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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면 향토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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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편집(A)

▣ 봉평면 향토사 (1993)     평창군 2018.07.12. 11:34 (2018.07.11. 02:38)

一 . 우리봉평

 
목 차   [숨기기]
 1. 1. 덕고산과 태기산
 2. 2. 태기산 전설
 3. 3. 사적지
우리 봉평은 지리적으로 태기산이 남북으로 뻗어 있는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남은 대화면이요 서쪽은 횡성군 둔내면과 갑천 청일면이며 북으로는 홍천군 서석면과 내면을 경계로 하고 있다.그리고 영동 고속도로가 진조리와 면온리를 지남으로 교통이 좋고, 산수가 수려하고 아름다우며 문화 유적지, 명승고적과 아울러 문인, 열사, 효자, 효부가 많은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봉평은 서울서 188km요 대관령서 48km에 위치하고 있다.며 어머니와 같이 인자한 태기산과 씩씩한 장군과 같은 회령봉을 앞세우고 송항치, (웃써근새 재), 갈밭골, 마전치, 말구리재, 삼형제봉, 평촌 동쪽이 부채살 처럼 퍼져있다. 봉평의 젖줄인 흥정천은 흥정리 양지동에서 비롯하여 금강평을 지나 화암을 감돌아 창동을 지나 팔석정을 이루고 판관대 앞을 돌아 나가며 멀리 북쪽 수점동(용평면 노동) 에서 시작한 속사천과 합하고 구룡소를 이루었으며 용전에서 도사천을 만나 장평과 재산을 감돌아 백옥포에서 흥정천과 합류하고 다시 면온물을 만나 한강상류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와같이 산수가 수려한 아름다운 곳이므로 옛부터 산과 물이 감싸고 도는 곳을 지리학적으로 산태극, 수태극이라 하여 이러한 곳에는 율곡 이이 선생 가산 이효석 선생과 같은 인재가 나실 만한 곳이라고 어떤 학자는 평하였다.
 

1. 1. 덕고산과 태기산

덕고산은 태기산의 고호라 한다.
 
덕고산 아래 큰 마을이라 하여 덕거리라 이름한 점과 봉평의 옛 어느 학자가 쓴 글에도 德高山下 白雲陽(덕고산 아래 백운동 양지)이란 부분이 보이는데 덕고산은 태기산의 옛이름이라 함이 옳지 않은가 싶다.
 
청일면 촌노에 물어보니 둔내면 화동리 성황당에도 덕고산 산신령을 모셨으며 갑천 청일 근방에도 덕고산 산신령을 모신 점으로 보아 태기산의 고호가 덕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성터는 태기산인 갑천면 신대리에 있다.
 
다만 덕고산 봉복사 마을에서는 덕고산은 절뒷산이요, 태기산은 그 뒤 큰산이므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2. 2. 태기산 전설

(편집자 주 : 태기산에 전설의 내용에 관하여는 편집부에서 여러 각도로 조사를 실시했다. 평창문화원과 횡성군 문화원의 내용이 차이가 있었다. 많은 고증 자료들을 찾아보았지만 미흡한 부분이 많아 요번 향토사에서는 두 가지 내용을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① 부족국가 시대(B.C 3 세기경)에 예라는 나라와 맥이라는 있었는데 맥이란 나라는 춘천에, 예라는 나라는 강릉에 도읍 하였다고 한다.
(강릉 임영지에 예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두 부족국가는 봉평의 덕고산(현 태기산)을 국경으로 정하고 있었는데 대구 경주 지방에서 진한이란 나라가 맥나라를 치니 맥나라 왕은 항복을 하였으나 아들 태기만은 항복할 수 없다고 하며 군사를 이끌고 횡성을 지나 갑천 개울물에서 군사들의 갑옷을 씻고 (갑천이라 한다) 갑천면 신대리 덕고산에 성을 쌓고 (성꼴) 재기의 꿈을 품고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진한이 와서 치고자 하였으나 아무리 공격하여도 함락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진한의 장수가 어느날 밤 꿈을 꾸는데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이 미련한 놈아 앞만 알고 뒤는 모르느냐. 덜미를 처야지’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한편 태기도 군사를 정비하여 삼형제 장군에게 군사 300을 주어 평촌 삼형제봉에 초소를 치고 호령장 장군에게 군사 500을 주어 진을 쳤는데 삼형제 봉에서 봉화불을 올리면 호령봉에서 알 수 있고 호령봉에서 봉화불을 올리면 태기산에서 알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었다. 진한의 군대가 도주골(현 도사리)로 몰래 들어와 호령봉을 먼저 치니 호령장군은 예기치 못한 기습을 당하였으니 패할 수 밖에 없었다. 호령부대를 섬멸한 적군은 태기산성의 덜미를 쳤다. 이 소식을 뒤늦게 안 삼형제 부대가 태기왕을 도왔으나 산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왕을 모시고 피난을 하려고 점을 쳐보니 원길로 가는 것이 길하다는 점괘가 나온지라 원길로 피난을 하다가 무이리 백운동에서 적군을 만나 싸우던 중 용마봉에서 용마(馬)를 잃고 안자바위에서 안장을 잃고 원길로 못 가고 옥산대에서 옥새를 잃어버리고 왕율에서 잠깐 쉬었다. 그리고 면온에서 전군사를 잃으니 삼형제 장군과 왕 밖에 남지 않은지라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삼형제 장군은 현 백옥포에서 백의로서 왕을 업고 강물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맥국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의 막은 내렸다. 그후부터 덕고산이 태기산으로 명칭이 변화하였다고 한다.
한편 횡성군 둔내면에도 태기왕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 봉평면의 것과는 다소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② 옛날 삼한의 한 나라였던 진한이 새로이 힘있게 나타난 신라와 투쟁을 계속하던 중 삼랑진(三浪津)전투에서 대패하게 되었는데 이 박혁거세거서간(朴赫居世居西干)이 등장하여 한창 흥기할 때이고,진한은 태기왕이 정권을 잡고 있을 당시였다.삼랑진 전투에서 대패하고 국토를 빼앗긴 태기왕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이곳 덕고산에 와서 분노와 한을 안고 재기의 노력을 하였다.
 
그는 실지 회복을 노리며 군사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고 화전을 개간하며 군대를 훈련하기를 4 년간이나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신라에 염탐되어 신라군의 재 추격을 받게되었다. 진한군은 이 산성을 거점으로 신라의 대군을 맞아 싸웠으나 끝내는 또 참패를 당하였으며 진한도 멸망하고 태기왕도 덕거산에서 최후를 마쳤다.이 뒤로부터 태기왕의 이름을 따서 덕고산을 태기산이라 부르고 그 성터를 태기산성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3. 3. 사적지

● 태기산 성지
 
봉평면 무이리 서쪽끝, 태기산 정상에 위치해 있고 그 서쪽은 횡성군 청일면 신대리로 횡성군과 평창군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
 
옛날 태기산은 덕고산이라 불리웠던 산으로 『세종대왕실록 지리지』에는 덕고산성이라 이름하고 둘레 568보 높이 5척이며 샘물이 있고 군창 5간, 관청 2간이 있다고 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돌로 쌓은 성이 둘레가 3653천이고 안에 우물이 있으나 오랜 풍상을 겪는 동안 황폐하였다고 하였다. 이 태기산 부근에는 예맥이 있던 초기 철기 시대 태기왕을 주인공으로 한 전설이 구전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당시에 축조되기 시작한 산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조사단이 현지를 확인한 결과 돌로 쌓은 성벽을 확인하였으며 축조 연대도 상당히 오래 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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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5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