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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거창 민란(居昌民亂)
거창 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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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민란 (居昌民亂)
1862년(철종 13) 5월 7일 경상도 거창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 당시 전국에 걸쳐 일어난 농민 항쟁 중 하나로서, 진주 민란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거창 민란 (居昌民亂) 1862년 박규수 백낙신 진주 민란 임술민란 공주 민란 남해 민란 단성 민란 상주 민란
▣ 백과사전
1862년(철종 13) 5월 7일 경상도 거창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 당시 전국에 걸쳐 일어난 농민 항쟁 중 하나로서, 진주 민란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조선 후기 들어 농민과 지주 간의 대립이 심해지고 삼정 이 어지러워지자, 농민들은 봉기를 통해 불만을 표현하였다. 전정· 군정·환곡 등 삼정의 문란은 이들 농민 봉기가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다. 삼정이란 토지세와 군역의 부과 및 양곡의 대여와 환수를 뜻하는 것으로 오늘의 세금과 같다. 그 당시에는 지방 관리는 물론 그 밑에 있는 관리들까지도 백성들이 낸 세금을 중간에서 빼돌린 뒤 그만큼의 세금을 또다시 거두어들여 백성들을 괴롭혔다.
 
거창 민란 이 일어날 즈음, 이 곳 관리들은 온갖 방법으로 백성들을 가난으로 내몰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부사 황종석의 횡포였다. 그는 1860년 환곡 가운데 1만 159냥을 중간에서 가로챘으며, 가작미 100석, 상납전 1,186냥, 저채·임채 6,400냥도 독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배를 불리느라 비어 버린 창고와 세금 액수를 채우기 위해 토지세라는 이유를 붙여 세금을 더 걷었다.
 
이에 참지 못한 농민들은 황종석이 진주 민란을 살피기 위해 진주로 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들고일어나 마을에 불을 지르고 관청의 문서를 불살랐다. 한편, 거창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황종석은 서울로 피하였다.
 
암행 어사 이인명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내려왔으며, 경상 감영은 주동자인 최남기·이승문 등을 붙잡았다. 이들은 붙잡혀 가던 중 족당들에게 구출되었지만, 후에 다시 붙잡혀 효수(죄인에게 내리는 형벌 중 하나로 목을 벤 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 높이 매달아 두었음)되었다. 이들 외에 신재문·장복영은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장형에 처해졌다. 관찰사 이돈영은 이 때 사람을 목을 베고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아 나중에 문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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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