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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관동 대학살(關東大虐殺)
관동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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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대학살 (關東大虐殺)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 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발생한 학살 사건. 일본 육군과 경찰은 이 지진을 이용하여 죄없는 우리 나라 사람과 일본 인 사회주의자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 지식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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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대학살 (關東大虐殺) 1923년 간토 대지진
▣ 백과사전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 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발생한 학살 사건. 일본 육군과 경찰은 이 지진을 이용하여 죄없는 우리 나라 사람과 일본 인 사회주의자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지진은 사가미만에서 시작되었으나, 간토 지방 전 지역과 시즈오카현·야마나시현에도 큰 피해를 가져왔다. 지진은 특히 대도시이며, 일본의 중심지인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더욱 피해가 컸다.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후여서, 경제적 대공황으로 인한 궁핍, 노동자 계급의 성장, 일본 공산당의 성립에 따른 계급 투쟁의 격화, 활발해지는 우리 나라와 중국의 반일 민족 해방 운동 등으로 국가적 위기감이 점차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 일어난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 혼란은 우리 나라 사람과 사회주의자를 탄압할 좋은 기회가 되었다. 지진 발생 다음 날 발족한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은 혼란에 빠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계엄령을 선포하게 되었는데,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위기 의식을 느끼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만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 위기 의식을 조성하는 데 일본에 거주하는 우리 나라 사람을 이용한 것이다. 즉,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 비어를 조직적으로 퍼뜨려, 민심이 극도의 불안에 다다르기를 기다렸다가, 이 날 오후 6시를 기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일본 관헌들은 유언 비어를 퍼뜨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민중에게 믿도록 하기 위해 유언반·지휘반·실행반 등의 공작대를 조직하여, 그들로 하여금 불을 지르고 독물을 살포하는 등의 테러 행위를 저지르도록 하여 그것이 마치 우리 나라 국민들이 저지른 것처럼 꾸몄다.
 
그러자 일본 국민은 우리 나라 사람이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그대로 믿게 되었고, 그 보복책으로 각 지방별로 자경단을 조직하였다.
 
이들 자경단에 의해 6,000여 명의 우리 나라 국민과 일본 사회주의자가 학살 당하였는데, 자경단의 학살 행위는 극악 무도하기 이를데 없었다. 즉, 죽창· 일본도· 곤봉· 철봉 등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심지어 경무서 안으로 도망친 우리 나라 사람들까지 쫓아 들어와 학살하는 데도 일본 관헌들은 방조·방관만 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10월 20일 학살 사건의 보도 금지를 해제하면서 사건이 보도되기 시작하였는데, 군대와 관헌의 학살 만행은 모두 은폐시키고, 그 책임을 자경단에 돌리는 데만 급급하였다. 그 후 자경 단원은 형식적인 재판에 회부되기는 하였으나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모두 석방되었다.
 
이 때 학살된 우리 나라 사람의 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신문 특파원이 조사 보고한 바에 의하면, 도쿄에서 752명, 가나가와현에서 1,052명, 사이타마현에서 239명, 지바현에서 293명 등 각지에서 6,661명이 피살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죄없는 우리 나라 사람을 학살한 일본 군벌의 잔악 무도한 행위는 일본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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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