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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김규철(金奎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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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철 (金奎哲)
1881~1929 의병· 독립 운동가.
▣ 지식지도
◈ 지식지도
김규철 (金奎哲)
▣ 백과사전
1881~1929 의병· 독립 운동가. 충청 북도 단양에서 태어났다. 1907년 8월 헤이그에서 열렸던 만국 평화 회의에 이준 등을 파견하였던 것을 이유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킨 다음,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는 정미 7 조약을 체결, 차관 정치를 시작하면서 대한 민국의 군대마저 해산하였다. 군대가 해산된 뒤, 김규철은 단양·제천·영주·예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의병 대장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진 뒤 우리 나라의 의병 봉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왔었다. 1908년 9월에는 소백산 죽령 지역에서 의병 4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5차례나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하여 단양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대구 형무소 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 탈출하여 서울로 몰래 들어왔으며, 1909년에는 청나라 위안 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청하는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나가다가, 인천에서 체포되어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 이범규·최익환 등과 힘을 합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을 호위하여 중국으로 망명하던 중, 만주 안동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1922년에는 국내에서 모금한 군자금을 가지고 상하이〔上海〕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로 가는 도중, 인천에서 다시 체포 되어 서울에서 재판을 받았다. 총독부로부터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함흥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77년에 대한 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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