
• 두승산성(斗升山城)
• 금사동산성(金寺洞山城)
• 은선리토성(隱仙里土城)
• 은선리 고분군(隱仙里 古墳群)
• 운학리 고분군(雲鶴里 古墳郡)
• 지사리 고분군(知士里 古墳群)
• 신잠선생 영상(申潛先生 影像)
• 남근석(男根石)
• 고부향교(古阜鄕校)
• 태인향교(泰仁鄕校)
• 남고서원(南皐書院)
• 동죽서원(東竹書院)
• 창동서원(滄東書院)
• 도계서원(道溪書院)
• 갑오동학혁명 유적지기념관(甲午東學革命 遺蹟地記念館, 소재지:덕천면 상학리 , 비지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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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