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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고협(高協)
고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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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협 (高協)
1939년 3월에 고려 영화 협회가 창단한 신극 단체.
▣ 지식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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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협 (高協)
▣ 백과사전
1939년 3월에 고려 영화 협회가 창단한 신극 단체. 개화기 이후의 한국 연극 발전 단계를 나타내 주는 세 가지 용어로 신연극· 신파극· 신극이라는 말이 사용되어 왔는데, 넓은 의미로 이 세 가지 용어 모두 신극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신연극은 우리 나라 최초의 신연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진 1908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일본 신파극의 아류로 볼 수 있는 이인직의 《은세계》와 일본 신파극의 번안 작품들을 거쳐, 근세 서구의 새로운 사조와 방법에 영향받아 연극의 문학성을 강조하는 본격적인 신극 운동이 일어났는데, 1923년 동경 유학생들이 만든 ' 토월회'가 그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신극 의 면모가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1931년 극예술 연구회 가 발족되면서부터이다. 토월회는 사실적인 무대 장치와 의상 등을 보여 주었고, 자연스러운 일상 회화식의 대사 와 연기, 사실적인 연출 등으로 당시의 신파극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진정한 의미의 신극을 수립하려는 목적으로 발족된 극예술 연구회는 1931년 9월에 발족한 이래 1939년 5월까지 만 8년간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신극을 발전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 왔다. 일반 대중에게 가장 가까운 연극은 신파극 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신파극이 성행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일본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을사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우리 나라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을 위한 극장이 세워졌고, 일본 신파 극단에 의한 신파극이 공연되었다. 개화 전까지 성행하던 가면극이나 인형극, 판소리 등은 국권 찬탈 이후 그 기능을 상실하였고, 그 와중에 신파극이 들어와 대중적인 오락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1911년경 신파극이 처음 들어온 이래 임성구의 혁신단을 비롯해 많은 신파 극단 이 생겨났다. 이 때의 신파 극단들은 개화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권선 징악, 풍속 개량 같은 주제하에 연극 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는데, 1912년 임성구가 번안한 《육혈포 강도》 등이 그 대표적이다. 하지만 대본 없는 즉흥적 대사에 배우 부족, 일본식 무대 구성으로 자신들이 내세웠던 것과는 달리 일본 생활 양식과 정서를 그대로 전달하는 우를 저지르고 말았다. 1910년대 말에 이르러 신파극이 극도로 타락하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영화와 연극을 적당히 섞은 연쇄극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생명이 길지 못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와 토월회 등 학생 극단이 근대극을 공연하면서 신파극은 도시에서 밀려나 산간 벽지로 떠돌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신극 을 내걸고 등장하였던 토월회도 나중에는 신파극으로 변질되었다. 1935년 최초의 연극 전문 극장인 동양 극장이 설립되면서 전국 각지를 떠돌며 유랑하던 신파극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동양 극장은 개관과 동시에 청춘좌라는 전속 극단 을 두고 주로 사극과 가정 비극을 공연하였으나, 1939년 경영자가 바뀌면서 전속 배우 몇몇이 탈퇴해 극단 아랑을 조직하면서 전성기가 지나게 되었다. 극단 아랑에 앞서 고려 영화 협회가 바로 이 청춘좌의 단원을 빼내서 조직한 것이 극단 고협이다. 고협과 아랑 두 단체가 해방 전까지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극단으로 꼽힌다. 고협에 가담한 배우로는 심영·박창한·박영호·이재현·지계순·주인규 등이 그 주요 단원들이었다. 처음에는 지방 공연을 주로 하다가 1939년 박영호의 《정어리》를 상연하여 호평을 받으면서, 이후 극단 아랑과 함께 해방 직전까지 대표적인 대중극 단체로 활동하게 된다. 1940년 창립 1주년 기념으로 부민관 에서 유치진이 각색한 《춘향전》을 공연하였으며, 이 때의 수입금으로 ' 조선 연극상'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다음 해 3월에는 창립 2주년 기념으로 유치진 작 《마의 태자 와 낙랑 공주》를 공연하였다. 1941년 12월에 일제가 연극 통제를 위해 결성한 기관인 ‘조선 연극 협회'에 조선 총독부의 강요로 또 다른 8개 극단과 함께 가입하여 민족 문화 말살을 위한 이른바 ' 국민 연극'에 참여하였다. 당시의 극단들은 총독부의 지시하에 공연 때마다 반드시 짧은 일어 연극을 첨가해야 하는 등 엄격한 규제를 받았다. 고협은 많은 작가와 연출가, 무대 장치가를 동원시켰는데, 이 때문에 젊은 패기가 간직되어 있다는 평과 함께 예술적으로 주견이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1941년 박영호의 《등잔불》, 현진건 원작을 함세덕이 각색한 《무영탑》, 송영 각색 《버들피리》와 《그 여자의 일생》 등 많은 작품을 공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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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