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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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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甲士)
조선 시대 전기 오위제의 중위(의흥위)에 속하였던 군인. 일반 양인층에서 무예에 뛰어난 자를 시험하여 선발한 군인을 말한다. 양인의 의무 군역인 정병과 수군 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한 병종이다.
▣ 지식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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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甲士) 조의제문 강순 유자광 김종직 남이 성희안 훈구파 무오사화 이시애의 난 중종 반정
▣ 백과사전
조선 시대 전기 오위제의 중위(의흥위)에 속하였던 군인. 일반 양인층에서 무예에 뛰어난 자를 시험하여 선발한 군인을 말한다. 양인의 의무 군역인 정병과 수군 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한 병종이다.
 
갑사 라는 명칭은 이미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제도적인 특징을 지닌 군인으로 바뀐 것은, 조선 건국 무렵에 이성계가 자신의 밑에 있는 군사를 중심으로 의흥친군위를 설치할 때였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국가 제도적인 공병으로 확립된 것은 아니어서 각 통솔자의 개인적인 목적에 이용될 소지가 컸다. 1~2차 왕자의 난이 있을 때 권력 다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경국대전이 반포될 무렵에는 1만 4,800명에 달하였다. 이 명칭은 중국 주나라의 상층 군인을 부르던 데에서 기원하였다.
 
1401년부터 왕군의 호위를 담당하는 하나의 특수 병종으로 제도화됨에 따라 사병적인 성격의 갑사는 국가에서 주는 녹봉으로 운영되는 기간병으로 정착하였다. 정종 때에는 개인이 거느리는 병사를 없애 버리고 이들을 삼군부에 귀속시켰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다시 갑사를 살려 궁궐과 도성을 경비하는 업무를 맡게 하였다.
 
또한 병농일치제에 따라 번상 형식의 군역제로 정비되었다. 그들은 사직(5품)·부사직(6품)·사정(7품)·부사정(8품) 등 5~8품의 실직에 올라 자신의 품직에 따라 차등 있게 지급되는 과전과 녹봉을 받다가 세조 때에 직전법이 시행되면서 과전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소요되는 국가 재정 은 한때 경관의 녹봉 중 63%를 차지하기도 하였지만, 국가 가 안정되어 가면서 그 성격이 일부 변하여 대우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국가에서는 차츰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갑사 중 고위품계를 줄이고 하위품계를 늘이기도 하고, 녹봉이 아닌 월봉으로 하여 그 대우를 낮추고 실직 에서 체아직으로 전환시켰다. 갑사의 체아직으로의 전환은 당시 증가하는 지배층을 끌어안기 위해 병력 수를 늘이는 것을 국가의 의도대로 가능하게 한 제도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질을 떨어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근무 평가 단위 인 도에 따라 승진하는 인사 관리 규정의 정비에 따라 국경을 수비하는 양계갑사와 왕성을 시위하는 경갑사로 분리되었다. 이렇게 분리한 이유는 군에 공을 세울 기회가 많은 양계갑사와 그렇지 못한 경갑사의 승진에서 대우가 다른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히 경갑사가 우대를 받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 이러한 경갑사·양계갑사 이외에 맹수를 잡는 착호갑사도 있었다. 근무 임기를 마치고 거관하는 자에게는 종4품의 직위가 주어졌고, 그 중 우수한 자들은 각 지방의 수령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근무중이라도 무예가 뛰어난 자는 수령이나 만호·군관 등으로 진출하였고, 군 공로를 세우면 당상관으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다. 예종 때 영의정을 지낸 강순· 유자광 등은 모두 갑사 출신이었다.
 
법제적으로 갑사직은 모든 양인에게 개방되어, 한량은 물론 양인과 농민의 의무 군역인 시위패(정병)·영진군· 선군, 그리고 이전 등도 갑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심지어 천한 직업이라 하여 일반인들이 결혼하기를 꺼리던 백정들도 들어갈 수 있었다. 갑사는 스스로 기마와 복마(짐말)· 군장은 물론 종자까지 거느리고 왕성의 시위와 궁궐의 숙위를 담당하였다. 또한, 일이 있을 때에 변방을 방어하는 임무에도 동원되었으므로 웬만한 경제력이 아니고서는 그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대체로 노비 5~6구, 토지 5~6결 이상의 소유자로 입대를 제한하였다.
 
그러나 세종 후반 이후 증가된 병력 숫자를 채우기 위해 경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자의 입대도 허락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의 부유한 귀족 아들은 사회적으로 보다 대접받는 유학 공부로 돌아섰고, 갑사직은 차츰 의무 군역을 피하려는 일반 양인들의 입대처로 변하였다. 갑사는 무반 관료이자 중앙군의 중추적인 군사력이었기 때문에 엄격한 심사를 거쳐 뽑았는데, 새로이 갑사를 뽑는 충보갑사취재가 있고, 일단 갑사가 된 후 그 실력을 다시 확인을 받는 과정인 하번갑사취재가 있었다. 충보갑사취재는 1423년 세종 5년에 구체적인 정비가 이루어져, 서울은 5부→ 한성부→ 병조로, 지방은 수령→ 감사, 절제사→ 병조로 이어지는 시험 절차를 거쳤다.
 
그러나 시취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부정 행위 등으로 1443년 다시 국가에서 관리하는 체제로 전환하였다. 취재 과목은 편전, 기·보사와 수박 등 무예만으로 시험되고, 무과에서와 같은 병서에 대한 지식은 요구되지 않았다. 일단 갑사가 된 자라도 번상근무를 마치고, 하번할 때 실시하는 하번갑사취재에 불합격하면 갑사 자격이 취소되었다. 이러한 끊임없는 재시험에 대해 갑사들의 저항이 심하여, 1458년 세조 4년에는 당번 근무 중에 시취하여 성적 우수자는 도를 지급하고, 기준 미달자는 파출하여 정병 등에 속하게 하였다. 하번한 갑사는 지방에 있을 때 지방의 행정력이 부족하면 향촌 사회의 치안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469년 예종 1년에는 대졸과 함께 의홍위, 다시 《경국대전》에 와서 보충대와 함께 의홍위에 속하여 중앙군의 기간 병적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 전기의 갑사는 16세기에 들어와 사회 경제적 변동 속에서 차츰 소멸되어 갔다. 이에 갑사는 그 정원조차 채우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었고, 17세기 이후 역사에서 자취 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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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견직물의 한 가지. 명주실로 얇게 짠 품질이 좋은 옷감이다. 봄, 가을 또는 여름용 한복감으로 많이 쓰인다.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계룡산 동쪽 기슭에 있는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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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