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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귀주성 전투(龜州城戰鬪)
귀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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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성 전투 (龜州城戰鬪)
고려 고종 18년인 1231년 고려에 쳐들어온 몽고군과 귀주성에서 벌인 전투.
▣ 지식지도
◈ 지식지도
귀주성 전투 (龜州城戰鬪) 낙성대 1010년 1018년 강감찬 강민첨 강조 서희 성종 소배압 최충 귀주 대첩 거란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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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18년인 1231년 고려에 쳐들어온 몽고군과 귀주성에서 벌인 전투.
 
몽고 부족은 예로부터 몽골 고원의 북동쪽에 사는 날렵하고 사나운 민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때는 큰 세력을 떨친 적도 있었으나 금나라에 의해 그 세력이 약해졌다. 그러한 혼란기에 테무친, 즉 칭기즈 칸이 등장하였다. 그는 고원에서 패권을 다투는 투르크와 여러 몽고 부족을 합하여 1206년 몽고 제국을 세웠으며, 그 뒤 중앙 아시아로 나아가 당시 서아시아에서 일어난 투르크 이슬람계의 대국 호라즘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조상 때부터의 원수인 금나라 토벌에 온 힘을 쏟아 1215년 장성을 넘어 수도 연경을 함락시켰다. 그 뒤 칭기즈 칸은 세력을 서쪽으로 돌려 7년에 이르는 대원정을 감행하여 호라즘국을 멸망시키고 그 넓은 영토 를 차지하였으며, 다시 서하를 토벌하다가 1227년에 죽었다.
 
1229년 칭기즈 칸의 뒤를 이어 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태종)가 몽고 제국의 제2대 황제에 올라 요동 쪽의 동진국과 금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1231년 8월부터는 고려를 공격하였다. 이를 몽고군의 제1차 침입이라 한다. 귀주(평안 북도에 있는 지금의 귀성)는 북쪽으로는 삭주, 동쪽으로는 태천, 남쪽으로는 정주, 서쪽으로는 선천과 연결된 요충지로서 고려의 현종 때 강감찬 장군이 거란군을 물리친 귀주 대첩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몽고의 장수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고군은 함신진(지금의 의주)을 거쳐 철주와 삭주 등을 차례로 넘어뜨린 뒤 이번에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귀주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정주·삭주·위주· 태주 등 여러 성의 수령과 장수들이 군사를 이끌고 귀주로 모여들어 적과 맞서 싸웠다.
 
몽고군은 맹렬히 공격해 왔으나 번번이 싸움에 지고 물러갔다. 이 때 제일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서북 병마사 박서와 정주 분도 장군인 김경손이었다. 몽고군이 성 밑에 굴을 파는 등 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자 박서는 각지에서 온 장군과 수령들을 성의 사방에 배치하여 방위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계속되는 몽고군의 공격에 용맹과 기지로 맞섰으며, 김경손은 남문으로 공격하는 몽고군을 12명의 결사대와 함께 막아 성을 지켰다. 30일 동안이나 공격하던 몽고군은 1231년 9월에 마침내 물러갔다.
 
그리고, 그 해 10월부터 12월에 걸쳐 다시 여러 차례 공격을 해 왔지만 박서와 김경손의 지휘 아래 고려 군사들의 결사적인 방어 로 이를 물리쳤다. 고려군이 귀주성에서 완강히 맞서며 몽고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있는 동안 몽고군의 다른 부대는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 개경을 에워쌌다. 이 때 고려와 몽고는 강화 교섭을 시작하여 1232년 1월에는 몽고와의 강화가 맺어졌다. 이에 왕은 감찰 어사 민희 등을 구주성에 보내어 이미 강화가 맺어졌고, 고려의 3군이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싸움을 중지하고 성에서 나와 항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민희와 최임수의 설득과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던 그들은 마침내 항복하였다.
 
귀주성 전투의 상황을 돌아본 몽고의 나이 든 한 장수는 "내가 무수한 싸움에 참가하였으나, 이와 같이 맹렬한 공격을 받고도 끝내 항복을 하지 아니한 일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뒤에 나라에서는 장수들이 성을 지킨 공로를 기리기 위해 귀주를 승격시켜 정원 대도호부로 하였다.
 
한편, 고려에서 행해진 몽고의 풍속을 몽고풍이라 하는데, 고려 고종 때부터 몽고의 침입을 받고, 그 뒤 몽고와의 우호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고려의 상·중류 계급에서는 몽고 풍속이 크게 유행하였다. 지금까지도 그 일부분이 우리의 말과 풍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예를 들면, 첫째, 여자들의 족두리, 둘째, 남녀가 옷고름에 차는 장도칼, 셋째, 신부가 연지를 찍는 풍속, 넷째, '그치' '저치' '장사치' 등 어미에 '치'를 붙이는 말의 습관, 다섯째, 여자들이 귀뿌리를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속, 여섯째, 왕의 진지를 '수라'라고 부르는 것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줄타기·땅재주·칼날 디디기 등의 기예와 투전놀이 등의 원래 형태는 모두 몽고로부터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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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년 (고려 고종 18) 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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