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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강대수(姜大遂)
강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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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강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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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수 (姜大遂)
1591~1658 조선 중기의 문신.
▣ 지식지도
◈ 지식지도
강대수 (姜大遂)
▣ 백과사전
1591~165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춘간·한사만은이다. 아버지는 사간을 지낸 익문이며, 어머니는 합천 이씨이다. 장현광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610년에 생원·진사시를 거쳐 1612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 사서를 지냈고, 이듬해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614년 광해군이 영창 대군을 죽이려 하자, 정온이 영창 대군을 죽이는 것을 반대하여 간언하다가 유배되었는데, 그는 정온을 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평소에 그를 미워하던 대북의 권신 정인홍이 모함하여 관직에서 쫓겨나 회양에 유배되었다. 1923년 인조 반정으로 풀려 나와 영변부 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 뒤 호조 좌랑·예조 좌랑에 올랐다. 다음해 사헌부 정언·지평·장령을 지냈다. 1627년 1월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정경세를 따라서 영남에 가서 의병 을 모집하였으나, 3월에 청나라와 화친하자 돌아와 사간· 주부를 지냈다. 1628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31년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이 되고 이어 수찬 · 부교리 겸 경연시독관·군작감정을 지냈다. 1637년 부응교를 지내고 1639년 통정대부가 되었으나, 1641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와 진주에 살다가 1644년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되고, 이어 우승지· 병조 참지· 병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1651년 전주 부윤이 되어 1년 동안 지낸 다음,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차례 걸쳐 임금이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평소에 학문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석천서재》를 지었으며, 또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연서원》과 《덕곡서원》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유학 을 존중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관직 생활을 통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그가 죽자 세상 사람들이 현대부를 잃었다고 슬퍼하였다. 저서에 《한사문집》이 있다. 합천의 도연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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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