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6 ~ 1608] 조선 중기의 무신이며 의병장.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중평이고, 호는 백운재이며, 시호는 충의이다.
경상 북도 영천에서 덕신(德臣)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4년(선조 17) 별시무과에 급제하여, 수의부의권지를 거쳐 훈련원 부봉사로서 북쪽 변방을 지키는 일을 맡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홍 의 지휘 아래에 있다가, 고향으로 내려가 여러 싸움에서 왜군을 무찔러 전쟁의 성과를 많이 올렸다.
1592년 6월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의 지휘 아래에 들어가 각 고을의 의병장을 모아 의병 대장이 되었다. 7월에 결사 대원 500여 명을 선별하여 적의 진지로 돌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불로써 들이쳐서 영천성을 다시 되찾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 공로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우후가 되었다. 8월에는 군관(軍官)으로
제2차 경주성 전투에 선봉장이 되어 참전하여 패배하였으나, 12월에는 좌도조방장으로 승진하였다.
1593년 2월에 순찰사 한효순과 함께 7군의 군사를 합세하여 문경의 당교 싸움에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으며 산양탑전에서도 적군 100여 명의 목을 베기도 하였다. 4월에는 안동의 모은루 아래에서 적을 크게 격파한 후 구담까지 추격하여 적군 1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경상도 병마절도사 겸 방어사에 특진하였으며, 1594년에 경상도 병마좌별장이 되었다. 4월에는 황룡사 부근에서 적군을 격파하였고, 7월에는 충청도 방어사를 겸직하여 이사명의 군사를 대신 거느리고 은진 현감
이곡과 함께 창암에서
가토〔加藤淸正〕 가 이끄는 군대와 싸워 크게 이겼다.
1595년 경상좌도 방어사를 겸하여 형강에서도 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관찰사
이용순과 병마절도사
김응서와 함께 달성까지 추격하기도 하였다. 제1차와 제2차의
울산 전투에서는 경리인
양호·
마귀 등과 함께 참전하기도 하였다.
1599년 밀양 부사가 되었으며, 1600년에는 의흥위부사직이 되었다. 1604년에 선무공신 2등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하여졌으며, 도총관을 겸직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신령의
경덕사에 배향되었다.
문집에는 《백운재실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